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뜻한 어른의 미소를 날리며 그렇게 말하고 싶은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걸 행동으로 옮기는 동시에 스스로가 유치한 어른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꼴이었으므로 나는 가만히 있었다. 다만 인자해보이려는 미소만은 유지한 채 네가 의도하는 바가 도대체 뭔지 모르겠다는 뉘앙스만 풍겼다.
되돌아보자면 나만 웃긴 일이었다. 당시에는 그러한 자각이 전혀 없었다.
결국 나와 아이 사이에 난감하게 끼어 있던 그녀가 중재에 나섰다.
"죄송합니다, 해야지?"
당연한 말이지만 아이는 스물여섯 그녀의 아들이 아니었다. 조카도 아니었다. 하물며 옆집 사는 이웃사촌도 아니었다. 생판 남이란다. 길에서 만났고 친해졌다고 했다.
길에서? 유기견도 아니고 길에서 만난 아이와 친해져서 데리고 다닌다고?
내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나는 긍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얼굴에 티나지 않게 무단히 노력했다.
아홉 살이나 열 살 정도로 보이는 아이. '어린이'라고 불러도 무방하겠지. 그 나이 정도면 저런 말을 들었을 때 어떤 생각을 할까. 처음부터 인상 깊었던 부분이었지만 애인데도 인생의 전반적인 흐름에 있는 어떤 중요한 부분을 자각하거나, 파악하고 있는 듯한 선명한 눈동자가 맘에 걸렸다. 대화를 하고, 말이 통하고..그런 것과 달리 아이와 어른사이에는 어떠한 경계가 존재하고 있는지 의문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아이는 입을 살짝 샐쭉이더니 마지못해 말했다.
"..죄송합니다."
내가 너무 앞서서 생각한 건가? 아이는 아이였다. 나는 미소로 화답했다. 아이가 움찔하더니 자그마한 손으로 수진의 옷을 쥐어 잡고 몸을 반쯤 숨겼다. 그런 반응이면서도 노려보는 시선만은 움츠러들 줄 몰랐다.
"낯가림이 심한 모양이에요."
수진이 변명하듯 덧붙였다.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지만 온전히 그 말을 믿을순 없었다. 옆에 앉아있는 터라 그녀에게는 보이지 않았겠지만 아이는 침착하게 나를 탐색하는 중이었다. 위해요소인가. 혹시 약점이라도 있는가.
낯을 가린다는 말은 사실이었는지 어색해하던 아이는 그 이후 두어 번 더 보고나선 내게 더 이상 주눅 들지 않았다.
수진의 말만 듣는 꼬맹이란 것을 제외하고는 아주 당돌한 녀석이었다. 자신감에 차있고, 어른들을 따라하는 듯한 냉소적인 미소를 지으며, 본인의 편의에 따라서는 지극히 아이다운. 하지만 아이라는 입장상 그 위치가 아주 유리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귀여웠고, 천진난만했다. 때로는 얄미운 행동머리조차도 어른들 사이에 끼겠다고 바둥거리는 걸로 느껴져 실소를 자아냈다.
게다가 그녀를 바라보는 아이의 눈을 나는 꽤 오랫동안 잊지 못했다. 잘 닦인 유리알처럼 빛나는 맑고 순수한 눈동자가 그녀에게 머무를 때면 아이는 온몸으로 웃었다. 물론 실제로 웃는 건 아니었다. 아이는 표정의 변화가 크지 않은 편이었다. 하지만 미소 짓고 있었고, 그것만이 전부였다.
그래서 그녀가, "둘이 잘 맞는 것 같아요." 라고 말했을 때 나는 "네?" 하며 입을 떡 벌렸다.
"와 표정. 치호가 보면 섭섭하겠다."
하지만 나는 내 의견을 물릴 생각이 없었다. 몇 번 볼 때마다 네가 왜 여기 끼어드느냐는 얼굴로 아이는 나를 마주했다. 그 얼굴을 보며 나는 속으로 끼어드는 건 네 녀석이라 맞대응했던 터였다. 앙숙이라면 모를까 잘 맞는다니?
수진은 그런 나를 보며 웃었다.
"어른이랑 애들 사이에도 상성이라는 게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전. 둘은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 네. 친구요.."
설마 정신연령이 비슷해보인다는 의미는 아니겠지. 저렇게 해맑은 얼굴로 그런 생각을 했더라면 타격이 클 것 같다. 나는 좀 어이없어하며 그 말을 받아쳤다. 그리고 문득 떠오른 생각을 여과없이 내뱉고 말았다.
"최 과장님은요?"
그녀가 나를 쳐다보았다. 선명한 눈동자 아래로 어쩐지 재밌어하는 웃음을 짓는 걸로 보이는 건 내 착각일까.
"과장님은 치호를 몰라요. 아마 앞으로도 그럴 거고."
정확한 이유는 몰랐다. 그때도 몰랐고 그 이후로도 난 알지 못했다. 하지만 수진의 말은 꽤 단호했고, 그래서인지 나를 들뜨게 했다. 무엇이든 최훈에게 의지하려는, 그에게 잘 웃는 수진이 유일하게 나하고만 공유한 정보가 있다는 사실. 그게 건방진 꼬맹이라고 해도. 그 꼬맹이가 나와 좋은 친구가 될 거라는 말도. 아 웃으면 안 되는데.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가는 걸 막기가 생각보다 어려웠다.
아이는 수진을 부를 때 독특한 호칭을 사용했다.
"선생님."
"응?"
"왜 선생님이야?"
몇 안 되는 짧은 만남 중 한 구석에서 내가 물은 적이 있다. 내 말을 무시하면 수진에게 한소리 듣는다는 것을 습득한 아이는 대답해야했지만 영 말하기 싫은 모양이었다.
왜 선생님일까. 하얀 가운의 '의사선생님'정도라면 이해할 수 있을법했지만 그녀는 아이의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선생님은..그냥 선생님이예요."
잠시 고민하던 아이가 대답했다.
어쭈? 듣는 순간 그 너머에 중요한 나머지 말이 숨어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능숙하진 못했지만 감추려는 의도가 명백했고 눈길을 끌었다. 생각한대로 여과 없이 흘러나오는 게 아이의 말이 아닌가. 그가 감추려는 게 무엇이든 사실 내겐 별 상관없었지만 그 태도가 호기심을 일으켰다.
“수진은 학교 선생님이 아니잖아. 너도 알지? 근데 왜 선생님인데?”
잘 못알아들었을까 싶어 다시 한 번 물었다.
“아저씨는 알거 없어요.”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싸가지 없기만 했다.
“흐음. 그러냐.”
거기까지만 하기로 했다.
우습게도 아이는 내가 행여 다시 물으면 어쩌나 전전긍긍한 모습을 숨길 줄 몰랐다. 안쓰러울 정도로 걱정을 하고 있는게 눈에 훤히 보였다. 왜일까. 그래서 더 궁금했지만 더 이상 물을 수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수진을 사이에 두지 않는 이상 우리에겐 눈꼽만큼의 유대감도 없었다.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는 그녀의 말이 무색하게 아이는 내게 아무런 흥미가 없었다. 나도 내게 흥미 없는 아이에게 지속적인 신경과 관심을 써줄 만큼 맘씨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였을까. 수진이라는 연결고리가 사라지면서 나는 아이에 대한 것을 쉽게 지워버렸다. 완전한 타인이었다는 사실도 그런 점에서는 유리했다. 아이도 그녀에 대해 금방 잊어버리지 않았을까. 길에서 만났다며. 가벼운 생각으로 넘겼다. 그때는 나 하나 생각하기에도 벅차고 힘든 시기였다.
다행이 아이는 어렸다. 어리다는 건 앞으로의 삶이 더 많다는 말이고 그건 망각의 속도를 빠르게 만드는 일이었으니. 나는 그 아이가 힘들게 살지 않을거라고 스스로를 속이며 위로했는지도 모른다.
그 날 아이가 숨기고 있던 진짜 대답은 무엇이었을까.
㈜DM그룹에는 3개의 자회사가 있었다.
가성비 와인을 만드는 DM와인, 음향을 담당하는 DM소리, 그 밖에 여러 외주업체와의 스케쥴 및 사업의 자잘한 부분을 관리하는 DM컨설턴트.
스카웃 제안이 온 건 DM컨설턴트였다. 경력직에 대우도 최상이었다. 이해가는 사안은 아니었지만 물어보려면 그들의 제안에 응해야했다.
임원면접에는 원치 않았지만 최훈이 있었다.
DM에서 나를 이용해먹으려 한다,고 치호는 말했지만 여전히 머리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 투성이었다. 이제와서 내가 왜 필요할까.
나는 그날 도명제약에서 버려진 이후, 아무것도 나아진 게 없었다. 심지어 최훈과 수진이 모든 내막을 알고있었을 때조차. 아무 것도 모른채 다들 모르는 일일거라 외치고 있던 멍청이였다.
중절모를 쓰지 않았고 얇은 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아마 노안용. 알이 굵은 안경너머로 나를 바라보는 눈에
오래전 나눈 친밀감이 감돌아서 나는 그게 착각이라고 여겼다.
어째서 최훈은 아직도 도명의 그늘을 벗어나지 않은 걸까. 수진에 대한 일말의 죄책감도, 없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