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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EMPRE Jan 13. 2021

[비평] 완벽한 인간상 탈피하기(3)

세계시민주의 엘리트 유형을 향한 획일화

1960년대 미국의 민권운동은 공공장소에서 흑인들을 백인들과 구분하는 짐 크로법을 폐지하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또 1969년 스톤월 항쟁은 미국에서 더 경찰들이 성소수자들을 단속하고 겁박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점차 관용의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이것은 의미 있는 역사의 변화를 일구었다.


2019년 고려대학교에서는 학생회에서 한 남학생이 “남자가 여자를 좋아하는 게 일반적 인식”이라는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호모포비아로 몰려 학내외의 전방위적 비난을 받고 결국 사과문을 게재해야만 했다. 같은 해 서강대학교에서는 동기와의 사적인 대화에서 “너 정도면 예뻐”라고 말한 학생이 여성혐오자로 몰려 학생회 차원의 징계를 받고 추방당했다.

이런 것은 의미 있는 역사의 변화를 만들지 못한다.


정치적 올바름에 기초한 진보의 정체성 정치는 이처럼 더욱더 작은 영역에서 더욱더 미세한 작용들을 교정하면서, 사람들의 언어와 습관에 제약을 가하고자 한다. 그리고 교정의 효과를 가시화하기 위해 공격받는 상대방을 더욱더 악의에 가득 찬 패배자로 묘사하는 데 치중하게 된다. 이처럼 자꾸만 꼬투리 잡기와 행실 지적, 언어교정에 덧붙여 말속에 독을 심어 되돌려주는 효과에만 집착하다 상대의 진심을 이해하는 방법을 잊어만 가는 건 아닌지 우려스럽다.


이런 방향은 필연적으로 대단히 폭이 좁은 성격 유형을 사회적으로 강요할 수밖에 없다. 다양성을 지향하는 정체성 정치가 되려 어떤 특정한 단일 성격으로 청년세대를 이끌며 진정한 다양성을 희석하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 나타나는 사회는 피부색과 성별은 다를지언정 성격 유형은 서로 다를 것 없이 비슷한, 새로운 형태의 획일화 사회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 성격이 도덕적으로 흠결이 없고 완벽한 성격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 내심 누구도 도덕적으로 완벽한 인간상을 더는 신뢰하지 않는다. 나는 이렇게 하여 권장되는 인간상을 ‘세계시민주의적 엘리트 유형’의 인간상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는 신자유주의적 환경에 발빠르게 적응하고 유연하게 대처하면서 자신의 문화적 세련됨을 음미하는 유형의 인간이다. 그는 후일 골칫거리를 만들지 않기 위해 항상 철저하게 입단속을 할 정도의 여유가 있다. 그는 그저 덜 친절한 표현을 입속에 가두고 검열하는 약삭빠르고 처세에 능수능란한 유형의 사람이 될 것이다. 그것이 배경이 다른 사람들과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 세계시민주의자의 미덕이다. 어쩌면 너무나 슬프게도, 진보주의자들이 찬미하는 이러한 유형은 이처럼 정확하게 신자유주의적 인간상을 향하는 것일지 모른다.


내가 접해본 그런 정체성 정치를 지향하는 진보주의자들은 예외 없이 모두 상처와 아픔으로 얼룩진 채 자신의 좁은 관심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감정적으로 동요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스스로가 외치는 이상적 인간상, 세계시민주의적이면서 도덕적으로 배려심이 넘치기까지 한 유형의 인간상에 비교하면 자신이 너무나 볼품없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다. 그런 인간상에 근본적으로 도달하지 못하는 자신의 나약한 본성, 차별의식에 젖은 본성에 굴욕감을 느끼며 때로는 죄책감과 우울감에 빠지는 모습을 보기도 한다. 내가 해주고 싶은 충고는 사람이란 누구나 자신의 현실적 삶에 처해 있으므로, 모든 차별과 혐오를 뛰어넘어 완벽한 인간상이 되려는 시도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구체적인 인간으로서 함께 연대하면 좋겠다.


세상에는 말실수가 잦은 사람이 있고, 눈치가 없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견문을 넓힐 기회가 없는 사람들도 있고, 자기 나름의 상처에 젖어 멀리 보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들이 세계시민주의 엘리트보다 도덕적으로 열등한 사람으로 평가받아야 하는 걸까. 새로운 시대의 능력주의는 갈수록 어수룩한 유형의 사람들에게 잔인하고 힘겨워지는 것 같다. 이런 분위기 일변도의 정치는 결국 이러한 엘리트의 성격을 내면화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경제 지위상의 박탈감과 동시에 도덕적 수치심마저 안길 수 있다.


정체성 정치는 우리 삶의 모든 국면을 말해줄 수 없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것이 우리의 모든 것을 재단해줄 수 있다는 환상을 갖는 사람들이 보인다. 우리는 누구나 사회에서, 인간관계에서 상처를 경험한다. 그러나 정체성 정치는 이제 ‘억압받는 피해자 그룹’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의 난관은 끝났다고 이야기한다. 이는 아직 소진되지 않은 이야기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특히나 세계시민주의자 되지 못하고 자신이 처한 토착성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의 아픔에 대한 폭력이 될 수 있다.


슬픔은 구체적이다. 그러나 정체성 정치는 구체적이라기엔 너무나 건조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고, 그 끝에서 신자유주의의 능력중심사회와 손을 맞잡는 것 같다. 이렇게 되면서 전반적인 사회가 슬픔의 구체적 얼굴을 바라보는 방법을 상실해가는 것이다.


이런 방향은 청년세대가 지향해야 할 진보의 길이 아니라고 믿는다. 나는 사람들이 누구나 때로는 실수도 하고, 여러 가지로 얼룩이 져 있음을 인정하는 진보, 그리고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딛고 있는 공동체의 맥락 속에서 살아가며, 그 속에는 언제나 갈등도 원망도 있을 것을 인정하는 진보를 제안하고 싶다. 즉, ‘덜 완벽한 인간상’을 받아들이는 진보를 주장하고 싶다. 세계시민주의 엘리트처럼 기민한 유형이 되지 못하는 사람들의 본래 성격과 감정, 진실성, 그리고 악의 없는 말실수들을 보다 구체적인 맥락 속에서 생각하자. 그리고 그 모든 구체적인 맥락들에 대해 너무 가혹하게 굴지 말자. 어쩌면 이런 이들이야말로 여전히 구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목소리를 가진 사람들이기에, 오히려 구체적인 상처와 슬픔을 안고 살아가는 약자들에게 더 진솔하게 다가가는 법을 알고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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