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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자루 Sep 21. 2024

11. 도도도독 타닥타닥 안녕하세요

소프트웨어로 보내는 하드웨어의 신호

일상이 매일매일 스펙타클한 사람들이 많을까?


일상(한자) - 날마다 반복되는 생활.


아마 그건 일상


매일 출근하고 퇴근하며 글을 쓰는 나는, 환경도 보는 것도 비슷하다.

가끔 여행을 가지만 여행은 일상이 아니다. 밥 먹듯 여행할 순 없다.


나는 일상을 좋아하는 편이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루틴처럼 살고 싶다. 너무 큰 이벤트가 있다면 그것도 준비한 채 맞이하고 싶다.

마음과 달리 인생은 생각대로 흘러가진 않지만ㅎㅎ


퇴근 후 작업을 하는 공간은 내 서재.

방이 아니라 서재라고 부르고 싶다. 어렸을 적부터 꼭 서재가 가지고 싶었다.

창밖의 계절감을 제외하면 서재의 풍경도 똑같다.


써 내려가는 이야기는 즐거울 때도, 답답할 때도 있다. 기쁠 때도, 서글플 때도 있다.

글을 쓰다 보면 정말 많은 감정이 나를 찾아온다.

그럼에도 그건 일상이다.

그래서 나는 나를 둘러싼 환경 대신, 도구를 조금씩 바꿔본다.

대표적인 게 키보드다.

내 책상과 의자와 컴퓨터를 바꾸기는 어렵지만 글을 입력하는 매개체인 키보드는, 비교적 바꾸기가 쉽다.

종이 위에 펜이 있다면 모니터 앞에는 키보드가 있다.

시간이 되면 나는 오늘의 키보드를 고른다. 오늘은 어떤 키보드에 손이 닿고 싶은지 잠시 고민한다.

선택지가 있다는 건 이래서 즐겁다.

하나를 골랐다면 자리에 앉고 적기 시작한다.

내가 생각하는 글자를 하나하나 눌러가며 입력한다. 그게 시작이다. 일상이고, 행복이다.



사람들은 만지고 문지르고 누르는 것을 좋아한다. 어린아이는 호기심이 일면 무엇이든 만져본다. 영상통화로 매일 얼굴만 본다고 해서 마음이 충족되는 건 아니다. 손 뻗으면 닿을 곳에 있는 것. 끌어안고 그 체온을, 피부를 느끼고 싶어 한다.

허공에 스크린을 띄우고 줌 업을 한다. 스크롤을 하며 정보를 본다. 솔직히 SF영화에 한 번쯤은 나왔을 장면이다. 나는 이런 장면이 실제로 구현되었을 때 사람들이 좋아할까 매번 의문이 든다. 영화를 보는 나는 신기하고 멋지다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로는 허공에 손을 폈다 접는 감각에 대해 생각한다. 실제로 해보기도 한다. 어쩐지 채워지지 않는 허무가 있다.

공기를 잡는 기분? 무게감도 질감도 없는데 눈앞에 있다고 해서 우리는 만족할까?

겪어보지 않 모를 일이다. 하지만 질감이 느껴지는 것과 아닌 것. 누를 수 있는 것과 아닌 것. 두 가지 중 하나를 고르라면 나는 언제나 전자를 고르겠다.


키보드의 세계에 입문하게 된 계기는 단순했다.

무엇이든 새로운 분야에 대해서는, 그것이 있는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나 역시 그랬다.

입사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팀별로 하나의 PC에만 설치가능한 프로그램이 있었고 그 프로그램은 내 사수의 PC에 설치되어 있었다. 나는 그 툴을 이용해 일을 해야 했다.

내게 있어 키보드란 그냥 컴퓨터에 글을 입력하기 위한 수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시절이었다. 그냥 당연하게 회사에서 제공되는 컴퓨터에 키보드, 마우스를 쓰고 있었다. 바꾸려는 생각? 전혀 안 했다.

사수의 자리에 앉았을 때 낯선 핑크색 키보드를 처음 마주했다. 마우스도 무선이었다.

같은 사무실 안에 있어도 남의 자리는 낯설구나.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해야 할 일을 빠르게 처리하고 자리를 비켜줘야 했으므로, 나는 서둘러 남의 마우스를 움직여 프로그램을 켰다. 남의 키보드에 손을 올리고 글자를 입력했다.


'헐, 이거 뭐야?!'


그때 적은 단어가 무엇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코드'라던가 '구분'같은 단어였을 것이다. 아무런 낭만도 없는 단어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 단어를 컴퓨터에 새겨 넣는 키보드의 느낌은, 내가 살아오며 느끼지 못했던 감각이었다.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하게 눌렸다. 오도도독 하는 소리가 났다. 손가락이 재밌었다. 컴퓨터로 글을 쓸 때 이런 느낌을 받을 수 있구나. 타이핑 하나를 하는데에 다른 감각이 끼어들 수 있다니. 이렇게 손과 귀가 즐거울 수도 있는 거라니.

한마디로 문화충격이었다.


경험하고 나니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둔탁한 색의 기본 키보드와 마우스. 그전까지는 아무렇지 않게 쓰던 것이었는데, 다시 내 자리에 와서 글을 쓰니 하나도 재미가 없었다. 방금 전의 감각만 자꾸 생각나서 비교가 되었다.

그때는 사비를 들여 산 키보드와 회사에서 기본 제공되는 키보드의 차이를 알지 못했다.

기계식 키보드와의 첫 만남이었다.  


*

뭔가에 빠지는 건 순식간이다. 관심을 가지고 나면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살면서 나는 몇 번이나 이런 세상을 맞이할까.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들수록 그런 건 줄어드는 것 같다.

아쉬운 만큼 빠져들 때는 무섭게 빠져들기로 마음먹었다.

어쨌든 나는 키보드의 세계에 입문했다. 내가 쳐 본 키보드는 보통 쓰는 멤브레인 키보드가 아니라 기계식 키보드라는 것. 기계식 키보드에는 하우징과 축이라는 개념이 있다는 것. 축에는 대표적으로 청축, 적축, 갈축이 있다는 것. 특허권이 풀린 이후로는 자체제작 축이 우후죽순 쏟아지고 있다는 것.

어렵고도 생소한 개념들이 난무하는, 그냥 공장에서 나오는 기성품이 아니라 조립하고 만드는 기계식 키보드의 생태계를 알게 되었다.

모르면 몰랐지 알고 나니 욕심은 커졌다.

처음에는 가성비 좋다는, 저렴한 키보드를 샀다. 몇 년이 지나자 좀 더 좋은 게 가지고 싶어졌다.

신중의 신중을 기했지만 키보드는 뭐가 더 좋고 나쁘다는 경계는 없었다. 그저 취향차이. 그리고 매력차이였다.

나 또한 취향은 있었지만 여러 개의 키보드를 거쳐가며 각기 다른 매력을 발견해 나갔다.

세상은 넓고 키보드는 무궁무진했다.


*

가끔은 내가 어떤 부분에 있어 이런 '덕후력'이 높은 게 자랑스럽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다.

무엇이든 적당히 흥미가 있고, 적당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사회생활을 할수록 그런 능력이 높아지기도 한다.

하지만 정말로 내가 좋아하고 흥미가 있는 분야에 대해 이야기 시작하면

흥분해서 앞서갈까 두려운 마음도 든다. 정신 못 차리고 질주하다 보면 '쟤 왜 저래'라는 시선을 받을까 봐 말이다.

그래서 좋아하면 좋아할수록 나의 입은 무거워진다. 조용히 더욱 신중하게 말하고 있다.

글에 대해, 소설에 대해, 책에 대해.

드라마와 영화, 애니에 대해. 다꾸와 일기에 대해. 그리고 키보드에 대해 별 말하지 않는 건 그런 탓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의 모든 검색 기록. 남겨놓은 주책맞은 감상문들. 일기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브런치에 이렇게 조금씩 '나'를 드러내고 있는 시간이 신기하다.

기쁘고 감사한 일이다.


*

다시 키보드로 돌아와서,

나는 다섯 개의 키보드를 가지고 있다.

마음에 비하면 소소한(?) 편이다.

또 뭔가를 두고 처박아 두고, 감당 안될 정도로 많은 물건을 가지고 있으면 그걸로 스트레스를 받는 불편한 성격이라

열심히 고르고 고른 것들이 다섯 개다 ㅎㅎ

정말 좋아하는 사람들에 비하면 작고 소소하지만 만족하고 있다.

때에 따라 돌아가면 글을 쓰고 있다.

주로 소설을 쓴다.

오늘은 무슨 키보드로 글을 쓸지 생각하는 일은 즐겁다. 그렇게 써 내려가는 작업은 여전히 재미가 있다.


도구에는 그런 힘이 있는 것 같다. 펜도, 종이도, 키보드도 그냥 있으면 써도 되지만

기왕이면 관심을 가지고 알아본다면

기분에 따라 생각에 따라 나만의 도구를 고르는 건

무척이나 행복한 일이다.

어떠한 행위를 하는 것에 응원을 불어넣어 주는 느낌이랄까.


어떤 것이든 좋다. 가지고 싶은 게 있다면, 그게 기왕 마니아의 영역에 있는 것이라면,

나 또한 그 세계로 입성해서 '마니아'가 되어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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