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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EMPRE Jan 13. 2021

[비평] 완벽한 인간상 탈피하기(2)

탈도덕화된 신자유주의의 미봉책

진보의 본래 목표는 모든 사람이 도덕적으로 완전한 사람이 되도록 하는 ‘교정’이 아니라, 더 나은 사회의 실현에 방점을 두는 것이었다. 즉, 시스템의 개선이었다. 본래 진보는 종교나 애국심과 같은 거대한 도덕체계에 맞서 양심에 대한 자유를 요구했고, 그다음에는 자본주의의 인간소외와 착취에 맞서 인간성의 회복을 요구했다. 그것은 ‘도덕적으로 완벽한’ 양심을 주입하려는 거대권력의 시도와 반대편에 있었다. “권리의 평등화가 아니라 마음을 평등하게 하려는 전체론적 통제는 진보의 종말을 의미한다.”(칼 포퍼, 『역사법칙주의의 빈곤』)


흔히 ‘정체성 정치’라 불리는 진보 일각의 정치적 흐름 역시도 본래 전통적 권위가 강제로 주입하는 역할(role)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움직임이었다. 정체성 정치는 ‘도덕적으로 완벽한’ 역할을 강요함으로써 사회적 소수자들이 본래 자기 자신의 삶을 드러내지 못하고, 자신의 갈망과 욕망을 표출하지 못하도록 하는 부당한 억압과 맞서왔다. 그리하여 좀 더 다양성에 관대하고, 정치적·사회적 차별과 고통으로부터 소수자들을 보호할 수 있는 담론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처음에는 권위적인 도덕으로부터 탈피를 지향했다. 그러나 점차 이런 움직임 일각에서 일종의 고학력 엘리트주의를 바탕으로 대중들을 계몽시켜야 한다는 의식이 자라남에 따라 일반 대중들, 특히나 진보정치의 도움이 필요한 소외된 사람들과 점차 괴리감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정체성 정치가 미세한 영역에서까지 정치적 올바름을 적용하여 사람들을 교정하고, 자신의 삶에 매여 의식을 적극적으로 개선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인내심 있게 기다려주기를 주저하게 되면서 ‘도덕적으로 완벽한’ 인간상을 독촉한 감이 있지 않은지, 고민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진보 진영이 교화 수단으로 주로 활용한 도구는 ‘공감’과 ‘감수성’이었다. 그러나 공감은 역효과를 불러오는 경우가 많았다. “공감은 마일리지 같은 것이어서 누군가에게 쓰면 다른 이들에게는 줄 수 없다. 내집단에 강하게 공감했다면 그만큼 외집단에 공감할 여유가 소멸된다. 심지어 내집단에 대한 공감이 외집단에 대한 처벌로 이어진다는 심리 연구도 있다(장대익, 「공감은 언제 폭력이 되는가」, 2020).” 가슴 아프게도 이런 현상을 진보 진영의 세계를 뒤덮은 모든 정체성 정치의 담론에서 손쉽게 확인할 수 있다.


나는 이것이 단순히 어떤 시스템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청년세대의 과열된 경쟁과 거기서 비롯된 많은 문제가 물론 청년들의 마음을 병들게 하고 있겠지만, 그러한 문제가 해결된다고 전적으로 모든 것이 해결될 순 없을 것이다. 문제라면 차라리 너무 높게 설정된 도덕 수준, 너무 완벽한 인간상이 문제일지 모른다.


반면 진보가 그동안 대립해왔던 자본주의는 탈도덕성의 욕망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새삼스럽게 어떤 도덕심을 요구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우리가 신자유주의라 부르는 그것은 노골적으로 인간 본성을 불신하고 이기심과 탐욕을 긍정하는데, 그에 반대되는 어떠한 도덕관도 결국 인간 본성에 반하는 지나치게 이상적이기만 한 몽상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는 어떠한 도덕관념 앞에서도 사람들은 평등하게 서 있다고 말한다. 우리의 다른 모든 속성을 부차적인 것으로서 불문에 부치게 된다면, 모두가 동등한 입장의 인적 자원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저 인적 자원으로서 경쟁력을 추구하는 한, 종래의 전통적 정체성 역할에 기대어 사람들의 행동을 재단하려는 태도는 부적절한 것으로 여겨지게 된다. 그리하여 신자유주의 세계화 사회의 엘리트들은 인종·성별·종교·출신·외모·장애 등을 갖고 사람을 구분 지으려는 태도를 거부하게 된다. 전통적인 문화와 관습, 그리고 그것을 담고 있는 도덕체계는 힘을 잃는다.


이 점에서 어쩌면, 능력주의에 기초한 신자유주의가 오히려 정체성 정치의 요구를 효율적으로 전파할 수 있을지 모른다. 반면 유감스럽게도 진보가 더욱더 도덕적으로 완벽한 인간성을 요구하게 되고, 그 도덕적 인간성이 언어교정을 내면화하고 문화적 다양성을 찬미하는 세계시민주의자 정도로 국한되기 시작하면서 더 난처한 국면에 처할 위험이 있다.


오늘날 미국 보수세력은 소수자 정체성을 포섭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저 도덕은 내려놓고 개인의 경제적 자유와 다양한 선택의 기회를 누리자고 이야기할 수 있다. 한국의 보수 역시 이것이 정치공학적으로 꽤 유리하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차별 철폐를 주장하는 진보가 오히려 일종의 차별의식을 표출하는 경우가 많은 건 아닌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그동안 충분히 정치적 올바름을 내면화하지 못한 사람들을 낙인찍는 발언을 일삼아 당사자들에게 굴욕감과 수치심을 안기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태도는 사회적 차별과 혐오를 극복하자는 외침을 거꾸로 빛바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차별과 혐오가 이런 진보적 정체성 정치보다도, 오히려 차별 철폐를 위해 굳이 노력하지도 않는 신자유주의자들의 정책에 의해 차차 옅어져 가는 듯 보이게 된다면 어떨까. 그리고 그 이상 사람들이 이 주제에 대해 가치 있게 고민할 필요를 못 느끼게 된다면 어떨까. 그것이야말로 정치적 올바름에 기댄 진보에겐 당혹스러운 노릇이 될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한편으로 문화적 세련됨을 선용하기도 한다. 이를 바탕으로 문화적 세련됨을 향유할 능력을 성취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겐 사회적 멸시가 주어지게 된다. 오늘날 문화적 세련됨이란 곧 다양한 정체성 배경을 가진 유능하고 유쾌한 사람들의 결합 정도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방향성을 정치적 올바름을 지향하는 정체성 정치가 무기력하게 따라가기도 하지만, 때로는 세계화와 경쟁 사회에 뒤처진 사람들을 공격하기 위한 무기로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문화적 세련됨을 위해서는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비용이 필요하다. 이는 결국 소득수준이 낮은 사람들에 대한 문턱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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