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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EMPRE Jan 13. 2021

[비평] 짓눌린 자아들의 민주주의(3)

이졸데 카림, 『나와 타자들』

1) 동질사회와 민주주의 

 이졸데 카림은 자유주의의 중핵을 이루는 개인주의가 역사적으로 세 단계에 걸쳐 분화되었다는 독특한 접근법을 활용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민주주의가 어떻게 구체적인 형상을 잃고 동요하게 되는지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다. 


 카림은 19세기 유럽에서 민주화와 민족 형성이 동시에 진행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무엇보다 민주화는 ‘개인’의 탄생과 결부되어 있다. 1800년대에 일어난 개인화는 개인들을 기존의 관계망에서 빠져나오도록 했다. 카림은 이것을 1세대 개인주의의 형성이라고 부르며, 이러한 개인주의가 계급 사회의 속박에서 개인을 해방시켰다고 설명한다. 개인주의는 모든 개인을 다양한 차이와 신분, 계급, 종교 같은 모든 특수성을 넘어서서, 그저 동등한 국민이자 유권자로서, 또 법적 주체로서 개인이 되도록 만든다. 그리하여 개인은 동등한 존재로 공적 공간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러나 이러한 개인은 그 자체로서는 민주주의의 주체 자리에 오르기에 무리가 있다. 카림은 민주주의의 주체가 되기 위해선 하나의 ‘형상’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것이 바로 민족이다. 자신이 속한 민족의 다른 모든 구성원을 알고 있다는 환상이 가능했던 건 민족이 물질적 동질화이기 때문이다. 즉 언어, 시간, 공간을 동질화했기 때문이다. 민족이 잘 기능한 두 번째 이유는 민족이 공간과 상징을 감정적으로 차지하는 정서적 동질화였기 때문이다.


 카림에 의하면 이러한 동질사회는 언제나 어느 정도는 허구다. 사실상 어떤 민족도 진정으로 동질적인 사회를 이룬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민족은 잘 기능하는 허구였다. 동질사회는 언제나 허구였지만, 잘 기능하는 허구로서 민족적 일체감을 부여하는 데 이바지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민주적 정치의 과정과 민족적 다수의 문화가 결합한다. 


 이처럼 민족이라는 형상과 민주주의의 결합을 통해 서구의 민주화된 민족 국가에 살고 있는 개인들의 이중의 정체성을 부여받게 된다. 이제 개인은 부르주아(Bourgeois), 즉 시민이자 시투아앵(Citoyen), 즉 국민이다. 개별 시민으로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서로 구별되는 특징이 있는 개인이다. 다른 생애와 직분, 취향, 가치관을 갖고 있다. 반면 시투아앵으로서 우리는 다른 구체적인 개인적 특성이 추상화되어 동등한 입장에서 민주주의에 참여하는 공민이 된다. 특수한 차이들을 무시할 때에만 각각의 개인은 전체의 등등한 부분이자 주권을 구성하는 동등한 일부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샌델이 이야기하는 자발주의적 자유관에 기초한 개인적 정체성과 정치적 정체성의 구분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아직 샌델의 구분과 완전히 동일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샌델의 정치적 정체성은 모든 공동체적 덕목과 관습을 소거하고, 오로지 개인의 권리라는 원칙만 남겨두는 것이었지만, 민족은 오히려 그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공동체로서 그 안에는 민족 고유의 상징과 덕성, 관습과 역사가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민족의식에 기초한 민주주의는 공동체에 참여한다는 효능감을 더욱 단단하게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민족은 민주주의 주체의 형상이 되면서, 또한 공인으로서 개인들에게 현실적인 정체성의 표지가 되는 형상, 즉 ‘민족 유형’을 제공한다. 예컨대 우리 민족이 어떠한 특성을 갖고 있고, 어떤 믿음을 갖고 있는지, 또 저들 민족은 어떠한 성향을 갖고 있는지 등 유형이 민족 유형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민족 유형을 바탕으로 소속감을 느끼고, 타자와 경계짓기를 연습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경계짓기를 바탕으로 우리는 민족 형상이 더욱 단단하고 일체화된 형상인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민족 안에서 개인들의 출신, 성향 등과 같은 사회적 차이들은 보다 강력한 민족 동질성 앞에서 부차적인 것이 된다. 동질사회는 우리에게 민족 유형이라는 특별한 공적 정체성을 제공한다. 그리고 이것은 ‘온전한 자아’라는 환상을 가져다 준다. 특정 민족 유형의 꼴을 갖추면 나는 그 속에 속한다는 환상이 바로 이러한 완전하고 온전한 정체성이다. 그러나 동질사회란 차이가 존재하지 않아서 동질사회인 것이 아니다. 개인들의 사적인 차이가 두드러지지 않고, 개인들이 사회에 완전하고 온전히 소속되어 환상에 몰두할 수 있기 때문에 동질사회인 것이다.


 그러나 카림에 따르면,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동질성의 세계에 살지 않는다. 동질사회는 지난 20~30년 동안 천천히 사라졌다. 민족과 민주화, 두 과정은 동시에 등장했지만, 정체성 정치의 관점에서 보면 완전히 다른 과정이다. 즉 민주주의가 득세하면 점차 민족의 형상은 균열이 일어나 언젠가 허물어지게 된다. 그리고 동질사회의 환경이 천천히 해체되면, 우리는 모두 더는 온전한 정체성을 갖지 못한다. 우리는 이제 온전하고 당연하며 분명한 정체성을 갖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누구의 형상도 구현하지 못하는 민주주의의 동요를 낳는다.


2) 다원원화 된 사회 

 오늘날 우리는 다원화된 사회에 진입하였다. 다원화된 사회에서 우리는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개인들의 동질화를 이야기하지 않고, 통합을 이야기한다. 통합이란 단순히 여러 문화와 종교를 한데 모아 수집해서 생기는 사회의 다양성이 아니다. 이미 존재하는 고유한 토착 문화가 있는데, 거기에 단지 새로운 무언가가 더해지는 것이 아니다. 카림에 따르면 다원화는 더하기가 아니라, 토착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에겐 오히려 정체성의 감소를 뜻한다. 


 다원화는 단순히 외부에서 새로 추가되는 정체성에게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며, 기존 문화에 대한 더하기가 아니다. 더하기는 합해진 사람을 변화시키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사실 다원화는 이미 그곳에 있던 사람들을 포함하여 우리 모두를 변화시킨다. 변화가 더하기라는 외면에 은폐되어있는 것이다.


 동질사회에서 지배적인 유형, 즉 하나의 보편적인 민족의 유형은 문화와 정체성 정치에서도 주도권을 갖고 있었으며,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없는 유일한 유형이었다. 이 유형은 정상성을 규정지었다. 카림은 오스트리아 빈 시가지에 걸린 현수막을 사례로 제시한다. 거기에는 다원성을 홍보하기 위해 네 명의 사람이 서로 나란히 뒤돌아 서 있는 이미지가 묘사되어 있었다. 각각 유대교 전통모자를 쓴 나자, 흑인 남자, 히잡을 쓴 여자, 그리고 오스트리아 전통모자를 쓴 남자였다. 오늘날 이 전통모자를 쓴 남자는 단순히 홀로 서 있던 것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배치된 것으로만 이해될 수는 없다. 그는 자신의 패권을 잃어버렸다. 더 이상 유일한 존재형식이 아니게 된다는 사실은, 즉 정체성의 감소를 의미한다.


 당연함이 축소되고, 자기 자신의 세계관이 상대화되어 확신이 감소하게 되는 경험은, 무력감을 경험하는 것이 된다. 소속 관계는 오늘날 더 이상 개인의 삶에 본래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사회에 속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노력해야 한다.’ 그 소속을 주장해야 한다. 카림은 다양성이 기분 좋은 공존이 아니라고 솔직하게 이야기한다. 


 서구사회에서 1960년대는 커다란 전환점이었다. 카림은 이 시기에 2세대 개인주의가 대두하게 되었다고 분석한다. 옛 1세대 옛 개인주의에서는 정당이나 교회, 학교와 같은 거대한 단체들이 개인 삶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 거대 단체들은 개인들에게 이미 정해진 삶의 방향과 방식을 제시하였고, 다양한 실천을 통해 개인들의 삶에 성공적으로 깊숙이 침투하였다. 그것은 강하고 분명한 정체성을 보장해 주었다. 그러나 2세대에 이르러 개인주의는 기존 삶의 양식과 표현을 거부, 자기만의 새로운 길을 택했다.


 2세대 개인주의는 본질적으로 자기 자신의 진실성을 중시하며, 자기표현적이다. 그것은 거대 체제를 침식하고, 정치적, 종교적, 계급 규정적 생활 세계를 허물어뜨리게 된다. 2세대 개인주의에서 정치 주체가 되는 개인들은 더 이상 자신의 삶 전체를 특정 공동체와 관련지어 관계하지 않는다. 그저 제한된 시기 동안만 결합할 뿐이다. 이는 샌델이 말하는 공동체의 상실과 비슷한 흐름이라 할 수 있겠다. 


 점차 기왕의 거대 체제가 보장해주지 못했던 개인의 고유한 자아감을 전면에 부각하게 되면서, 민주주의 체제 내의 생활 양식의 다원화된다. 이것은 곧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정체성 정치, 즉 여성운동, 동성애 운동, 기타 소수자 운동과 강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를 통해 정치 세계에는 일인칭 정치, 성별, 인종, 종교, 민족과 같은 정체성 요구를 다루는 정치가 대두하게 된다. 


 2세대 개인주의는 변화가 아닌 확인 받기를 고유한 기대로 삼게 된다. 즉, 1세대처럼 거대 체제에 포섭되어 고유한 특성을 잃어버린 추상적 개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있는 그대로 모습이 변하지 않고 확인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리하여 2세대 개인주의에서는 동등이 아닌 차이, 불일치가 중요한 가치로 부상한다.


 카림에 따르면 이러한 정체성 정치는 공인과 사인, 시민과 국민 사이의 차이를 걷어내려는 시도이다. 이제 개인적 특징이나 특수함이 아무 매개 없이 직접 사회화된다. 이 단계의 불안정적인 모습은 샌델의 자유주의 분석에서 ‘중립적 체계’가 자리 잡기 이전의 혼란을 연상한다. 그리고 샌델이 이야기한 ‘중립적 체계’와 같이, 나중에 부상할 3세대 개인주의에서는 이런 혼란과 갈등을 회피하기 위한 ‘중립성’이 함께 부상하게 된다.


 카림이 이야기하는 3세대 개인주의는 2세대와도 전혀 다른 유형이다. 3세대 개인주의의 도래를 통해 완전히 다원화된 사회가 형성된다. 2세대 개인주의는 무엇을 정상으로 여길지를 정하는 일, 즉 정체성에 토대를 둔 정치 운동이 중요한 문제였다. 반면 3세대 개인주의의 다원화는 정치 운동이 아닌 목적 없는 변화가 낳은 효과일 뿐이다. 


 2세대 개인주의에서는 개별 정체성들을 이루는 배경적 요인들의 필연적인 일체감이 여전히 중요한 요인이었다. 예컨대 이슬람 신자에겐 이슬람의 교리, 복장 양식, 의례, 기도 등 모든 것이 한데 아울러 이슬람 신자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3세대에 이르게 되면, 그러한 정체성마저 균열이 일어나고, 다른 정체성의 배경적 요인들과 뒤섞이게 된다. 예컨대 복장 양식이 서구 전통과 뒤섞이거나, 의례가 대중음악과 결합 되는 등의 퓨전 사례를 생각할 수 있겠다. 


 오늘날 생물학적 성별에 기초한 페미니즘은 개인에게 강력하게 뿌리박힌 온전한 정체성을 주장한다는 측면에서 대표적인 2세대 개인주의의 한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반면 이들에게 불안을 안겨주고, 때로 극심한 갈등을 안겨주기도 하는 트랜스젠더의 정체성은 3세대 개인주의에 기반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2세대 개인주의의 입장에서 트랜스젠더는 갖가지 다른 정체성의 요소들을 결합한 이질적인 존재로 다가온다. 이제 다원화 사회에서 이러한 이질적인 형상이 정치세계의 모든 영역을 가득 메운다. 거기에는 어떠한 구체적인 형상도 없다.


 카림은 오늘날의 민주주의는 민족의 형상이 없는 민주주의라고 말한다. 3세대 개인주의에서 자아는 빠진 존재, 감소되고 작아진 존재이다. 이제 개인들은 자신의 정체성이 축소되었고, 원래 자신이 갖고 있다고 믿었던 고유한 정체성이 여러 개 사이에 놓인 하나의 선택지에 불과함을 알게 된다. 모든 정체성이 불안정한 상태가 되었다. 자기 정체성이 제한되고, 자신들의 전통이 부서지고, 자기 정체성이 불안정해졌음을 느끼는 경험은 상실감과 불안감, 그리고 위협과 함께 다가오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주의가 제공할 수 있는 것은 ‘중립성’ 뿐이다.


 샌델이 칸트적 자유주의의 현대화 과정을 통해 중립적 체계가 현대의 정치를 지배하게 되는 과정을 분석하였다면, 카림은 개인들이 차츰 미세한 영역에서 보다 깊이 자기 진실성을 추구하게 되어 결국 여러 정체성들이 난립하게 되고, 그러한 불안정함과 위협으로부터 회피하기 위해 중립적 태도가 부상하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샌델은 시민적 덕성을 배양하는 공동체를 상실하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카림은 모두가 공유하는 공동의 세계관을 상실하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결론적으로 양쪽 모두 공적 영역에서는 공동체와 안정적인 세계관이 짓눌린 상태에서 자기 자신을 완전히 드러낼 수 없는, 중립적이고 추상적인 정체성이 될 수밖에 없다. 이는 매우 역설적인 상황이다. 이 지점에서 카림이 이야기하는 부르주아와 시투아앵의 구분은 샌델이 이야기하는 정치적 정체성과 개인적 정체성의 구분과 대단히 유사해진다. 다원화된 사회의 공공 영역에서 모든 특별한 정체성은 균열·봉쇄·제한이 필요하다. 


3) 나눌 수 있는 갈등과 나눌 수 없는 갈등

 카림의 저작에서 샌델의 평등주의적 자유주의에 기초한 복지국가론과 결부 지어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은 ‘나눌 수 있는 갈등’과 ‘나눌 수 없는 갈등’에 대한 논의이다. 카림은 사회학자 앨버트 허시먼(Albert O. Hirschiman)의 설명을 통해 갈등을 나눌 수 있는 것과 나눌 수 없는 것으로 구분했다. 나눌 수 있는 갈등은 이익에 관한 갈등이다. 예를 들면 경제적 이익이나 분배 문제 같은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이런 갈등에 투입되는 것들은 돈처럼 측정 가능한 단위들이기 때문에 적당한 타협과 교환을 통해 나눌 수 있다.


 반대로 나눌 수 없는 갈등은 이익과 관련된 갈등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갈등이다. 그것은 정체성, 문화, 가치를 둘러싼 갈등이며, 종교적 혹은 세계관적 확신, 예를 들면 다문화주의나 안락사를 둘러싼 갈등을 포괄한다. (비슷한 사례로 샌델은 『민주주의의 불만』에서 낙태권에 관한 법률적 논쟁이 종교 공동체의 덕성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그것은 협상하거나 타협할 수 없는 것이다. 예컨대 종교의 경우, 교리의 일부를 양보하고 같은 세계 내에 다른 종교 체계를 용인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 종교 체계의 모든 것을 포기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접근법에 따르면, 샌델이 이야기하는 복지국가론의 문제를 보다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복지국가론(더 나아가 유럽의 사회민주주의)은 ‘나눌 수 있는 것’에 대한 경제적 수혜 밖에 제공하지 못한다. 사회민주주의는 경제 번영에는 적합하지만, 사회적 시민권에 대한 문제는 다룰 수 없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나눌 수 없는 가치’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이러한 정치는 실용주의 정치 혹은 전문가의 정치가 되었다.


 점차 종교·문화·공동체적 관습이 더 이상 자신의 단단한 정체성을 보장해주지 못한다고 느끼게 되는 사람들은 깊은 혼란과 무력감에 젖어들게 되었다. 카림에 따르면 이것이 이슬람 극단주의와 우파 포퓰리즘 양쪽 모두에 적용된다. 이제 종교적 공동체와 정체성을 되살리려는 강박은 더 이상 종교 고유의 영성적인 측면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대신 어떤 정통의 재구성, 사람들이 잃어버린 것의 재구성이 중요하다. 규칙과 의무를 정확히 따르는 일은 현세의 삶을 이끌어 가는 데 목적이 있지, 초월적 신앙을 향한 것이 아니다. 종교가 하나의 확신에서 하나의 정체성이 될 때, 종교는 더 이상 그 너머가 아닌 자기 정체성을 지향한다.


 카림의 설명을 따르면, 샌델이 대안으로 제시하는 공동체주의적 기획에 난관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즉 개인과 국가 사이에 작은 규모의 시민 공동체들을 배양하고, 그 속에서 개인들이 안정적인 소속감과 완전한 정체감을 바탕으로 덕성을 배양하게 하자는 기획에 난관이 있는 것이다. 종교와 같은 공동체는 같은 세계 내에 다른 종교의 공동체가 병존하는 상황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다. 그것은 자기 신앙체계 전체의 붕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카림은 다원화되고 파편화된 정체성의 세계를 어떠한 실천적인 기획으로도 극복할 수 없다는 비관적인 전망을 드러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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