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하영 <시그투나>
이상해. 지금 우리가 하는 말이 영화 속에 나오는 대사처럼 어디선가 들었던 내용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어. -91p, 인도차이나
그가 현재의 우리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은 어쩌면 상상력일지도 모른다. -141p, 어느 계절에
알 것 다 알아버린 예술계 노동자에게는 밥벌이가 되어버린 혹은 밥벌이조차 되지 못하는 일에 대한 피로감과 지겨움이 남았다. 재능과 그 재능을 쏟아부었던 사랑의 대상이 사라져버렸다는 씁쓸함과 환멸. -148p, 해설_여전히 남아 있는 것들(이소)
자기계발을 위해 문학이 아닌 자기계발서를 선택하는 사람들을 보면 조금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자기계발서를 통해 충전된 의지를 가지고 이공계 대학에 진학했으나 정신차려보니 장기적으로 하고 싶은 건 (스토리를) 창작하는 것임을 깨닫고 남몰래(?) 시나리오 창작 과정을 독학하던 날들이 내게는 자기계발의 순간이었다.
그래서 ‘17년만에 다시 소설을 쓴다‘(브런치북 독서에세이, <책수집가 산책언니의 독서테라피> 마지막 챕터의 소제목) 싸이월드에 영화리뷰 120편을 쓰다가 첫 단편소설을 완성한 2006년으로부터 무려 17년이 지나 다시 입(?)이 터졌다. 그후 3년 동안 (브런치 기준) 단편소설 7편, 중편소설 1편을 발행했고 중편분량을 넘어선(응모 가능한 최소분량) 장편소설을 연재하고 있다.
예술을 전공했거나, 예술 전공 자체가 목표였던 친구들 중에서 창작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주변에 예술 전공한 사람이 많을래야 많을 수 없는 환경이라 그런가? 예체능을 추구하고 선택할 수 있는 충분한 가능성의 세계를 살아온 사람들을 애써 피해왔을지도 모른다. 요새는 어린 학생들에게 없는 재능을 괜히 칭찬하지 말라는 충고도 보인다. 그 애가 그 말을 듣고 인생을 탕진(?)하면 책임질 건가. 듣고 보니 또 어린 내가 뒤늦게 좌절한다.
한때 춤과 영원한 사랑을 꿈꾸던 나는 이별통을 겪고 있다. 재능을 쏟아부었던 사랑의 대상이 사라져버린 그 환멸(148p) 앞에서, 이것이 삽질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 읽고 쓰는 삶이라면 책을 많이 팔거나 큰 상을 받아서가 아니라, 남부럽지 않은 직장에 취직하기(136p)를 추구하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그런데 굳이 증명을 해야 하나?) 베스트셀러에 오르거나 젊은작가상을 수상해도 직장생활을 계속하는 사람이 많은 시대인데 아직도 좋아하는 일로 밥벌이를 해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어쩌면 대다수인데 내가 외면하는 걸까?) 덕업일치의 포인트는 좋아하는 일로 ’남부럽지 않게‘ 돈벌이까지 하는 것이 아니다. 좋아하는 일이 루틴 안에 있으면 된다. 좋아하는 일을 잘 하는 사람을 마음껏 좋아할 수 있는 것도(일명, 성덕이 되는 것도) 덕업일치가 아닐까.
실제로 버는 것보다 있어보이는 것도 남몰래 고통받는 일이다. 영업사원이 그러하듯, 크리에이터도 궁색해보이지 않는 것이 업무의 일부, 좀더 어려운 점이라면 너무 주류로 보이는 걸 경계해야하는 넓은 의미의 예술가일 뿐이다. (뷰티 크리에이터라면 이런 것까지는 신경쓰지 않아도 되겠지.) 읽고 쓰는 삶을 다루는 책은 라이프스타일 뿐 아니라 내면까지 자극한다. 시간과 화자의 개성이 도드라지는 전하영의 책은 몰입도에 따라 맛이 다르다.
멀쩡한 날 읽으려고 아끼고 아끼다, 들고 나간 게 아까워 ’인도차이나‘를 읽고나니 일사천리로 진행될 줄 알았는데, 12시가 다가온다. (알람이 계속 울린다.) 회고록처럼 읽히면서도 스릴러적 요소를 통해 거리두기가 가능해서 좀더 읽고 싶어지는 소설, 새삼스럽게 다시 반하게 되는 에세이와 이소 평론가의 해설까지 읽고 나니 할말은 많은데 늘 그렇듯 지면과 시간이 부족하다.
<시차와 시대착오>를 읽어보기 전에 <시그투나>를 읽은 사람이라면 발표작 역순으로 전작을 읽으면서 여운을 달랠 수 있다. (부럽소!) <시그투나>를 읽고 신여성에 관심이 생겼다면 김명순의 <내 마음을 쏟지요 쏟지요>, 장영은의 <변신하는 여자들>,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을 추천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