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다섯 살 VS 열아홉

by 은자루

“아빠 여기.”

“여기 여기!”

조막만한 손가락으로 뭘 가리키는 건지 신나서 내게 하나하나 알리는 그녀의 눈동자는 반짝반짝 빛났다.




윤주야 아빠 좀 봐주라. 아이에게 들리지 않을 속마음이 자꾸만 입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어디서 나오는지 모를 힘을 쥐어짜내고도 나는 움직였다.


앞으로도 모르는 것이 내 앞에 훨씬 많을텐데, 그 시간동안 이 아이의 옆에 있지 못할 시간이 더 많았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점점 더 멀어질 일만 남았다. 혜경과 갈라서면서 모를리 없던 현실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어느순간 웃고 있었다. 아이의 기억의 단편 속에 웃지 않는 모습을 새기고 싶지 않았다.


점심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우리는 간단한 식사를 할 수가 있었다. 더 놀겠다는 아이에게 설득에 설득을 거듭한 참이었다. 유난히 단가가 비싸진 콜라를 먹으며 겨우 한숨을 돌렸다. 놀이공원은 자극의 공간이었다. 여기저기에서 아이들의 감각을 자극하는 것들이 쏟아져 나왔고 아이들은 말그대로 정신을 못차렸다.


거기다 주말이라 더해진 인파에 내부는 시장이나 다름없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 이루말할 수 없는 더위와 짜증에 심신이 지쳐버린 부모들을 쉽게 발견했다. 가끔 눈이 마주칠 때마다 나는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도 나를 이해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서 저도 모르게 씁쓸한 웃음이 새어나왔다.


밥을 먹고 난 후 윤주는 조금 차분해졌다. 배가 부른 후 찾아오는 나른함과 평소보다 많았던 활동량이 더해진 탓인 것 같다. 졸린듯 눈을 몇번 비비던 아이가 잠이 드는 건 순식간이었다. 쌕쌕거리는 숨소리를 들으며 묘한 보람과 탈진감이 느껴졌다. 잠든 아이를 데리고 섣불리 이동하기가 애매해서 나는 놀이공원 곳곳에 배치되어 있는 벤치 한 구석에 앉아 20분 정도를 보냈다.


4시 이후로 타는듯한 햇빛이 한걸음 물러난지라 그럭저럭 버틸만 했다. 간간히 불어오는 바람은 습기를 머금고 있었다. 땀에 달라붙은 아이의 얇은 머리칼을 이따금씩 닦아주었다. 나른했다. 아무런 생각없이 멍하니 오가는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 나 자신이 붕 뜬 기분이었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멍한 상태로 있는건 마치 절벽 앞에 서있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뭔가.. 평화로웠다. 몽롱하다고 생각했는데 반쯤 깨어있는 상태로 잠이들었던 모양이다. 단조로운 기본벨소리에 화들짝 놀라 눈을 뜬 걸 보면. 그야말로 화들짝 놀라는 바람에 흠칫 몸이 떨렸다.


정신이 든 순간 전화를 받으며 윤주의 상태를 확인했다. 아직 더 자기를 바라는 마음이 애석하게도 윤주는 내 미동에 끄응 하는 새된소리를 내며 눈을 반쯤 뜨는 중이었다. 평화로운 시간은 끝이 났다.


"여보세요."

"어디야?"


전화 너머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치호였다.


"놀이공원."


왜 나는 순순히 대답을 하고 있는가. 윤주가 몸을 바르작거렸다. 눈동자에는 아직 졸음이 가득했지만 더 자고 싶은 마음은 없는 것 같았다. '통화할 때는 조용히' 라는 말이라도 배운 건지 나를 쳐다보는 윤주는 무언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누구야?


살짝 미소 지었다. 나는 그의 목소리가 퍽 반가웠다. 그가 나한테 '그냥' '심심해서' 연락할 리는 없었다. 그건 나도 알고 그도 알았다. 잠시 침묵이 이어지는가 싶더니 그가 말했다.


"지금 만날 수 있어?"

"으음.."


나는 윤주를 다시 쳐다보았다. 그녀가 나와 눈을 맞추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뭘 안다고 저러는 걸까. 결국 웃어버리고 말았다.


"뭐야. 왜 그래.“


웃는 내 목소리에 이상함을 감지한 치호가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괜찮긴한데.."

"...어디로 가면 돼?"



그는 슬그머니 우리 앞에 나타났다. 분명히 앞에서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가 가시거리안에 그늘을 드리우고 나서야 알아차렸다. 갑자기 끼어든 기척에 놀란 내가 고개를 들었고 시선과 시선이 맞부딪쳤다.

그는 놀란 표정이었다. 그리고 시선은 내가 아닌 윤주에게 가있었다. 내 그늘에 잘 보이지 않던 윤주가 그제야 시야에 들어온 것이다. 오래전 내가 이치호를 처음 만난 그 날 처럼. 그는 살짝 뚱한 표정을 짓더니 자리에 쪼그리고 앉았다. 놀이공원 출입문을 경계로 세상이 달라진 것 같은 고요함이 있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축제의 소리는 되려 어둑한 길목 나무에 붙어 우는 벌레의 울음소리를 더욱 생생하게 해주었다. 우리는 그 틈새에 나와서 이치호를 기다리는 중이었고, 그새 어둑해진 거리 너머로 도시의 빛들은 너울너울 춤을 췄다.


내가 사준 아이스크림을 열심히 핥아먹고 있던 윤주는 갑자기 나타나 자신 앞에 눈을 맞춘 낯선이가 신기한 듯 쳐다본다.

이치호는 여전히 뚱한 표정을 풀지 않은 채였지만, 처음과는 다르게 호기심이 이는 얼굴이었다.


"안녕? 몇살이야?"


윤주가 그를 향해 손바닥을 내어보였다. 다섯살? 아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둘이 대화하는 것을 멍청하게 쳐다보았다. 사실 나는 놀라고 있었다. 굳이 시나리오처럼 이치호가 아 라고 말하면 윤주가 어 라고 대답한다 라는 구체적인 그림은 없었으나 - 아니 애시당초 둘이 대화를 한다는 개념자체가 없었을지도 - 나는 그가 어린아이에게 상냥하게 인사를 건네고 평범한 대화성 주제를 던진다는 상상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와 나의 첫만남이 어떠했던가. 그의 태도는? 말은? 붙임성이 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왜?"

"아니..“


미주알고주알 의외로 죽이 잘맞아 끊기지 않게 윤주와 말을 주고받던 그가 내게 말했다.

티내지 않게 보고있다 생각했는데 아니었나보다.


말을 끝맺지 못한 나를 바라보는 그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곧이어 아아 라는 표정을 지었다. 아아 라니. 그 이상 설명할 길이 없는 얼굴이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입모양만 '아'라는 글자를 허공에 새기고나서 그 입꼬리가 살짝 위로 올라가면서 마무리로 입을 다물며 미소아닌 미소를 짓는.


뭘 알겠다는거야. 그것 외에 읽어낼 수 없었다. 나와 달리 그는 바라보고 잠시 생각하는 것만으로 나를 유심히 파악해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조금 불편하고 동시에 억울했다. 이것도 그 타고난 '재능' 덕분인건지.

잠시 머물던 시선을 거두고 그는 윤주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여기 와서 뭐 탔어? 재밌었어? 그때마다 윤주는 손을 드는 수많은 학생 중 선생님의 선택을 받은 아이처럼 신이 나서 이것저것 말해주고 있었다. 결국 그는 윤주에게서 필요한 정보-그게 그에게 필요한 것인지 아닌지는 제외하더라도-를 다 얻어간 셈이었다.


화장실에 간다며 그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내가 윤주에게 물었다.


"윤주야 저 오빠 어때?"

"음..좋아!"

"왜?"


왜라니. 내가 생각해도 웃긴 질문이었다. 하지만 정직한 아이는 내 질문에 정직하게 고민하고 답을 했다.


"잘생겼어..!"

"뭐?..“


아이의 얼굴에 아로새겨진 만연한 미소에 나는 어려운 기분이 되고 말았다.


“그런 말은 어디서 배운거야.”

“엄마!”


윤주가 바로 대답했다.

...낭패였다.


이전 19화18화 다섯 살 아이와 놀이동산에 가는 일을 얕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