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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EMPRE Jan 13. 2021

[비평] 짓눌린 자아들의 민주주의(2)

마이클 샌델, 『민주주의의 불만』

1) 절차적 공화정

 샌델의 『민주주의의 불만』은 2012년 국내에 출간되어 지금은 절판된 책이다. 하지만 샌델의 공화주의, 더 나아가 미국의 공동체주의-공화주의 철학의 기본 논리와 현실 접근방식에 대한 충실하고 명료한 논의를 담고 있어 여전히 세심하게 읽어볼 가치가 있다. 다만 이 책은 미국의 복잡한 헌정사, 경제사의 전개를 통해 현대적 자유주의가 부상하게 되는 과정을 딱딱한 어조로 서술하고 있어, 이런 전개과정에 흥미가 없다면 다소 따분하게 느껴질 수 있겠다. 


 샌델에 따르면 오늘날 우리 삶의 기준으로 작용하고 있는 자유주의 정치철학은 ‘절차적 공화정에 기반을 둔 중립적 체계’로 설명될 수 있다. 이는 국가 정부가 시민들 개개인이 가진 도덕적·종교적 견해에 대해 개입하지 말고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유형의 정치 이론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어떤 삶이 가장 좋은 삶이고, 그 삶에 필요한 도덕적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해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 그러나 정부는 이 중 특정한 시각을 법으로 명시해서는 안 된다. 정부는 자신이 추구할 가치와 목적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자아로서 인간을 존중하는 권리 체계를 제공해야 한다. 이러한 자유주의는 특정한 좋은 삶, 도덕적 가치관, 목적보다 공정한 절차가 우선이라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절차적 공화정’으로 향하게 된다. 


 오늘날 우리는 이런 자유주의를 매우 익숙한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샌델은 이런 유형의 자유주의가 최근 50년 정도 시기 동안 이루어진 발전의 산물이라고 설명한다. 그 기간 동안 미국 자유주의는 점차 공적 영역에서 개인의 기본적인 권리를 제외한 여타 도덕, 즉 공동체적 관습이나 종교적 의무, 전통적 연대감에 기초한 도덕들을 점차 소거해 나갔다. 기본적으로 이러한 도덕은 특수한 정체성 공동체에게만 의미가 있을 뿐, 공공의 원칙으로 보편화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리 가문 내에서만 통용되는 의례를 국가의 보편적인 법률로 제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2) 자유주의의 인간관 

 현대 미국 자유주의 철학의 개인관은 18세기 철학자 칸트의 인간관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칸트의 인간관은 다른 외적 배경·내적 욕구에서 독립된, 인간의 개별성을 강조한다. 그리하여 욕구나 목적들로부터 독립해 있는 자율적으로 선택하는 자아, 자율적 의지가 부각된다. 현대 정치철학의 자유주의에서 이러한 ‘자율적으로 선택하는 자아’ 관념은 종교·공동체·도덕적 관습·역사적 공동운명·개인의 숙명 등 모든 속박적인 정체성들보다 자율적 의지가 선행하며, 이러한 자유롭고 독립적인 자아가 근본적인 것이다. 자유주의적 자아 관념에 따르면, 우리의 인격성(personhood)에 가장 본질적인 것은 삶에 주어지는 목적이나 숙명이 아니라, 자신의 삶 속에서 원하는 목적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된다. 


 이러한 자아 관념은 현대사회에서 일정 정도 강요된 도덕성, 강요된 정체성에 묶여 있는 사람들에게 해방적인 전망을 제공해주기도 한다. 관습이나 전통, 물려받은 신분, 강제되는 역할로부터 자유로운 자아는 다른 도덕적 끈에 매여 있지 않고 자기 스스로 삶을 결정하는 주권자의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다. 점차 현대 정치철학의 자유주의는 이러한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있으면서, 자율적으로 선택하는 자아’를 정치적 개인의 본질적인 특성으로 내세우게 된다. 개인이 자유주의의 세계에서 존엄한 이유는 바로 이런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자아의 특성 때문이다. 샌델은 이를 ‘자발주의적 자유관’이라고 한다. 개인의 존엄은 자발성과 선택에서 온다.


 대체로 칸트적 자유주의자들은 이러한 보편적 평등과 선택의 자유를 개인의 고유한 ‘권리’로 해석하며, 다른 외적 배경의 도덕이나 내적 욕구 등은 이 개인의 권리를 침해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즉, ‘옳음(right)’이 ‘좋음(good)’에 우선한다. 여타 도덕적 좋음, 예컨대 종교적 교리나 관습적 도덕훈 등은 개인의 기본적 권리를 침해할 수 없다. 현대 자유주의 정치철학은 이런 특정한 도덕이 개인의 기본 권리를 보장하는 공정한 체계와 구분된다고 말하며, 점차 각종 덕성으로부터 중립적인, ‘중립적 체계’를 추구하는 경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후 샌델은 미국의 헌정사와 경제사를 분석함으로써, 미국의 자유주의가 점차 개인권을 우선시하고, 중립성의 이상을 지향하며, 개인을 선택의 자유를 지닌 무속박적 자아로 규정하는 인간관을 선명하게 드러내게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① 개인권의 우선성, ② 중림성의 이상, ③ 무속박적 자아. 이렇게 세 가지가 절차적 공화정의 기본 요소라고 볼 수 있겠다. 


 물론 현실적으로 자유주의자들도 개인의 기본적인 도덕성, 종교적 신앙심을 표백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대신 개인이 사적인 영역이 아닌 공적 영역에 참여하고자 할 경우 그러한 가치와 덕성을 내려놓고, 중립적 체계의 기준에 따라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샌델은 이를 ‘최소주의적 자유주의’라고 부른다. 개인적 독특한 덕성, 전통적 정체성에 바탕을 둔 신념 등을 최소화하고 누구나 공유할 수 있는 것, 즉 개인의 기본적인 권리만을 바탕으로 둔 채 공적 영역에 참여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유주의 세계에서 점차 ‘개인적 정체성’과 ‘정치적 정체성’이 구분된다. 이것은 후에 이졸데 카림이 부르주아(Bourgeois, 시민)와 시투아앵(Citoyen, 국민)으로서 개인의 두 가지 역할을 구분한 것과 비견된다. 


 자유주의적 개인권에 대해 현대 자유주의 정치철학에서 다소 이견이 있다. 한쪽에서는 취약한 입장에 있는 개인의 불이익을 최소화하기 위한 평등주의적 자유주의가 있다. 이것은 복지국가론을 바탕으로 경제적 재분배 정책을 시행하는 입장, 또 정체성 정치를 바탕으로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정체성 그룹의 위상을 재조정하는 입장으로 이해할 수 있다. 반대편에서는 그러한 개입이야 말로 개인권의 침해라고 주장하며, 제한 없는 시장경제를 옹호하고 정체성에 대해서는 불문에 부치는 고전적 자유주의의 입장이 있다. 오늘날 미국 진보와 보수의 싸움은 이 둘의 싸움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샌델은 정치적 진보든, 보수든 중요한 것이 누락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사실상 둘 다 의도한 것이든 의도치 않은 귀결이든 개인의 자발적인 선택이 진정으로 가치 있게 이해될 수 있는 맥락, 즉 공동체의 해체를 독촉하게 되기 때문이다. 개인들은 삶의 터전이 빠진 자유주의 속에서 표류하게 되는 것이다.


3) 무속박적 자아라는 환상과 민주주의의 불만 

 정치적 자유주의가 상정하는 무속박적 자아의 형상은 사실 결함이 있다. 샌델에 따르면 어떠한 것에도 매여 있지 않은 독립적이고 추상적인 자아를 통해서는 우리의 도덕적 경험을 정확하고 의미 있게 이해할 수 없다. 의미심장하게도 후에 살펴볼 카림의 경우 “중립성에는 상징이 없다”라고 설명한 바 있다. 중립성은 어떠한 표징을 갖기 못하고, 어떠한 얼굴도 갖지 못한 것이다. 거기에서 우리는 진지하게 자신과 타자의 삶을 이해할 수 없고, 고유한 덕성 역시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무제한적으로 삶을 선택하지 않으며, 삶이란 언제나 선택할 수 있는 자율성 아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정 부분 의무와 한계에 묶여 있는 것으로 다가온다. 그 속에서 우리는 공동으로 이해하는 덕성 속에서 스스로를 도야하고, 구체적인 상호 존중과 배려를 성숙시킬 수 있다. 우리의 선택과 무관하게 다가오는 공동체적 연대의 의무, 때로는 종교적 의무와 그 밖의 도덕적 유대에 묶여 있다. 이러한 공동체적 의무감과 맥락을 표백한 정치체계는 개인에게 진정한 정치 참여의 가치를 부여할 수 없을 것이다.


 샌델은 내가 속한 공동체와 역사적으로 도덕적 연결고리가 있는 공동체의 구성원들에 대한 의무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여기에는 자율적인 선택에 우선하는 도덕적 유대가 있다. 그것은 충성과 책임과 같은 도덕적 힘의 형태로 드러날 수 있다. 우리 자신을 특정한 인간들, 즉 특정한 가족·도시·국가·민족의 구성원들로, 특정한 역사의 담지자로, 특정한 공화국의 시민으로 이해하는 상호 분리 불가능성이 그러한 도덕적 유대 속에서 가능할 것이다. 


 종교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샌델의 논의가 더 선명하게 이해된다. 자발주의적 자유관에 따르면, 종교는 그저 선택의 자유로 이해된다. 종교인들은 여러 가지 대안적 종교 중에서 자신이 선호하는 종교 체계를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이 된다. 그리고 바로 그런 ‘자발적 선택’이 자유주의 체계 하에서 존엄한 것이기 때문에, 자유주의는 종교를 ‘중립적으로’ 존중하고 관용을 베풀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종교인들이 자신들이 여러 가지 선택지 중 선호도에 따라 하나의 종교를 선택하는가? 그렇지 않다. 종교인들은 자신의 종교와 자기 자신이 거부할 수 없는 강한 운명으로 묶여 있다고 느낀다. 종교란 다른 여러 가지 가능한 대안적 신앙체계 중 특별히 자신이 선호하는 한 가지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절차적 자유주의는 종교의 도덕적 중요성이 아니라 개인의 자율성을 보호할 필요에 근거해 종교의 자유를 옹호한다. 그런 식으로 이해하는 신앙의 자유는 종교에 대한 존중의 가치를 오히려 부식시킨다. 자유주의적 인간관은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종교적 의무에 자신이 운명적으로 매여 있다고 보는 사람들의 종교적 자유를 보장하는 데 역설적으로 소홀하게 된다. 


 이는 종교인들과 자주 충돌하는 성소수자의 인격과 덕성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다. 성적 취향을 단순히 여러 가지 가능한 대안적 라이프스타일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자유주의적 인간관은 한편에서는 성소수자의 자발적 의지에 관용을 베풀지만, 그 구체적 삶의 맥락은 추상화함으로써 개인에 대한 존중의 질을 떨어뜨릴 위험이 있다. 자유주의적 인간관은 ‘좋음’ 그 자체의 가치에 주목하지 못하고, 모든 걸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판단으로 우회하여 접근함으로써 부차적 효과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모든 가치와 덕성, 토착적인 공동체와 신념으로부터 중립을 지키려는 자유주의의 관용 정신은 도리어 개인들의 인격을 이루는 중요한 부분들을 괄호 침으로써 편협하고 불관용적인 교훈들로 향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것은 도덕적 진공 상태를 만들어내고, 민주주의적 생활의 도덕적 에너지를 담아낼 수 없게 된다. 


4) 평등주의적 자유주의와 복지국가의 한계 

 샌델은 자발주의적 자아상이 개인들에게 표현의 자유, 종교의 자유, 프라이버시권을 확대하고 소수 정체성에 대한 존엄을 이끌어 내는데 기여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수십 년간 개인들의 무력감이 증가하고 있다고 말한다. 개인의 권리들과 수혜권이 확대되었지만, 현대인들은 자신들의 삶을 지배하는 힘에 대한 통제력이 증가하기보다는 오히려 감소하고 있다는 사실에 좌절감을 느끼고 있다. 자유주의적 자아상의 영향력은 어느 때 보다 심화되고 있지만, 오히려 개개인들의 이해력과 통제력을 벗어난 비개인적인 권력구조가 개인들을 움켜쥐고 있다는 불안감이 그러한 자아를 잠식하게 된다. 샌델은 무엇보다 자발주의적 자유관이 승리하면서, 고전적인 시민적 자치의 역량이 약화되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샌델에 따르면 자유무역과 세계화를 추구하는 우파적 자유주의 뿐 아니라, 진보적 자유주의 역시 이러한 난관을 해결해줄 수 없었다. 진보적 자유주의 내에서도 미세한 균열이 존재하는데, 우리는 진보적 자유주의를 크게 복지국가론과 정체성 정치로 대별할 수 있을 것이다. 『민주주의의 불만』에서는 복지국가론이 갖는 난점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것이 경제적으로 취약한 계층에게 복지 혜택을 제공함으로써 경제적 추락을 방지해줄 수 있었지만, 그 이상의 보다 중대한 박탈감을 해소해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취약계층은 주변화 되어 있으며, 그들의 삶이 담겨 있는 공동체는 언제든 해체되고, 그 안에서 유지되는 전통적 덕성이 망실될 위기에 처해 있다. 샌델에 따르면 현대의 생활환경은 세계 안에서 사람들의 위치를 규정하고 정체성과 소속을 부여하는 원천인 공동체 형태, 즉 가족, 이웃, 도시, 타운, 시민적·인종적·종교적 공동체들을 침식하고 있었다. 이 두 가지 두려움, 다시 말해 자치의 상실과 공동체의 침식에 대한 두려움이 이 시대의 불안의 본질이었다. 정부와 공공기관에서 추진되는 복지제도는 공동체적 덕성의 보완물이 되지 못한다. 


 게다가 자발주의적 자유주의 철학은 복지수혜를 받는 취약계층에 대한 진지한 연대감을 제공하지 못한다. 사회가 점차 연대감 없는 개인들의 집합으로 파편화되면서, 세금을 내는 사람들이 복지 수혜를 받는 사람들과 같은 공동체로 결속되어 있다는 연대감을 느낄 필요가 없어지고, 책임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수혜를 받는 취약계층 역시 굴욕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점차 진보적 자유주의 내에서도 경제적 복지정책보다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쉽고 결과도 도출하기 쉬운 정체성 정치 쪽으로 관심의 균형점이 이동하게 되면서, 경제적 취약계층의 고립감과 소외감은 더욱 가속화 되었다. 샌델의 최근 저작인 『공정하다는 착각(2020)』에서는 이 점을 더욱 분명하게 이야기한다. 전통적 덕성을 포함하여 정치체계가 다른 가치들을 상실하게 되면서, 능력주의가 득세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샌델은 여성과 소수인종, 성소수자, 소수 종교 신자를 동등한 권리를 가진 개인으로 부각하게 되면서 정치적·경제적 주도층의 다양성이 증가했지만, 정치적 가치는 오히려 능력주의 하나로 일원화 된 상황을 우려한다.  


 샌델은 자발주의적 자유관에 대한 대안으로 시민적 덕성을 고양하는 ‘자치’에 주목한다. 자치란 자기의 운명을 통제하는 정치공동체들을 필요로 하며, 공동선을 위해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을 만큼 정치공동체들과 일체감을 갖는 시민들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런 의미의 자치가 지금과 같은 세계화되고 거대화된 경제체제에서 가능한지는 결코 대답할 수 없는 문제이다. 오늘날과 같은 전 지구적 상호 의존의 세계에서는 가장 강력한 민족 국가들조차도 더 이상 자기 운명의 주인이 아니다. 그리고 미국처럼 다원화된 사회에서는 개인들이 공동선에 지배될 만큼 전체의 이익과 일체감을 갖고 있는지가 결코 분명하지 않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작은 규모의 공동체를 포기하고, 세계시민으로서의 세계체제에 대한 덕성을 키워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샌델은 인격적인 면모도 없이 특정한 공동체와 특정한 덕성에 몰입하지도 않으면서 보편적인 친화성(인류애)만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만 있는 세계에 대해 부정적이다. 인류애는 고귀한 감정이지만, 우리는 그래도 평생의 대부분을 인류애보다 작은 연대 속에서 지낸다. 도덕적 공감의 범위에는 한계가 있다. 우리는 사실 추상화되고 중립화된, 일반적인 표현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필연적으로 매여 있는 공동체의 특수한 표현들을 통해서 인류를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그리하여 샌델은 보다 작은 공동체에서부터 시민적 덕성을 기르고, 공동체에 참여함으로써 개인들이 스스로 구체적인 맥락 속에서 자치의 역량을 길러나가야 한다고 제안한다. 아마 그 사회에서는 전통적 종교나 민족 공동체의 관습적 ‘좋음’, 덕성 역시 고유한 자리를 가질 것이다. 그러나 과연 샌델의 제안이 뜻대로 잘 이루어질 수 있을까. 이졸데 카림은 전반적으로 샌델과 문제의식을 공유하지만, 해결방안에 대해서는 보다 비관적인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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