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에게

우리가 우리에게 신이 되는 순간

by 소윤
안 보이는 것을 잘 믿는 마음을 신앙이라 부르고
마침내 모든 경전을 태워 우리가 우리에게 신이 되는 순간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부르지


무언가를 너무 원하면 왜 죽어버리고 싶어질까 정말로
죽어버리면 아무것도 원할 수가 없는데
너에 관해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 생각한 것을 마구 떠드는 것 아무렇게나 쓰는 것

나는 너를 냄새로 기억한다 너도
기억하겠지 내가 잠든 너의 등에 코를 박고
참았던 숨을 몰아쉬던 것처럼 냄새를 맡던 거 그때 처음으로
사람들이 왜 같이 살기 위해 애를 쓰는 지 알았다
좋아하는 사람의 냄새는 수면제의 20배 효과가 있다더라
얼마후 나는 섬유유연제를 바꿔보기도 했지만

너에게, 지금 입고 있는 옷을 당장 벗어서 이곳으로 보내달라고 했지
어젯밤 일이다
보고싶다는 말보다는 옷을 얼굴에 덮고 있는 일이 더 쉬울 것 같았다

너가 잠을 자고 있을 때 이불을 들추고 가만히
잠든 네 옆에 누우면 나는 맑고 순한 사람이 되어서
세상이 망해버려도 좋다고 생각한다 세상은 단순하고 부드러운 푸딩 같은 것 뿐이고 망하는 건 신이 은쟁반 위에 놓인 푸딩을 한 입 푹 떠먹는 것처럼 가볍고 평화로운 일이라고
오목한 마음

냄새를 맡으며
냄새를 맡으면
나는 달게 잠든다 망한 세상처럼 아주 달고 단순하게 잠들고
누군가 도려내간듯한 시간은 어둠
캄캄한 어둠이지만

모두가 믿는 신이 '빛이 있으라'고 말했을 때
우리가 믿는 신은 '어둠이 있으라'고 말한다 그래서
어둠은 빛이 없는 어둠이 아니고 어둠 그 자체로 충분하고
망해버린 세상의 단내가 풍겨오고
나는 계속 계속 가라앉아서
볼 수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 심해어의 아가미 같은 것이 되는데
이곳에 네가 있는 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어둠속에서

안 보이는 것을 잘 믿는 마음을 신앙이라 부르고
마침내 모든 경전을 태워 우리가 우리에게 신이 되는 순간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부르지

저녁이 온 창문을 보면서 "왜 안 깨웠어?"라고 물으면
너는 웃으면서 코까지 골며 잠든 애를 어떻게 깨우냐고 대답한다
너는 맑은 보리차 한 컵을 떠오고 나는
네가 차려준 밥을 먹으면서 밥을 다 먹으면
여느 때와 같이 천변으로 산책을 나갈 것임을 알고 있다 아니 믿고 있다
내게 딱 맞는 너의 옷을 빌려입으며
이것이 우리의 신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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