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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EMPRE Jan 13. 2021

[비평] 짓눌린 자아들의 민주주의(1)

『민주주의의 불만』과 『나와 타자들』에 대한 비평

 마이클 샌델의 『민주주의의 불만』과 이졸데 카림의 『나와 타자들』을 비교·대조하며 네 차례에 걸쳐 연이은 비평문을 기고하고자 합니다. 자유주의, 민주주의, 정체성 정치, 타자성, 공동체, 진보 등의 주제를 포괄하여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제시할 예정입니다. 첫 번째 기고문에서 개괄적인 분석을 통해 양자가 어떤 차이가 있는지 간단하게 살펴보고, 두 번째 기고문에서 샌델의 자유주의(절차적 공화정) 비판, 세 번째 기고문에서 카림의 자유주의(3세대 개인주의) 분석을 거쳐 마지막 기고문에서 이것이 한국사회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성찰해보고자 합니다. 흥미로운 두 저작을 소개하지만 제 개인적인 역량의 부족으로 불충분한 내용이 있을 수 있습니다. 주의 깊게 읽고 피드백을 해주시면 적극적으로 수용하겠습니다. 




샌델과 카림, 두 가지의 자유주의 비판론 

 자유민주주의는 이름 그대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흔히 자유주의가 ‘개인의 자유 보호’라면, 민주주의는 ‘국민주권의 실현’으로 설명되곤 한다. 그러나 이렇게 이야기하면 잘 와닿지 않는다. 


 자유주의란, 개인이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운지 해명하는 사상으로 생각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자유주의는 사람들을 왕권과 토지, 계급, 종교와 공동체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켜 보다 독립적인 자아를 가진 ‘개인’으로 규명하였다. 이에 따라 모든 관계는 필연적으로 묶인 관계가 아닌 계약에 따른 관계인 것으로 대체되고, 다른 외적 논리는 더이상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자유주의에 따르면 신분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태생적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특별한 권한을 가진 사람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재산은 개인의 자아 그 자체와 필연적으로 결부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노력을 통해 성취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자유주의는 다른 어떤 외적 맥락에서 벗어난 ‘추상적인 개인’을 정치 세계 전면에 내세운다. 그리고 곧 그 개인은 민주주의에 참여하는 ‘주체’가 된다. 우리는 동등한 권리를 가진 개인으로서 정치에 참여한다. 오스트리아의 철학자 이졸데 카림의 설명에 따르면, 민주주의란 ‘보편적 개인’의 생성을 의미한다. “민주주의는 국민이자 유권자인 정치 주체를 생성하고, 법적 주체로서의 법인을 생성한다. 민주주의는 곧 사회의 개인화를 의미한다(『나와 타자들』, 이졸데 카림).” 


 즉,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라는 두 가치를 잇는 매개념적 요소가 바로 개인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다시 카림의 설명으로 돌아가 보면, 민주주의는 모두가 추상적으로 ‘동등’하다는 관념에 기초한다. 그 동등함은 정치적 원자로서 개인의 동등함이다. 


 자유주의가 개인을 어떻게 그려내느냐에 따라 그 개인들이 참여하는 민주주의도 달라질 수 있다. 만일 우리의 민주주의가 어떤 혼란과 동요 속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단순히 민주주의의 문제가 아니라 그 민주주의와 결부된 자유주의에 난관이 생겼을 가능성이 있다. 


 사실 민주주의는 가끔 선거나 시위에 나설 때 느낄 수 있지만, 자유주의는 일상에서 거의 느끼지 못한다. 자유주의의 영향력이 그만큼 희미해서 그런 게 아니라, 자유주의가 너무 폭넓게 우리 삶을 감싸고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방식의 삶은 더 생각하기 어렵다. 그 점에서 자유주의와 개인은 물과 물고기의 관계와 같다. 우리는 자유주의의 존재를 의식하지도 못한 채 그 속에서 자유롭게 헤엄칠 수 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속에서 헤엄치는 감각이 부자연스럽고, 가슴을 짓누르듯 갑갑해지는 순간이 온다. 자유주의가 더는 원래 형태 그대로 존속하지 못하고 이질적인 무언가로 변해버린 상황이다.


 미국의 정치철학자 마이클 샌델과 오스트리아의 철학자 이졸데 카림은 각각 지적인 토양 속에서 이러한 자유주의의 위기를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자유주의의 위기가 동시에 민주주의의 동요를 불러일으키는 과정을 설명하고자 했다. 두 사람은 미국과 유럽이라는 다른 지적 토양에서 시작해서, 민주주의와 대응을 이루는 자유주의에 대해 완전히 상반된 상을 그려낸다. 얼핏 보기에 두 그림은 정반대되는 그림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결론적으로 두 사람이 우려하는 자유주의의 위기는 비슷한 인상으로 수렴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민주주의에 참여하는 개인, 그 주체의 온전한 형상이 사라져간다는 일종의 상실감이다.


 그렇다면 주체의 온전한 형상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자유주의로 인해 사라지게 되는가. 샌델이 그려낸 자유주의의 상은 하나의 삭막한 색으로 화포를 가득 메운 그림이다. 반면 카림이 그려낸 상은 여러 가지 색을 활용하여 얼룩덜룩하게 덧칠한 그림이다.


 두 사람이 제시하는 상을 설명하기 위해 두 가지 다른 현대미술 작품을 활용하고자 한다. 개인적으로 현대미술에 대한 조예가 부족한 탓에 정확한 설명에 한계가 있겠지만, 정반대되는 인상을 이해하기에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그림1] 검은 사각형(Black Squre), 1915년


 샌델이 이야기하는 자유주의는 [그림1]을 연상시킨다. 이 작품은 미술사에서 ‘절대주의’로 이야기되는 카지미르 말레비치(Kazimir Malevici)의 「검은 사각형」이라는 작품이다. 말레비치는 구체적인 현실을 초월하여, 보다 궁극적이고 본질적인 세계를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형태와 색채를 구체적인 대상으로부터 해방하고자 했다. “그림 속의 형태들이 자연과 아무 공통성이 없을 때만 창조자가 될 수 있다.”


 이처럼 샌델이 이해하는 오늘날의 자유주의 역시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의 맥락과 아무 공통점이 없는 모양새다. 샌델은 그것이 사람들이 살아가는 실제 맥락, 공동체의 맥락을 완전히 소거해버린 채 ‘절차적 공화정’만 남긴 자유주의라고 비판한다. 기독교 가치관과 성소수자 이슈는 충돌한다. 흑인 하위문화와 전통적인 인문학 자유학예 역시 충돌한다. 자유주의는 이런 충돌을 원활하게 다루지 못한다. 그리하여 이런 모든 맥락적 요소들을 공적인 영역에서 잘라내고, 최소한의 공정성·절차·원칙만 남겨두게 되는 것이다. 


 샌델에 따르면 현대 미국사회에서 “사람들은 최선의 생활 방식에 대해 서로 다른 의견을 갖고 있으므로, 정부는 좋은 삶에 관한 특정한 시각을 법으로 명시해서는 안 된다. 정부는 자신이 추구할 가치와 목적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자아로서 인간을 존중하는 권리 체계를 제공해야 한다(마이클 샌델, 『민주주의의 불만』).”


 현대 자유주의가 갈수록 개인들의 고유한 선택의 권리를 중시하고, 정체성의 대립을 회피하게 되면서 결과적으로 어떠한 구체적인 가치도 부각하지 못하고, 누구의 정체성도 대표하지 못하며, 어떠한 공동체도 담지하지 못하게 되면서 절차상으로만 중립적인 형태를 유지하는 체계가 되어버린 것이다. 


열기 속의 눈(Eyes in the heat), 1946년


 반면 카림이 이야기하는 자유주의는 [그림2]를 연상시킨다. 이 작품은 미국화가 잭슨 폴록(Jackson Pollock)의 「열기 속의 눈(Eyes in the heat)」이라는 작품으로, 폴록의 ‘추상표현주의’를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다. 이 작품에서 역시 말레비치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뚜렷한 형태가 느껴지지 않는다. 작가의 의도 역시 드러나지 않으며, 애초에 어떠한 의도나 계획도 없이 바닥에 놓인 화포 위에 물감을 흩뿌리는 과정 자체에 몰입하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일회적인 이미지의 발생을 즐기는 작품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형태와 의도로부터 색채의 해방, 다채롭지만 어딘가 얼룩덜룩하고 혼란스러운 이미지. 여기에는 긴 호흡이 담긴 구체적인 메시지에 대해 거부가 담겨 있는 한편 우연성에 대한 열의가 담겨 있기도 하다. 마치 ‘왜 구체적인 형상과 규율이 있어야만 하는가’라고 저항하는 것만 같다. 


 카림은 자유주의의 중핵을 이루는 개인주의가 세 단계를 거쳐 변천을 겪었다고 설명한다. 제1세대 개인주의는 민족에 바탕을 둔 개인주의였다. 그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국민주권에 바탕을 둔 민주주의와 잘 공명했다. 제2세대 개인주의는 더욱 개인성에 침잠하여, 다른 무엇보다 개인의 그 자체 고유한 속성에 관심을 두는 개인주의다. 이러한 개인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개인의 자기진실성이며, 자신을 가장 진실하게 설명해주는 정체성이 중요한 것으로 대두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개인을 둘러싼 세계는 민족과 국가에서 더 폭이 좁은 정체성의 공동체로 좁혀지게 된다.


 마지막으로 제3세대 개인주의에 이르게 되면 이러한 개인의 견고한 정체성마저 균열이 생기고, 개인의 개인성을 이루는 요소들이 파편화된다. 정체성 공동체 역시 뒤섞여 퓨전 문화, 퓨전 공동체가 만연하게 되고 거기에서 정체성과 공동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어떠한 가치도 더는 온존하지 못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개개인들의 자아는 마치 ‘비정규직’과도 같이 여기저기 표류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서 자유주의와 개인주의가 더는 민주주의에 참여하는 의미 있는 ‘형상’을 만들어주지 못하게 된다는 상실감을 낳는다. 세상 모든 게 뒤죽박죽 얼룩덜룩이라면, 그 사회에서 진정한 차이란 오히려 의미가 없을 것이고, 타인과 구분되는 자아 같은 것도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샌델에 따르면 ‘절차적 중립’에 기초한 자유주의가 승리를 구가하게 되면서, 개인들은 자신의 이해력과 통제력에서 벗어난 비개인적 권력 구조가 자신의 삶을 옥죄는 압박감과 무력감을 느끼게 된다. 이런 무력감은 자유주의적 자아상이 실제 사회생활이나 경제생활의 구조와 실질적으로 전혀 다른 현실에서 비롯된다고 샌델은 분석한다. 우리는 자유주의적 자아상에 따라 스스로를 ‘선택의 자유를 지닌 독립적 자아’로 생각하고 행동하지만, 사실 우리는 자신이 선택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더 의존의 네트워크에 얽매여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개인들은 자신이 뿌리박은 삶, 공동체에 여전히 매여 있지만, 절차적 중립의 자유주의는 그런 속박을 자유주의 체계 속에서 의미 있게 녹여내지 못한다. 


 한편 카림에 따르면 3세대 개인주의, 즉 ‘다원화된’ 개인주의는 개인의 분열·우연성·불확실·개방성 등을 의미한다. 이제 이전까지 필연적이고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던 견고한 공동체와 개인의 정체성 속으로 우연성이 들어오게 된다. 이제 정체성은 개인이 필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을 이제 언제나 다른 정체성 사이에서 선택한 정체성으로만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그 정체성 내부에서도 구체적인 부분들을 여러 가지 다른 배경을 가진 정체성 집단에서 가져와 재조립할 수 있다. 이것은 정체성의 해방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정체성의 왜소화로도 이해될 수 있다. 우리는 더 이상 당연한 자기 자신이 아니며, 항상 여러 가지 복잡한 선택지 위에서 의문에 놓여있게 된다. 끊임없이 비정규직 자아가 영혼을 거쳐 가기만 하는 공허함이 거기에 자리할 것이다. 


[그림3] 브로드웨이 부기우기(Broadway Boogie Woogie), 1943년


 내 생각에 우리가 좀 더 편안하게 느끼는 세계상은 [그림3]의 이미지가 아닐까 한다. 이 작품은 피에트 몬드리안(Piet Mondrian)의 「브로드웨이 부기우기」라는 작품이다. 작품 속에서 우리는 적당한 다양성과 적당한 리듬감, 적당한 연결성, 그리고 적당한 항구성과 형태가 섞인 이미지를 볼 수 있다. 아마 저 네모칸들 중에서 자기가 속해있는 공동체가 좀 더 큰 네모칸이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이런 세계상이 과연 좋은 것인지 차차 고민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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