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우정 2
유진이 유심하게 던져준 그 이름에 대해 되도 않는 질투로부터 벗어났다. 유진에 대한 (속좁은) 질투는 김혜순을 뒤늦게 매치한 후 존경으로 바뀌었으나, 여전히 그 작가-볼드모트에 대한 의심과 잔잔한 반항심은 심연에 웅크리고 있었다. 그게 유진을 통해 볼드모트의 존재감을 깨달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게 되자 마침내 자유가 찾아왔다.
마치 유진을 짝사랑하다 이제야 공식적으로 친구 인증마크를 받은 것만 같다. 해방감에 다른 시름을 조금 잊는다. 유진은 내게 부케를 던져 준 다섯 명의 신부 중에서도 센터인데 이제야 나는 그녀의 진정한 친구로 (내 메타인지에게) 인정받은 것이다. 그간 끝없이 유진이 가진 모든 것을 부러워하며 불안했다. 내가 가지려면 다시 태어나야 하는데 정작 그녀는 그리 자랑하지도 않는 것들. 그런 아무렇지 않음까지도 부러웠다.
나라면 자랑스러워 콧대가 높아졌을 것이다. 정녕 내 자랑중독은 허세일 뿐인가. 정작 자랑을 하지 않으면 더 얄미운 존재가 되어(대체 왜?) 은은한 독설을 받아내야 했는데. (물론 유진을 포함한 내 친구 대부분은 비슷비슷한 이유로 각자의 위치에서 질투받이로 살아왔을 것이다.) 졸업식 무렵 토정비결(?)에 경계경보가 떴다. 구설수에 휘말린다고.
따지고보면 구설수는 어디에나 있다. 관종이 아니라 해도 묻어가는 것이 불가능한 사람들이 있다. 그때 내가 왜 자꾸 평범한 척을 했는지 모르겠다. 뭔가를 좀 할 줄 알아야 나대는데 졸업과 동시에 그런 뭔가가 없어(져)서 그랬던 것 같다. 나는 대졸백수였다. 나는 아무도 아닌 무직의 청년이었지만 춤과 패션에 미쳐있었다. 당연히 평범한 척은 먹히지 않았다.
인스타그램에 시동을 걸고 있던 8년 전에는 유진과 퇴사 기념 산책을 했다.
-오랜만에 학교나 갈까?
그날 갑자기 눈이 왔고 우리는 재학시절 한번도 시도하지 않았던(스마트폰이 없었으므로) 설경 셀피를 찍었다. 그로부터 1년 남짓 지나서 벚꽃 산책도 했다. 우리가 만나려면 각자 2시간 정도 이동을 해야했다. 하지만 내가 좀더 나 자신이 될 수 있는 친구들 중에서는 유진이 가까웠다. 다른 친구들은 전주와 춘천 등에 살았고 친구 핑계로 여행을 떠나기도 했지만 여전히 나는 떨어져 있는 친구와 대화를 잇기 어렵다. 콜포비아라는 말이 알려지기 훨씬 전부터 콜포비아(혹은 ARS 중독자)였고 친구들은 대체로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을 하지 않았다. 그들이 소셜미디어를 한다해도 유진을 대체할 수 없다. 그들 모두는 대체불가능한 존재다.
대화, 그리고 걷기.
두가지 모두를 좋아하고 공동작업을 통해 많은 시간을 보낸 친구는 유진 뿐이다. 그걸 마침내 깨달았던 순간은 지난 달의 생일 산책이었다. 나는 다른 사람과 퇴사 산책이나 벚꽃 산책이나 생일 산책을 했던 기억이 별로 없다. 그렇게 오랜 기간 루틴이 생길만큼 가깝게 지내는 사람이 없다. 정신적으로 가까운 친구들은 있었지만 팬데믹 이후로 초토화됐다.
생일이 있던 주에 유진과 점심 약속을 잡았는데 시간제약이 있어서 브런치로 변경했다.
-일찍 와야 산책도 하지.
이렇게 카톡을 보냈던 순간에는 미처 몰랐지만 내가 자연스럽게 '산책하자'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유진 외에는 없는 것 같다. 그런 느낌이다. 유진이 멀리멀리 떨어져 있을 때도 그랬고, 코 앞에 살면서 일 년 동안 거의 대화하지 않은 작년에도 그랬다. 비동거 가족이라는 느낌이다. 최근에는 친동생보다 유진과 더 자주 연락하는데 그게 엄청난 힐링이 된다.
엄마 칠순 기념 산책을 했던 북촌에도 유진과 먼저 갔었다. (엄마를 처음 만난, 즉 내가 태어난 병원도 그 근처이긴 하다.) 정확한 연도는 모르겠는데 <마담X> 엽서를 받기 전인 이십 대 후반이었을 것이다. 홍대 하바나에서 만취한 다음날 알콜좀비인 상태로 유진을 만났다. 북촌을 걷는 동안 유진과 나누었던 대화 중에서 기억이 나는 건 '너 술냄새 나.'라는 문장 뿐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