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무

오직 나만이 알고 있는 시간

by 소윤

어째서 갑자기 그 단어가 생각이 난 걸까?
잠에 들려고 누웠을 때 그 단어가 떠올라서 결국 어색한 사이의 동기 언니에게 밤늦게 연락을 해야만 했다.


언니 저예요.
너무 오랜만이죠.
언니, 그때 언니 소설 속에서 언니가 만든 단어 있잖아요.
자무.
그게 어떤 시간대를 말하는 거였죠?


상냥한 동기언니는 다음날 아침, 갑작스럽고 무례할 수도 있는 연락에 친절한 답장을 보내왔다.



자무는 저녁에서 밤으로 넘어가는 시간이야.



나의 궁금증과 갈급함은 해소되었다. 동시에 그 언니에게 질투심을 느꼈다. 세상에 없던 아름다운 단어를 만들어 낸 사람에게, 세계에서 홀로 유일하게 자무를 누릴 수 있는 사람에게.
'자무'가 갖고 싶었다. 그렇지만 나는 아직도 자무를 정확히 모른다. 저녁도 밤도 아닌, 저녁에서 밤으로 넘어가는 그 어디쯤.
언니는 어떻게 그 시간을 알게된걸까? 숨은 시간을 오로지 자신만의 것으로 만들어 세상에 없는 시간을 하나 더 갖게 된 언니는 매일 자무를 어떻게 보낼까?

사실 나에게도 우리에게도 각자의 자무가 있을것이다. 이름 붙일 수 없는 시간, 어디쯤에 걸쳐진 애매한 시간.
환절기가 있듯이 환시기도 있다고 생각한다. 환절기에는 사람들이 감기에 걸리지 않게 미리 대비를 하지만 환시기에는 미처 눈치채지 못해 가끔 마음에 감기가 걸려버리곤 하는거라고.
저녁과 밤 사이에 자무가 있듯 새벽과 아침 사이에도 눈치채지 못한 환시기가 존재하겠지.
해가 밝기 전, 알람이 울리기 전 예상치 못하게 눈을 뜨게 되면 사위가 고요하고 조금 서늘하다. 여린 박명이 다가올 듯 말듯 아주 옅은 베일을 드리운다.
밤의 우글거리는 것들을 재빠르게 뒤로 숨기고 부지런한 이들의 새벽을 준비하기 위해 조금씩 몸을 움직이는 시간.
모든 것이 멈춰있을 때는 오직 시간만이 움직이는 느낌이 든다.
아무 소리도 없는 침묵의 방에 들어갔을 때에
오직 자신의 혈관에 피가 도는 소리만 들리듯이.

자무라는 단어는 지금도 황홀하게 들린다. 가질 수 없는 것을 바라볼 때처럼. 동시에 내게 계속 시간의 흐름을 일깨워준다.
새벽, 아침, 점심, 저녁, 밤, 조금 더 쪼개면 오전과 오후, 정오와 자정. 그리고 그 사이에 숨어있는 무수한 시간들. 시간을 더 쪼개면 순간들. 짧지만 분명한 순간들. 이름 붙일 수 없는 순간들.

울기 직전의, 숨에서 울음으로 넘어가는 순간은 뭐라고 부를까?
입술이 닿기 전 찰나의 순간은 뭐라고 부를까.
한번도 눈을 마주치지 못하던 사람과 처음으로 눈을 마주친 순간의 이름은?
상대방이 입술을 열 때 나의 귀가 그 입에서 나올 말들을 각오하는 순간, 상대방이 입술을 닫을 때 이어질 무한한 침묵을 각오하기 직전의 순간은 뭐라고 불러야 좋을까.

그 수많은 '직전'의 순간들에게 이름이 있었더라면.
이런 순간과 시간들을 뒤늦게 떠올려보는, 지금과 같은 시간을 부르는 이름이 더 있었더라면.
나는 좀 더 황홀한 시간을 많이 가질 수 있었을텐데.
혹은, 조금 덜 다칠 수 있었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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