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을 벗어나 길을 만들어가는 가족들의 서사
"우린 단체 여행을 온 게 아니야.
각자의 모험을 할 거야.
그러려면 차가 여러 대 필요해."
-81p
지난 7월, 할머니의 10주기를 기념하는 선셋파티가 있었다. 그 날 <밝은 밤>을 다 읽고 리뷰를 했는데, 그 후 터지기 직전의 물주머니를 다독인다는 핑계로 많은 날을 읽지 않은 채 보냈었다. 하지만 계속 방치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함께 아팠던 친구들을 보면 곧 죽어도 후회 없을 만큼 용감해지거나, 언제나 죽음을 의식하며 조심스레 살아가는 듯했는데 자신은 역시 후자에 속한다는 점이 내심 못마땅했다.
-95p
올해 정보라의 <저주토끼>를 선물로 보내준 친구가 '작년' 생일에 보내준 정세랑의 <시선으로부터,>가 읽히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더 묵히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그렇게 방어적으로 쓰지 않아도 된다고, 기억을 애써 메우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111p
인터내셔널한 유머감각(내 스타일),
자연과 예술에 대한 호기심(완전 내 스타일),
'말의 밀도'까지 가득한(완전완전 내 스타일),
심시선 일가, 의 하와이 제사 여행은
시작부터 쿨했다.
부당한 도시에서 오로지 서로만 서로의 존엄을 지켜주었기에. 사람을 꺾는 모멸감 속에서 사랑이 싹텄던 것이다. 독한 토양에서 자라는 식물처럼. -122p
헌데 이 가족, 관심사만 다양한 게 아니다. 언듯 화려하게 20세기를 호령한 것 같은 신여성 심시선은 한국에서, 독일에서 바닥까지 무너져 본 사람이었고 그럼에도 끝내 다시 일어나 딸과 손녀들에게 걸크러시를 물려주었다.
"할머니는 그 정도의 악의는 상상하지 못했던 거야. 그런데 우리는 할 수 있지. 21세기 사람들이니까. 그런 악의가 존재한다는 걸 알지."
-143p
저자는 여성캐릭터에게 많은 부분을 할애했지만 심시선의 아들, 사위, 손자에게도 충분한 애정으로 개연성을 부여했다. 그래서 아픔을 가진 딸과 손녀들이 때로는 무심하고 때로는 무섭게 행동하고 남성 가족구성원들이 그에 적합한 반응을 하지 못해도 누구 하나 미움을 사지는 않는다.
어떤 작가들은 일부러 부서지고 보존되지 않는 작품을 만든다. 보존하고 싶어하는 것은 소장하는 쪽이니까, 미묘한 힘의 부딪힘 사이에 보존 전문가가 위치하는 걸지도 모른다.
-232p
남다른 가족모임에서도 끝끝내 말을 삼가는 며느리와 어린 손주들의 '생각'으로만 끝나는 숨겨진 이야기들마저도 애잔하다. 이들 모두가 심시선의 나름 고달픈 여정 덕분에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마음 깊이 서로를 애정하지만 동시에 심시선을 닮아서 당차다는 점이 더욱 사랑스럽다.
일을 사랑하는 마음이야말로 길들여지지 않는 괴물 늑대와 같아서, 여차하면 이빨을 드러내고 주인을 물 것이었다. 몸을 아프게 하고 인생을 망칠 것이었다. -248p
예술가 심시선의 후손답게 틀을 벗어나 길을 만들어가는 가족들의 서사에 현대사와 현대사회의 '거의 모든 것'을 담아낸 역량 또한 훌륭하다. 역사소설인 동시에 여행소설이기도 한데다 저자가 혹은 우리가 남몰래 걱정하는 수많은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흘러가 물음표로 끝난다.
그보다는 그럼에도 당차게 살아라! 라고 외치는 심시선의 영혼과 안면을 튼 기분이 든다.
업계의 대충 희망이 되고 싶었다. 진짜 희망이 나타나기 전의 대타 같은 희망 말이다. 레드오션 업계에서 무난한 자질을 가지고도 오래 견디는 여자가 있다는 걸 보여주면 뒤따라오는 사람들도 힘을 얻겠지 싶어서. -264p
한동한 속상했을 내 할머니의 영혼이 내 주변에 머물다 내가 만난 심시선을 만나서, 잠시라도 행복했으면 좋겠다. 할머니의 역사를 복구하지 못하고 보내드린 것이 늘 마음에 걸렸지만 저자의 말처럼, '할머니가 가질 수 없었던 삶을 소설로나마 드리고' 싶다. 잊혀지거나 알려지지 않은 여성작가들 중에서 노벨문학상과 부커상 수상자를 조사하다 알게된 사람만도 수십명이다. (최근 또 다른 여성 작가 한 분이 명예의 전당에 올맀다.) 우리 할머니가 아니라서, 조금은 질투했던 그녀들의 작품과 생애를 차곡차곡 수집해볼 예정이다.
아마 난정도 결국 쓰게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