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좋아하지 않더라도, 여행하는 것처럼.
내가 만약 여행을 좋아했다면 여행이나 여행지에 관하여 쓴 글이 수십 편은 될 것이다. 어쩌면 지금도 낯선 곳에서 쓰고 있을지 모르지. 늘 쓰는 펜과 노트를 찾다가 아차, 두고 와 버린 것을 깨닫고는 여행지에서 산 엽서에 누군가에게 빌린 펜으로 전혀 생각치 않았던 문장을 쓰고 있을지도. 그러다 엽서 앞면의 풍경을 보고, 다음 행선지를 정해버리는 여행자의 용감함, 여행이란 잠시 어긋난 틈에서 쏟아져 나오는 의외의 풍경이 멋진거라고…… 여행자들이 진짜로 이런 사람들인지는 알 수 없다. 여행을 잘 안 가니까.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명확한 이유가 있다. 첫째로, 나는 길치다. 극악의 길치다. 누가 보면 너 그거 컨셉이지? 라고 말할 정도의 길치다. 길치들이 공감하는 말이 있다. '지도를 봐도 길을 못 찾겠다.' 2차원과 3차원의 호환이 어렵다고나 할까… '낮의 길과 밤의 길이 다르다.' 그러니까 길치들은, 길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길의 '분위기'를 기억하는 것이다…….
애인은 지도 없이도 본능적으로 가야 할 곳을 아는 사람처럼 걷고, 가야 할 곳을 찾지 못하더라도, 사실 우리가 가야할 곳은 여기였지! 라고 눙치는, 엽서 속 풍경에 망설임 없이 발을 딛는 용감함으로 가득한 사람, 덕분에 내가 기억하는 건 언제나 길의 분위기, 옆모습 너머의 기분, 낮에 머리 위로 흩뿌려지는 빛의 감촉이나 밤 가로등의 조도, 눈가에 번지는 농담濃淡 같은 것들. 길은 당신이 찾으니까 나는 이런 것만 기억하는 사람이 되고.
둘째로, 어디론가 떠나면 앓는다. 대개 몸을 앓고, 타지에서 몸을 앓다보면 맘도 앓고, 맘을 앓다보니 말도 앓는다. 어르신들은 이런걸 물갈이라고 부른다지. 나는 연못처럼 차분히 고여있는 걸 좋아한다. 물처럼 흘러가는 이들에게 물갈이란 자신도 모르는 틈에 일어날 일들이지만 못처럼 고인 내게 물갈이란 거의 전부를 바꾸는 일이므로 한번에 연못이 뒤집히면 병이 난다. 게다가 여행지에서는 꼭 목감기만 걸린다. 노래방(흡연 가능, 재떨이 구비, 요즘에도 흡연 가능 방이 있는지는 모르겠음)에서 담배를 빡빡 피우며 생목으로 고래고래 소리질러도 멀쩡했던 목이, 떠나기만 하면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정도로 푹 잠겨버린다. 내가 물갈이를 거부하기 때문에 아예 내 물 속으로 잠겨버리는 걸까, 숙소 침대의 이불 속에서 스스로에게 침잠하는 기분으로 몇 박 날린다. 거의 모든 수학여행의 기억. -차에서, 숙소에서 끙끙 앓기- 돌아올 때, 앙금 같은 부유물은 덤으로.
앞으로도 낯선 방의 테이블에선 쓸 수 없을 것이다. 언제나 내 방 책상 앞에서, 좋아하는 사진이나 엽서가 덕지덕지 붙어있는 벽 앞에서(풍경은 없고 대개 인물이나 정물이다). 쓰는 글의 느낌마다 정해진 노트와 그 노트에 맞는 펜으로(기준은 설명할 수 없지만 기준이 있긴 하다), 오랫동안 그렇게 쓸 것이고 눈을 뜨면 여전히 모든 것들이 여전함에 조금 안도하고 이야기가 이어지는 느낌으로 살아갈 것이다.
딱 하나, 여행에서 좋았던 것은 숙소에 짐을 푸는 일이었는데, 그건 마치 방과의 첫 인사 같아서 나는 모든 물건을 정갈하게 풀었다. 그런 것이 좋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머물다 갔더라도 그런 것 모르게 표백된 빤빤한 얼굴로 나를 맞는 방이, 그에 맞게 가능한 나를 남기지 않기 위해 함부로 늘어놓지 않고 물건을 푸는 내 조심성이, 그리고 나 역시 표백되어 방은 내 흔적을 말끔히 잊어 줄 거라는게 좋았다. 나도 그 방을 기억하지 않고 그 방도 나를 지워버리는, 그러나 머무는 동안에는 낯설고 맘도 설은 이 곳에서 가장 평안하도록 쾌적하고 깨끗한, 다정하게 무관심한 관계 속에서 나는 마음껏 앓고 슬픈 것들을 자주 떠올렸다. 따뜻하고 슬픈 것.
애인을 제외한 다른 이들을 대할 때는 어쩐지 목이 긴 초식동물의 기분이 되어서, 긴 목을 쭉 빼고 나 혼자 상대의 안부와 다행을 확인하게 된다. 내가 나눌 수 있는 최대의 다정이 역시 다정한 무관심인가 싶어, 가끔은 따뜻한 것과 슬픈 것을 나도 모르게 같은 선상에서 생각해버리는 내가 싫지만, 무튼 몰래몰래 확인한 안부들은 다행히 안녕한 것 같다. 무엇보다도 내 주변에는 여행을 자주 다니거나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대부분 여행기를 엄청 잘 쓴다.
다른 사람의 여행기를 읽는 것은 좋다. 많이 좋다. SNS에 올라오는 여행기가 너무 좋다. (소심한 하트 누르기) 내 주변 사람들은 좋은 것을 잘 본다. 좋은 것이 좋은 것인 줄 안다. 나쁜 것에서도 좋은 것을 찾고, 좋은 것 속에서 가장 좋은 것을 찾는다. 그리고 고맙게도 그것을 공유해준다. 나는 내 연못 안에서 좋은 눈으로 본 좋은 것들을 너무 쉽게 본다. 타인의 경험을 이렇게나 쉽게 얻다니, 가끔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고맙다. 내가 직접 발을 딛지 않더라도, 그저 연못에 비친 풍경일지라도 좀 어떤가.
내가 기억하는 풍경은 언제나 옆모습 너머의 길, 언제나 누군가를 한번 거쳐온 풍경, 그이의 시선과 마음과 분위기가 함께 빚어낸 풍경.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사람이 본 단 하나의 풍경이니까.
여행을 좋아하지 않더라도 여행할 수 있다. 나는 여행의 기록을 여행하는, 사람을 여행하는 사람이라고 해두자. 용감하지 않아도 되고 길을 찾지 못해도 된다. 좋은 것들을 봐줘서 고마워, 좋은 풍경 안에 있어서 고마워, 함께 나눠줘서 고마워. 긴 목을 당신 쪽으로 기울여 들키지 않을 만큼만 가볍게 인사.
솔직한 마음을 적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부터는 내가 본 좋은 것들도 써야지.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다. 오가는 길 합하여 22km. 매일 열심히 탄다. 덕분에 평생 볼 초록을 올 봄에 다 봤다. 온통 초록이라 지루할 만 하지만, 일단은 내 삶에 색이 들어왔으니 초록을 잘 보게 되면 그 안의 흰것도, 노랑도 붉음도 잘 찾게 되겠지. 자전거길은 전부 물길이라 이름도 '물길따라 걷는 길' 내가 정해놓은 도착지점에 다다르면 큰 물이 나오고, 물 위로 선물처럼 빛이 쏟아진다. 나는 못의 사람이지만 하염없이 물을 보게된다. 저기 빛나는 것, 움직이면서 각기 다른 결을 가진 것, 내려앉는 것, 빛을 튕겨내는 게 빛을 만드는 걸로 보이는 것, 물이 만들어 낸 빛이라고 믿게 되는 것. 이 물을 넘으면 도시가 바뀐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가야 여행이 되는 걸까?
내가 여행을 좋아했으면 좋았을텐데. 그럼 더 많은 걸 쓸 수 있었을 텐데. 가볍게 푸념하자 애인이 말했다. 나는 지금 이렇게 걷는 것도 여행이라고 생각하는데? 모르는 길도 아는 길처럼 용감하게 걷고 아는 길도 모르는 길처럼 침착하게 걷는 사람 덕분에, 나는 그 날 우리가 어디를 걸었는지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저녁의 가로등이 옆얼굴을 비치는 농담, 무언가가 가득 차오른 옆얼굴만은 또렷이 새겼다. 얼굴이 만들어 낸 빛이라고 믿게 되는 것.
여행을 좋아하지 않더라도,
여행하는 것처럼 걸을 수 있겠지. 어디로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