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먹었냐는 물음에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배고프냐는 물음에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나는 행선지를 미리 정해놨다. 의견이 묵살당한 그는 조금 툴툴거렸으나 곧 군말없이 따라왔다. 윤주가 돈까스으!라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기 때문에 저녁메뉴는 자연스레 돈까스가 되었다. 윤주의 돈까스를 썰어주는데 그가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때까지도 그는 자신이 왜 이런 곳에 따라와야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었다.
"썰어주랴?"
"무슨.."
그러면서 나이프의 날을 세워 돈까스를 벅벅 써는 것이었다. 근데 더럽게 못 썰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잘먹겠습니다~!" 윤주가 소리쳤다.
밥을 먹는동안 나는 아이의 행동거지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잘생겼다'는 윤주의 표현에 많은 것이 함축되
어 있다고 무의식적으로 느낀 내 예감은 웬일로 적중했다. 제법 어른스러운 단어로 문장을 구성하려 애쓰며 -물론 그건 전혀 말이 되지 않았다 - 말머리와 말미만 적당한 말투의 음율로 처리했다. 즉, 어른흉내를 내고 있었다.
잊은 건 아니었지만 윤주는 여자아이였다. 그게 이토록 와닿은 적은 처음이었다. 제 나름대로 잘보이고 싶은 것이다. 눈앞의 이 남자에게.
귀엽다고 해야하나 당황스럽다고 해야하나. 두 가지 감정이 동시에 올라오는 것을 느끼는 순간 그것은 뒤섞였다. 그래서 알 수 없어졌다. 하필 윤주의 그런 일면을 보게 된 상황이 이치호의 앞이란 것도 크게 한 몫 한 셈이었다.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윤주의 말에 귀기울이는 것 마냥 보였다. 그래서 그나마 난 안심했다. 안심할만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할 말 있는 거 아니었어?"
그는 새삼스레 그런 말을 묻느냐는 얼굴이었다. 어쩐지 미안해졌다.
“다음에.”
그가 말을 뒤로 물렸다. 별로 중요한 건 아니라고도 덧붙였다.
“다음주가 면접이지?”
“응. 설마 응원해주려고 한 건 아닐테고.”
“어차피 떨어질 일은 없을 거야. 형식적인 자리니까.”
그것도 이미 지난번에 말했다.
“지난번엔.. 신윤주를 언급해서 미안.”
“왜?”
“그냥. 오늘 보니까 그걸 가지고 당신을 휘두르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추가적인 설명 없이 치호는 그렇게 말했다. 누군가에게 사과를 할 것 같지 않아보였는데. 드물게 눈을 마주치지 않고 시선을 피하는 치호의 옆모습에 눈이 갔다.
그 후로 별다른 이야기를 꺼낸 적은 없었지만 나는 치호가 말한 '중심'이라는 말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중심을 생각하고 있자면 여지없이 과녁과 정중앙의 빨간 구가 떠올랐다. 그곳에 화살이 꽂히면서 원을 꿰뚫는 장면. 그럴 때마다 마치 내 심장에 대신 맞은 듯 눈썹을 찌푸리게 됐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생각을 멈추기 어려웠다. 떠올려버린 이미지는 중독성이 있었다. 보통 사람이 말하는 눈썰미가 좋다 눈치가 빠르다 관찰력이 좋다. 이 세 가지를 웃도는 개념이 중심이 아닐까 싶었다.
즉, 고유 능력이라고 볼 수 있다거나? 고등학생이 캐내오기엔 어려울 법한 정보들이 쌓여갈수록 심증은 확증으로 굳어갔다.
"그 밖에 뭘 할 수 있어?"
앞 뒤 생략에 툭툭 던지는 말투를 구사하는 치호 덕에 내 실력도 나름 늘었다. 당해봐라 라고 소심한 복수를 겸해 던져보았는데 그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의아하다는 표정도 없었다. 대신 잠시 고민을 했다. 이걸 말해야하나 말아야하나 하는 얼굴로.
"그 밖에 특별히.. 얼음을 깰 수 있어."
나는 말 그대로 얼음처럼 굳었다. 잘못 들었나?
"진짜야. 그냥 딱딱하게 얼은 얼음웅덩이 같은데서, 한번만 내리치면 깨뜨릴 수 있어."
"뭐?"
진지하게 말하는 치호의 얼굴도 서서히 굳어졌다. 말하는 모습을 보니 거짓말은 아닌 것 같은데, 막상 이런 걸 말로 해본 적이 없고 말로 옮기다보니 쓸데없이 웃기고 어이없는 말이란 걸 제 스스로 자각 한 모양이었다. 어이없어 되물었지만 이미 웃음이 비질비질 새어 나오고 있었다.
한동안 그걸로 치호를 꽤나 놀려먹기는 했지만 나는 그 말을 믿었다. 겨울이 오면 꼭 시켜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 작은 생각이 지금 상황을 좀 더 평화롭게 느껴지도록 했다.
내가 계속 놀리고 있으니 치호가 화제를 돌렸다.
"안 닮은 것 같아."
"누가? 윤주가 나를?"
"응"
"그럴리가. 사람들이 나를 쏙 빼 닮았다고 한다고.“
“뭐라고?”
그가 되물었다. 나는 그가 나를 놀린다고 생각했다.
“됐다.”
“잘 안들렸어.”
내가 눈을 가늘게 떴다. 오냐. 그러면 크게 말해주마.
“나를 쏙 빼닮았다고 한다고!”
내가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이번엔 제대로 들은 그가 나를 쳐다봤다.
믿지 않는 눈빛이었다. 정말? 정말로 그래?
"...아이 엄마를 좀 닮은 구석이 많긴 하지만."
"하하. 그래도 당신 딸인건 알겠어."
"뭔 당연한 소리를.."
"사랑받는 아이는 사랑스럽대."
"?"
“그 아이가 당신의 중심이구나?”
여름바람이 살랑거렸다. 치호의 말에는 진득한 감정이 담겨있었다. 그 말을 듣는 동시에 나도 아아 라는 표정을 지었겠지.
쿵, 하며 떨어지듯 무서운 것일거라 짐작했던 것. 뭔지 모르지만 막연히 피해야겠다고 조심하고 있었던 것. 입으로는 그러지 말라고 하면서 속으로는 계속 경계했던 것.
내가 바라보던 이런 감정까지 너는 파악하고 있었던 걸까?
이치호라는 사람을 향해 날이 서 있던 나의 모든 생각이 순식간에 부끄러워졌다.
나는 그를 향해 머릿속에 항시 경고등을 켜고 있었다.
이 녀석을 너무 신뢰해서는 안 된다고.
무서운 이야기였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실이 바로 무서운 것이었다. 나의 그런 생각들이, 누군가의 내제된 감정 속에 충실히 녹아있는 그 사고가, 그에게는 얼마나 독이 되었을까.
그의 말은 바람을 타고 내게 닿았다. 그건 따뜻함과 부러움을 담고 있었고 아주 조금 쓸쓸했다. 내가 해야 할 말이 있었다.
“그러네.”
“.....”
“고마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도 대답을 기다리진 않았지만, 내 말의 진심이 그에게 닿기를 답지않게도 살짝 기원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