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는 사람

이야기가 끝나도 삶은 계속된다

by 소윤

이야기가 끝나면 무엇이 남지?

몇년 간 좀 망한 채로 살았다. 삶보다는 차라리 연명에 가까웠다. 뒤늦게 나 자신을 돌봐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돌볼 나 자신조차 없었다. 내가 뭘 원하는지, 뭘 좋아하는지 몰랐다. 꽤 오랫동안 방 안의 가구처럼 지냈는데 이런 내게도 피부 밑에 혈관이 있고 피가 돈다는게 이상했다. 무엇을 해야 할 지 몰라서, 해야 할 것을 찾아야 해서 늘 그렇듯 노트와 펜을 마련했다. 적어도 그때는 무언가를 쓴다는게 혈관에 피가 도는 일보다는 더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뉴욕 삼부작>의 작가 폴 오스터는 모든 글쓰기는 '촉각의 글쓰기'라고 말한 적이 있다. 원래는 나도 노트북으로 글을 썼지만 요새는 손으로 쓰려고 노력한다. 노트북으로 글을 쓸 때는 문장을 통째로 들어 옮기거나 지울 수 있지만 손으로 쓴 글은 어느 한 문장에 빈틈이 발견되면 모르는 새 조금씩 무너진다. 그래서 머리와 손의 속도를 맞추는 연습을 한다. 좋아하는 펜이 종이 위를 사각사각 미끄러지는 감촉을 느끼고 머리는 손의 움직임과 함께 부드럽게 나아간다. 손으로 글을 쓰는 건, '쓴다'는 행위 외에도 '그리다'나 '빚다'와 비슷한 일처럼 느껴진다.

폴 오스터의 단편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좋아한다.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들도 좋아한다. 예전에 누군가에게 왜 카버처럼 쓰면 안돼요?라고 맹랑하게 물었는데 돌아온 대답이 걸작이었다. '네가 카버처럼 쓸 수 있니?' 그렇지만 나는 소설쓰기가 좋았다. 좋아하니까 더 잘쓰고 싶었다. 내가 가진 몇 안되는 진실한 욕망이었다.

황정은의 단편 <뼈 도둑>의 첫 문장, '그대는 이 기록을 눈 속에서 발견할 것이다.' 모든 이야기는 눈속의 기록이다. 한없이 펼쳐진 시리고 흰 설원 위에서 무언가를 찾아내야 하는 것, 스스로 설원의 눈을 녹여야만 하는 것, 눈이 녹으면 숲과 나무가, 바다가, 기묘한 공터가, 우주가 있을 수도 있다. 아니, 사실 눈속엔 아무것도 없어서, 쓴다는건 내리는 눈을 맞고 쌓인 눈을 헤치면서 눈의 숲을 짓고 눈의 우주를 짓는 일이다. 문장이 눈처럼, 은총처럼 내리고 눈과 같이 재빠르게 녹는다. 누군가는 눈 속에서 춤을 추고, 누군가는 얼어가는 손끝을 잊은 채 눈 위에 쓰고, 누군가는 눈 속에서 누군가의 안부를 묻는다. 내가 가진 '백지'의 이미지.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했다. 쓰는 일은 늘 즐거웠다. 우주가 넓어지는 기분이었으니까. 동시에 무서웠다. 우주는 잔인하고 외로우니까.
쓰는 일을 생각하면 언제나, 광막하고 아득하게 펼쳐진 공간이 떠오른다.

문학을 공부하기 전에도 글을 썼다. 내가 무언가를 쓰고 있지 않다고 생각할 때도 쓰고 있지 않음에 대해 쓰고 있었다. 쓰는 일은 혈관에 피가 도는 일과 같았다. 글을 배운다는 건 내 몸의 맥박을 짚고 피가 어디서 어디로 도는지를 알아가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아주 새로운 몸을 끊임없이 만들어야만 했다. 때론 셀로판지처럼 완전히 투명해져서 몸 속의 핏줄과 장기를 환히 내보이는 몸을 만들어야 했고 때로는 내가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면 안됐다. 그러나 나는 내 몸안의 박동을 듣지 못했고 누군가에게 영혼을 쉽게 들켰다.

쓰는 일은 내게 점점 상처를 입혔다. 내 글은 언제나 심판대 위에 올라가 엄정한 평가를 받아야했고 선생님들은 영혼을 찌르는 말을 했다. 나는 딱 눈에 띄지 않을 만큼만 고통스러워했다. 이것만큼은 들키고 싶지 않았다. 나중에는 글을 쓰면서 '이 부분에선 이런 욕을 먹겠군'하고 심상한 척 위악을 부렸다.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건,

이야기가 끝나면 무엇이 남지?
놀랍게도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는 것이었다. 쓴다는 건 언제나 탐욕스럽게 새로운 이야기만을 원했다. 나는 내 이야기를 내 손으로 폐기해야 했다. 글을 쓰는 동안 나는 내 발 밑을 무너뜨리고 다시 짓는 방식으로 생존했다. K 선생님이 말했다. 너는 지금 이런 이야기를 쓰고 있지만 이 이야기가 끝나고 쓸 다른 이야기가 뭔지 지금부터 알고 있어야해. 나는 지도를 갖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지도를 그리는 사람이었다. 아무리 계속 써도 축적되지 않는다는 것, 숙련되지 않는다는 것, 몸에 익지 않는 것, 몸에 익는 것이야말로 씀의 가장 불길한 징조라는 게 괴로웠다.

나를 가장 아껴주신 J 선생님은 메일을 늘 이렇게 끝맺곤 했다. '소설이 너를 지켜줄거야' 그때는 그 뜻을 몰랐다. 학교를 떠나고 몇년 간 글을 안 썼다. 다시는 글 안쓰고 돈 벌거라고 했다. 씀을 지속하는 문우들을 보면서 질투로 돌아버리기도 했다. 내가 정말 소설을, 쓰는 것을, 사랑했을까? 이제 그런 질문은 무용하다. 다시 묻고 싶다. 소설이, '씀'이 나를 사랑했을까? 매번 돌려받을 수 없는 이야기에 마음을 쏟고 그 대가로 가끔씩 조악한 문장을 받아내는 삶.

그런데, 글을 안 썼더니 삶이 망했다. 진짜로 망해가고 있었다. 돈을 뜯기고 욕을 먹고 얻어맞고 내 얘기가 기사로 나오고 몇번의 송사를 겪고 사과를 받고, 좀 험했다. 글을 쓰고 있을 때는 이런 일들을 겪지 않았다. 지인에게 '무슨 상관관계가 있지는 않을까?'하고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글을 쓰고 있을 때는 오로지 글과 이야기에 집중하고 그런 삶이 매일 반복되니까 그런 일들을 겪지 않을 수 있었던 것 아닐까요?

나는 지금까지 쓴다는 행위가
나를 상처입힌다고 생각했는데
어떤 지점에서는 나를 필사적으로 지켜왔던 것이다.
반복되는 이야기의 자장
좁은 방 안에서 길어 올려지는 우주
역사가 채 길어올리지 못한 한 방울의 우주가
자신을 쓰는 사람을 지켜준다는 것을
쓰는 사람의 궤도 속에서, 이야기 속에서
필사적으로 나를 지켜왔다는 것을.

사람은 누구나 말을 하고 듣는다. 말하지 못하거나 듣지 못하는 사람도 말하고 듣는다. 그럴때 말은 입술의 말이 아닌 뼈의 말, 살갗의 말, 눈의 말, 손끝의 말, 환부의 말이다. 뼈로 말한걸 뼈로 듣고 살갗이 말한 걸 살갗이 듣는 순간이 있다. 그런 순간은 말해질 수 없다. 언어의 그물을 빠져나간 한방울의 우주. 쓰는 사람은 언어로 쓸 수 없는 것을 언어로 쓰기 위해 언어와 맞선다. 그 팽팽한 장력 속에서 '씀'이 시작된다. 아무래도, 생 날것의 감정을 품고 있다가는 뼈가 상할 지도 모르니까.


이야기가 끝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러나 쓰는 사람의 삶이 이야기가 된다.
이야기가 끝나도 삶은 계속된다.
그러면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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