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문장을, 다시 읽고 다시 쓸 것

샬럿 퍼킨스 길먼 <누런 벽지>

by 산책덕후 한국언니

자기 몸을 어찌할 수 없는 최악의 운명으로 인식하게 된 19세기 여성들은 자기가 쓴 글 역시 자신에게 위해가 될거라는 예감 속에서 자신을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는 우아한 의무를 저버리고 하나둘 사라져갔다. 1892년 ’나‘ 는 네 발로 기며 그들이 돌아올 길, 우회할 길을 냈다. 어떤 여성의 글은 공동의 언어로 쓰이고 상속된다.


-마지네일리아의 거주자(김지승)




​자세히 보아야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벽지의 무늬는 상상의 산물이었으나 그것은 보이지 않는 거미줄처럼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많은 규제와 억압을 상징한다. 어쩌면 읽기 나름이다. 독자에 따라 다르게 읽는 것은 물론, 같은 사람도 언제 읽느냐에 따라 다르게 읽을 수 있다.


오래 벼르고 있다 인생출판사(!)를 만난 서울국제도서전에서 데려온 <누런 벽지>를 처음 읽었던 8월에는 일기 형식의 이 소설이 누워 있다 미쳐버린, 신경이 좀 예민한 여성의 망상으로 읽혔다. 내로라출판사의 차영지 대표와 함께 초대된 독서모임을 앞두고 다시 읽었을 때 텍스트 속에 숨은 방해자들이 보였다. 마치 무늬 속에 여자나 동물들이 갇혀있는 것처럼(일상 생활에서 그런 걸 느껴본 사람이 있는가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도 있을 것이다. 올리비아 랭의 <에브리바디>를 함께 읽어봐도 좋다.) 이 소설 안에는 저 혼자 잘난 남성의 세뇌와 가부장제에 부역하는 존재들의 친절한 무관심이 있다.


​샬럿 퍼킨스 길먼을 비롯해 많은 작가들이 의도치 않게 정곡을 찔렀다. 대표적으로 헨리크 입센이 있을 것이다. 신경쇠약을 호소하는 아내가 ‘마냥 귀여운’ <누런 벽지> 속 남편에게 <인형의 집>을 운영하던 그 남자가 보이는 건 우연일까? 길먼과 입센의 목표는 가부장제 타파가 아니었기에 그들이 발견한 부분에 균열이 필요하다는 건 더욱 의미심장했다. 인간적으로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대리 수치심을 느끼는 핵심적인 원인은 독자인 나의 입장이 여주인공에게 겹쳐지기 때문이다. 내가 여성이어서가 아니라, 여성으로 ‘보이기(패싱되기) 때문에’ 타인으로부터 ‘아이처럼’ 여겨져온 경험이 몸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남주인공은 자기 아내를 어린아이 다루듯 한다. 그러고도 그들은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고 누구에게도 아무런 제제를 받지 않는다. 심지어 ‘다른 여성’ 등장인물은 그녀가 아닌 그의 조력자처렴 보이기까지 한다.




여성 호르몬의 장난으로 괴물이 될 때가 있다. 그에 대해 정말 다정한 태도로 ‘병원에 가보라’고 조언한 남사친과 크게 싸우고 절교했다. 이 분노를 욕이 아닌 방식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친절하게 설명해봐야 ‘내가 미쳤다’는 것을 인정하는 걸로 보일 뿐이다. 나아가 ‘여자는 원래 미쳤다’고 결론을 내릴 법한 사람들도 (지금까지 이들의 행태로 보아하니) 분명히 존재한다. 전세계 인구의 과반수가 ‘미쳤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야말로 ‘미친 것’이 아닌가?


젠더보다 광기와 정신건강을 다루는 방법에 대해 접근하고 싶지만 남성화된 학계나 담론을 객관적이고 중립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다수의 의견으로 포장된 주류의 시각은 얼마나 폭력적인가. 그리하여 그 모든 문장을, 다시 읽고 다시 쓸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야말로 보통의 현대 시민이 가져야 할 의무다.




내가 얼마나 힘든지 존은 절대 모를 거야. 내가 힘들어 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확신하고, 그 사실에 흡족해하는 사람이니까. -39p


우리 집도 아직 수리 중이고, 나도 당장은 마을을 떠날 수가 없어. 물론, 당신이 위험한 상황이라면 언제든 떠날 수 있고 그렇게 할 거지만, 당신은 정말 좋아지고 있다니까? 당신은 느끼지 못할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내가 의사잖아. 그러니까 내가 더 잘 알지. 살도 찌고 안색도 좋아졌어. 식욕도 좋아지고. 나는 요즘 정말 한시름 놓았어. -71p


지금은 떠날 수 없어. 알아내기 전까지는 말이야. 아직 일주일이나 더 남아 있고, 그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아. -85p



독서모임 추 추가 구입한 내로라 출판사의 책


독서모임에서 만난 이들은 자기 검열과 부분적인 탈출, 휴식치료법의 연장선에서 강요되는 제약, 사랑이라는 이름의 통제 등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책을 기획, 번역, 출판하신 차영지 대표를 통해 표지 일러스트와 다채로운 비하인드 스토리도 들을 수 있었다. 여성 인권에서 동물권으로 확장하고자 했던 독자들에게 차대표가 추천한, 마크 트웨인의 <어느 개 이야기>도 꼭 읽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