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직원들

우리는 언제나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었다

by 소윤
나는 오늘 해고당했다.


사무실에서 네 명의 언니들과 같이 일했다. 은희 언니, 민아 언니, 주연 언니는 다들 비슷한 나이의 또래들이었고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을 키웠다. 맏언니 지현 언니에게는 장성한 두 딸이 있었다.

우리는 모두 일하는 시간이 달랐다. 우리는 모두 파트타임으로 고용되었다 나와 은희 언니는 9시부터 1시까지, 민아 언니와 지현 언니는 1시부터 5시까지 일했다. 일이 끝나고 어린이집으로 아이를 데리러가기 좋은 시간이거나, 어린이집에 아이를 데려다주고 출근하기 좋은 시간이었다. 아이를 종일반에 맡긴 주연 언니는 9시 30분부터 5시 30분까지 일할 수 있어서 정직원이 되었다. 나는 1시에 끝나면 도서관에서 책을 읽거나, 집에서 글을 쓰거나 혼자 영화관에 갔다.

언니들의 메신저 프로필 사진은 전부 아이들이었다. 히스토리를 뒤로 넘길수록 더 어린 아이가 나왔다. 마침내 갓 태어난 신생아 사진 뒤에 언니들의 얼굴이 있었다. 지현 언니의 프로필 사진은 언제나 두 딸이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으로 고정되어 바뀌지 않았다.

나는 매일 아침마다 사장에게 커피를 타다 바쳤다. 사장들은 오전 언니들과 나를 한 명씩 따로따로 사장실로 불렀다. 나는 커피를 세 잔씩 타야했고 사장이 입을 열 때마다 곤혹스러웠다. 사장은 은희 언니에게 너는 눈치가 빠르고 싹싹하다고, 여직원은 싹싹한 게 제일이라고 했다. 나에게는 은희나 주연이같은 아줌마들보다는 네가 더 어리고 똑똑해서 좋다고 했다. 그러고는 내 목소리가 좋다며, 사무실에서 전화만 받는 여직원이니까 얼굴은 필요없다고 했다. 주연이는 얼굴만 반반하고 아는 게 없다고 했지만 사장은 주연 언니를 제일 자주 불렀다.

은희 언니는 똑똑하고 일을 정말 잘해서 곧 정직원이 되었다. 9시부터 4시 30분까지, 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데리러 갈 수 있는 시간대라서 정직원 제의를 받아들였다. 언니들과 일하면서 아기가 얼마나 연약한지, 쥐면 부서질 것 같은지 알게 되었다.

그날은 은희 언니의 아기가 아팠다. 은희 언니는 계속 실수를 했다 사장에게 오늘 일찍 들어가보면 안되겠냐고 물었더니 아기를 사무실에 데리고 오면 되지 않느냐는 답변을 들었다. 은희 언니는 점심을 굶고 아이를 데리러 갔다. 아기는 계속 울었고 오후에 온 민아 언니와 지현 언니는 열심히 달랬다. 나도 퇴근하려고 싸놨던 짐을 풀고 토끼모양 파우치를 꺼내 안녕 나는 토끼야 호들갑을 떨어댔다. 지현 언니가 아기의 이마와 손이 너무 뜨겁다고 했다. 사장이, 은희야. 니 애기는 널 참 많이도 괴롭힌다. 라고 말했다. 다음 날 은희 언니는 눈이 부은 채로 나왔다. 아침에 아기를 데려다주고 오는 버스 안에서 울었다고 했다. 사장이 말했다. 너는 애한테 매일 시달리면서 왜 핼쓱해지질 않냐? 나는 그날 세 번 침을 뱉었다.

며칠 후에는 주연 언니가 허겁지겁 뛰어 왔다. 주연 언니에게서 토 냄새가 났다. 아기가 택시 안에서 토를 했다고 했다. 주연 언니의 노란 패딩이 비닐봉지 속에 둘둘 말린 채 쳐박혀 있었다. 사장이 주연 언니의 노란 짐을 보고 ‘너 소풍가냐?’고 물었다. 주연 언니가 사장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나는 담배 냄새를 가리는 섬유탈취제를 주연 언니에게 마구 뿌려줬다.

언제부턴가 나는 출근 전, 업무시간 도중에 절대로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퇴근 후에만 피웠다. 대신에 언니들이 아침마다 사오는 과자를 먹었다. 막내는 언니들이 사다준 것만 먹으라고 했다.

민아 언니의 출퇴근 시간이 아기의 유치원 등하교 시간에 맞춰 12시 30분에서 4시 30분으로 바뀌었다. 나는 퇴근 30분 전 민아 언니와 수다를 떨었다.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는 거네요?’ ‘당연하지, 걔가 내 전부야.’ 민아 언니의 표정에는 한 점 의심도 없었다

사장의 무시와 폭언, 인격 모독을 참지 못한 맏언니 지현 언니가 총대를 맸고 둘째인 민아 언니가 지현 언니를 거들었다 지현 언니와 민아 언니는 다음 날 해고 통보를 받았다. 3월 말까지만 일하게 된 지현 언니와 민아 언니를 위해 우리는 호프집에 모이기로 했다. 주연 언니는 못 나온다고 했다.

퇴근 후 오후 5시 반, 민아 언니는 아기를 낳고 이 시간대에 처음 밖으로 나오는 거라며 조금 울었다. 은희 언니는 너무 신나서 뛰어왔다. 7시가 조금 넘자 민아 언니에게 영상통화가 왔다. 액정 안에서 아기가 울었다. 잠시 후 은희 언니에게도 전화가 왔다. 애 우는 소리가 들렸다. 지현 언니가, 남편들이 일부러 전화를 거는 거라고, 집에 가지 말라고, 남편들도 이런 걸 알아야 한다고 했다. 민아 언니가 다시 글썽였다. 우리는 최대한 오래 있기로 했는데 10시가 되자 일어났다. ‘아직 열시 밖에 안됐는데요?’ 나는 입 밖으로 내뱉고 아차, 했다.

나는 아침에 사장실에 들어갈 때마다 침 뱉은 커피를 들고, 음성 녹음을 켜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들어갔다. 감히 자신에게 대든 민아 언니와 지현 언니는 수준 낮은 여편네들이라고 사장이 욕을 했다. 매일 나한테 외모, 몸매, 옷, 화장 지적(나는 선크림만 바르고 다닌다)을 하는 사장이 그랬다. 나는 그 녹음을 단체 톡방에 올렸다. 설상가상으로 월급이 밀렸고 사무실에 돈이 없어서, 땅 값이 싼 교외의 외진 곳으로 이전하기로 했다. 주변에 아무것도 없고 저수지만 있는 곳, 나도 곧 관둬야겠다고 생각했다.

은희 언니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소윤아, 주연이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마. 걔 우리 말 다 녹음하고 있어.

어째서 주연 언니지, 나는 주연 언니랑 제일 친했는데. 내가 주연 언니에게 선물해 준 탁상용 화이트보드에는 아직도 ‘주연언니~ 소윤이를 잊지마!’ 라고 적혀있다. 소윤이가 녹음하는 걸 주연이가 사장에게 말했다. 주연이 월급이 두 배로 올랐다. 우리 줄 월급을 모두 끌어모아 주연이에게 줬다는 소문이 짙은 안개처럼 몸을 낮추고 떠돌았다. 주연 언니는 전보다 훨씬 더 사장실에 자주 불려갔다. 은희 언니가 하던 전반적인 총괄 업무를 점점 주연 언니가 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주연 언니가 사장실에서 나온 후 내게 말했다. ‘소윤아, 너도 언니들처럼 3월 말까지만 나오래.’ 언니들은 모두 주연 언니를 욕했다. 나도 주연 언니에게 정말 큰 배신감을 느꼈다. 같이 욕을 하면서도 주연 언니가 언젠가 내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남편이랑 이혼하고 아이를 혼자 키우고 싶어.’ 언니들도 주연 언니를 욕하다가 결국엔 그래도 다 같이 애 키우는 엄만데...로 얘기를 마무리했다. 주연 언니는 이전한 사무실, 그 외진 저수지 근처까지 따라가기로 했다. 나는 주연 언니를 말렸다. 더 좋은 직장을 찾아봐요. 여긴 아니에요. 애엄마인 나를 써주는 곳이 어딨겠어. 시간대 맞는 곳도 여기밖에 없어.

은희 언니는 4월까지 남기로 했다 내가 언니들이랑 내 월급, 소윤이 월급은 꼭 정산해주고 나갈거야. 은희 언니는 틈틈이 텔레마케터나 쿠팡맨 아르바이트를 알아보고 있다.

일찍 퇴근해도 신나지가 않았다. 퇴근 후 책을 읽거나 영화를 봐도 마음속에 묵지근한 무언가가 걸렸다. 일부러 다섯시까지 남아서 언니들과 떠들고 가는 날이 더 많았다. 소윤이는 남자 잘 만나야 해, 오늘 반찬 뭐하지? 애기 밥은 뭐 해줄까? 애기 밥 하는게 제일 힘들어. 은희는 유치원 보육 수당 받았어? 주연씨 애는 딸이라서 좋겠다. 나는 알바하는 시간이 쉬는 시간이야. 두런두런 이야기들이 종이 넘기는 소리, 키보드 소리와 함께 속삭임처럼, 잠든 아기 옆에서 아기가 잘 자라길 바라는 엄마의 중얼거림처럼 사무실 안을 떠돌았다.

사장은 우리를 사무실 여직원들이라고 불렀고 다른 사람들은 언니들을 누구누구 엄마라고 불렀지만 우리는 꼭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었다. 은희, 주연이, 민아, 지현 언니. 나는 지현 언니의 두 딸들이 아주 멋있는 여성이 된 것처럼 언니들의 아이들이 모두 잘 자랄 것을 믿는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바라는 것이 있었다. 이제는 못 볼 언니들을 메신저 프로필에서라도 보고싶었다. 언니들의 프로필 사진이 언니들의 아기가 아닌 언니들의 얼굴로 바뀌기를 나는 좀 더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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