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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자루 Sep 20. 2024

10. 심플이즈베스트? 베스트이즈심플!

가장 기록다운 것

BACK TO BASIC

SIMPLE IS BEST


이 두 말은 때에 따라 비슷하다. 그리고 나는 '글쓰기'에 이 말을 대입해 보자면 어김없이 한 가지가 떠오른다.


종이 - 식물성 섬유를 원료로 하여 만든 얇은 물건. 주로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인쇄를 하는 데 쓴다.


한 장의 종이에서 모든 이야기는 시작한다. 한 장의 종이로 끝난다.


어릴 적부터 종이냄새를 좋아했다.

책이 가득 모여있는 서점, 도서관에 들어가면 나는 특유의 향이 있다. 나는 그 냄새를 '좋은 향'이라고 인식했다.

책 한 권을 들고 펼치면 팔락거리는 종이의 향연. 빳빳한 종이는 넘길 때마다 촤라락 하는 소리를 냈다. 종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굴곡진 부분이 보였다. 아주 하얀 종이도 그랬다. 그 위에 빼곡히 새겨진 글자들. 그 글자를 읽는 것만으로도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다는 게 좋았다.

책 속 내용에 사로잡히기 이전에 이미 책이라는 물성 자체를 좋아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종이도 좋아했다.

어릴 적부터 무엇이든 끄적였다. 학교 알림장에는 옆 짝꿍이 내게 했던 말, 내가 했던 말, 그리고 그에 따른 당시의 생각과 느낌 같은 게 빼곡히 적혀 있었다.

집에 가면 알림장을 들고서 쫑알거리며 하루에 있던 모든 자잘한 일들을 말했고,

엄마는 미취학아동의 재미없고 쓸데없는 말을 귀담아 들어주었다.

그래서일까. 당시 내가 말했던 모든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데도,

어른이 되어서도 종종 그 장면이 떠오른다.

내가 하는 두서없는 말에 눈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여주던 엄마의 따스한 얼굴.

말하는 내내 행복했던 감정. 잊지 않고 써오길 잘했다는 감각. 내일도 열심히 써서 말해줘야지!라고 다짐하던 뿌듯함.

어쩌면 그것이 내가 겪은 일을 일화로 말하는 최초의 기억일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소설가가 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맨 처음 쓴 소설 역시 종이가 시작이었다.

노트 한쪽을 펼치고 내가 생각한 이야기를 무작정 적어 내렸다.

글씨를 쓸 때 손과 어깨에 힘을 많이 주는 타입이라, 금세 지치는데도 열심히 썼다.

연필로 앞 뒤 가득 채운 종이는 새 종이와 다른 소리가 난다. '팔락'이 아니라 '펄럭'. 흑연과 종이 냄새가 섞여서 어우러진다.

종이가 담고 있는 내용만큼이나 묵직해진다.

그게 두 장 세 장이 될수록 내 마음은 뿌듯해졌다. 속에 있는 이야기로 세상이 완성되어 나가는 기분. 누군가 읽고 '재미있다'라는 말을 들을 때면 온몸이 가벼워져 붕붕 뜨는 것 같았다.


현대인으로 살아가며 종이만 쓸 수 없다. 우리에겐 휴대폰도 있고 컴퓨터도 있다. 취사선택에 따라 태블릿에 '손글씨'를 쓸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종이질감' 필름을 붙여도,

타자로 아무리 글자를 쏟아내도,

종이가 주는 감각은 완전히 대체되지 않는다.

문제집이나 시험지 말고. 오답풀이 말고.

내 생각 내 감정을 종이에 쏟아내는 일.

이게 말이 되든 어떻든 그냥 써보는 일.

이거 써서 뭐 해.. 대신 이미 쓴 종이가 눈앞에 있으면 다르다.

우리는 모두 어릴 적, 낙서를 했다. 손에 쥐어진 것을 가지고 열심히 몰두해 뭔가를 그리고 적었다.

그 감각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손으로 쓰는 일은 오감을 활용한다. 종이의 질감을 느끼고, 냄새를 맡고, 사각거리는 소리를 듣는다. 처음엔 비어있지만 채워진 공간을 내가 본다.


다꾸를 하면서 (에피소드 5 일기편) 느낀 점은 세상엔 무수한 종이가 있다는 것이었다.

종이만 있을까? 쓰는 도구도 무수하다. 필기구와 종이의 조합으로 따지자면 아마 무한대에 가까운 경우의 수가 나오리라.

보들보들한 종이도 있고 거친 종이도 있다. 빙판을 타듯 매끄럽게 써지는 펜도 있고 거친 마찰을 감각하며 글자를 새기듯 적는 펜도 있다. ('펜'은 '연필'로도 대체 가능)

살면서 모든 종이에 글을 써볼 순 없겠지. 그래도 나는 최선을 다해 종이에 뭔가를 남기고 싶다.

개발자로 일하니까 더더욱 안다.

0과 1로 이루어진 데이터는 전기신호와 서버로 생명력을 얻는다. 모든 건 인과관계에 따라 연결되어 있다. 연결 중 뭐 하나가 사라져도 휘청거린다. 그러다 어느 날 세상에서 그중 무엇 하나가 완전히 사라진다면? 내가 만든 데이터도 흔적 없이 사라진다. (혹은 사라지지 않아도 접근 불가해진다)

눈에 보이지만 실체로, 물성으로 존재한다도 말하기 어렵다는 의미다.

복붙이나 동기화는 안 되겠지. 실시간 수정과 틀을 바꾸는 것도 불가능. 메일로 보내줄 수도 없다 (여기서 스캔한다는 이성적 얘기는 잠시 모른 척하는 걸로^^)

하지만 손에 만져진다. 내가 꼭 쥐고 있는 한, 사라지지 않는다.

정말 단순하지만 명확한 사실이기도 하다.

백업 같은 걸 할 수 없지만 종이에 안정감을 느끼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우리는

너무 좋았던 드라마의 대본집을 사고

웹툰의 단행본을 기다리고

이북을 종이책으로 한 번 더 구입하고

소장본이라는 이름으로 내 눈앞에, 내 책장에 넣어놓는 것 아닐까?


종이에는 그런 힘이 있다.

언제까지나 그 힘을 믿는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종이에 뭔가를 써본다.

무엇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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