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덕후의 책수집 기록 1
유진(가명)은 2년 전에 내가 처음으로 완성한 장편에세이(브런치북) <가을의 미국산책>에도 등장한다. 서른 살 생일에 존 싱어 사전트의 <마담X> 미니어처가 담긴 엽서에 그 모델인 마담X를 언급하며 길이길이 남을 편지를 써주었기 때문이다. 날짜를 제외하면 네 줄 밖에 안 되는 짧은 편지는 <가을의 미국산책>에 전문 인용이 되어있다. 원작자의 동의 하에, 익명으로.
이후 리뷰와 미니 픽션과 논픽션과 아무말을 오가는 장르파괴 책썰에 본격적으로 그녀가 등장하면서 나는 유진이라는 가명을 지어줬다. 존 싱어 사전트의 원화를 직관하고 패션화보 명문가에 입덕할 거라는 예지였을까? 문제의 그림은 심지어 지구 반대편에 있는 그 미술관에 3년 간격으로 두 번이나 방문해서야 겨우 나와 함께 아이폰 카메라의 프레임 안으로 들어왔다. 존 싱어 사전트의 그림을 리뷰하려다 프랑스어 덕질을 시작한지도 1년이 넘었다. 프랑스어와 관련한 자료수집은 작년 서울국제도서전에서 아니 에르노의 노벨문학상 수상작 <세월>을 프랑스어판 원서로 구입한 것과 로런 엘킨의 <도시를 걷는 여자들>의 주석노트를 만들다 만 것 정도였다.
하지만 주석노트 덕분에 프랑스 산책덕후 이름의 세례를 맞아도 멘붕이 오지 않았다. (심지어 보들레르는 읽기도 했다.) 친해져도 별일 없는 독일어(가끔 별 해설 없이 영어책에 등장하긴 하지만)와 친해지는데 아주 오래 걸린 스페인어 다음으로 그나마 읽을 수 있는 언어가 되어가는 중이다. 일본어는 듣고 말하기까지 (조금은) 할 수 있지만 읽을 수 없다.
내가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사실 중 하나는 유진이 그림(미래의 내 그림 취향) 뿐 아니라 문학에도 예지력이 남다른 사람이라는 것이다. 지난주, 유진과 생일 산책을 하려고 교보문고에서 만났을 때 그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소년이 온다> 리커버를 보고 흥분한 나머지 "개정판, 개정판!"을 외쳐대는 나에게 유진이 "새로 썼대?"라며 확인을 해서 "아니, 리커버!"라고 대답하느라 타이밍을 놓쳤다.
유진은 작년 '사슴벌레식 문답' 시즌, 이 소설에 흥분한 내가 김멜라가 쓴 <각각의 계절> 리뷰까지 언급하자 김멜라의 단편이 수록된 <소설보다 봄 2021>을 빌려주었고, 나는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이 출간되자마자 김멜라의 <제 꿈 꾸세요>를 구입했기 때문에(수상작품집은 북클럽 웰컴키트에 포함되어서 별도로 구입하지 않았다.) 해당 단편은 중복소장하고 있는 중이다.
유진이 수상을 예지(?)한 김멜라 혹은 내가 본의 아니게 수상을 예언(?)한 한강이나 권여선은 이미 대세 작가였으므로 우리가 엄청난 신통력을 발휘했다고 할 수 없다. (물론 김멜라 대상 소식을 들었을 때까지 엄청났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지지난주 나만의 생일 산책을 하며 들렀던 서점들은 너무도 취향을 저격하여 그야말로 산더미같은 책을 업고도 광란의 댄스파티를 (정신적으로) 하면서 귀가했는데, 아마 두 번째 서점의 시집 코너에서 <날개환상통>과 <당신의 첫>이 나란히 놓여있는 것을 발견했을 것이다.
<날개환상통>으로 2024 전미도서상을 수상한 김혜순 시인의 <당신의 첫>은 유진이 <마담X> 엽서와 함께 무려 12년 전에 선물한 책이다. 시집이라는 이유로 읽지도 않고 방치했지만 이사할 때마다 책을 정리했기 때문에 문학과지성사 시집 표지 이미지는 뇌리에 각인되어 있었다. 두 책이 나란히 놓여있기 전까지, 그 시인이 이 시인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이쯤이면 한강이나 김혜순이 아닌, 유진을 연구해야겠다고 유진이 모르게 다짐해본다.
책무당벌레는 내가 아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