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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덕후 한국언니 Jul 10. 2024

책무당벌레

산책덕후의 책수집 기록 1

유진(가명)은 2년 전에 내가 처음으로 완성한 장편에세이(브런치북) <가을의 미국산책>에도 등장한다. 서른 살 생일에 존 싱어 사전트의 <마담X> 미니어처가 담긴 엽서에 그 모델인 마담X를 언급하며 길이길이 남을 편지를 써주었기 때문이다. 날짜를 제외하면 네 줄 밖에 안 되는 짧은 편지는 <가을의 미국산책>에 전문 인용이 되어있다. 원작자의 동의 하에, 익명으로.


이후 리뷰와 미니 픽션과 논픽션과 아무말을 오가는 장르파괴 책썰에 본격적으로 그녀가 등장하면서 나는 유진이라는 가명을 지어줬다. 존 싱어 사전트의 원화를 직관하고 패션화보 명문가에 입덕할 거라는 예지였을까? 문제의 그림은 심지어 지구 반대편에 있는 그 미술관에 3년 간격으로 두 번이나 방문해서야 겨우 나와 함께 아이폰 카메라의 프레임 안으로 들어왔다. 존 싱어 사전트의 그림을 리뷰하려다 프랑스어 덕질을 시작한지도 1년이 넘었다. 프랑스어와 관련한 자료수집은 작년 서울국제도서전에서 아니 에르노의 노벨문학상 수상작 <세월>을 프랑스어판 원서로 구입한 것과 로런 엘킨의 <도시를 걷는 여자들>의 주석노트를 만들다 만 것 정도였다.


하지만 주석노트 덕분에 프랑스 산책덕후 이름의 세례를 맞아도 멘붕이 오지 않았다. (심지어 보들레르는 읽기도 했다.) 친해져도 별일 없는 독일어(가끔 별 해설 없이 영어책에 등장하긴 하지만)와 친해지는데 아주 오래 걸린 스페인어 다음으로 그나마 읽을 수 있는 언어가 되어가는 중이다. 일본어는 듣고 말하기까지 (조금은) 할 수 있지만 읽을 수 없다.




내가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사실 중 하나는 유진이 그림(미래의 내 그림 취향) 뿐 아니라 문학에도 예지력이 남다른 사람이라는 것이다. 지난주, 유진과 생일 산책을 하려고 교보문고에서 만났을 때 그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소년이 온다> 리커버를 보고 흥분한 나머지 "개정판, 개정판!"을 외쳐대는 나에게 유진이 "새로 썼대?"라며 확인을 해서 "아니, 리커버!"라고 대답하느라 타이밍을 놓쳤다.


유진은 작년 '사슴벌레식 문답' 시즌, 이 소설에 흥분한 내가 김멜라가 쓴 <각각의 계절> 리뷰까지 언급하자 김멜라의 단편이 수록된 <소설보다 봄 2021>을 빌려주었고, 나는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이 출간되자마자 김멜라의 <제 꿈 꾸세요>를 구입했기 때문에(수상작품집은 북클럽 웰컴키트에 포함되어서 별도로 구입하지 않았다.) 해당 단편은 중복소장하고 있는 중이다.


​유진이 수상을 예지(?)한 김멜라 혹은 내가 본의 아니게 수상을 예언(?)한 한강이나 권여선은 이미 대세 작가였으므로 우리가 엄청난 신통력을 발휘했다고 할 수 없다. (물론 김멜라 대상 소식을 들었을 때까지 엄청났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지지난주 나만의 생일 산책을 하며 들렀던 서점들은 너무도 취향을 저격하여 그야말로 산더미같은 책을 업고도 광란의 댄스파티를 (정신적으로) 하면서 귀가했는데, 아마 두 번째 서점의 시집 코너에서 <날개환상통>과 <당신의 첫>이 나란히 놓여있는 것을 발견했을 것이다.


<날개환상통>으로 2024 전미도서상을 수상한 김혜순 시인의 <당신의 첫>은 유진이 <마담X> 엽서와 함께 무려 12년 전에 선물한 책이다. 시집이라는 이유로 읽지도 않고 방치했지만 이사할 때마다 책을 정리했기 때문에 문학과지성사 시집 표지 이미지는 뇌리에 각인되어 있었다. 두 책이 나란히 놓여있기 전까지, 그 시인이 이 시인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이쯤이면 한강이나 김혜순이 아닌, 유진을 연구해야겠다고 유진이 모르게 다짐해본다.


책무당벌레는 내가 아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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