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과 블라이슈티프트, 여름바다와 나츠미
수업이 심심하게 느껴지는 겨울날 오후에는 옆자리 애랑 같이 내기하며 놀았다. 그것은 이런 식으로 하는 내기다. 창문 밖에서 풀풀 나는 눈송이 속에서 각자가 하나씩 눈송이를 뽑는다. 건너편 교실 저 창문 언저리에서 운명적으로 뽑힌 그 눈송이 하나만을 눈으로 줄곧 따라간다. 먼저 눈송이가 땅에 착지해버린 쪽이 지는 것이다. ‘정했어’ 내가 작은 소리로 말하자 ‘나도’ 하고 그 애도 말한다. 그 애가 뽑은 눈송이가 어느 것인지 나는 도대체 모르지만 하여튼 제 것을 따라간다.
잠시 후 어느 쪽인가 말한다. ‘떨어졌어.’ ‘내가 이겼네.’ 또 하나가 말한다. 거짓말해도 절대 들킬 수 없는데 서로 속일 생각 하나 없이 선생님께 야단맞을 때까지 열중했었다. 놓치지 않도록. 딴 눈송이들과 헷갈리지 않도록 온 신경을 다 집중시키고 따라가야 한다.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
나는 한때 그런 식으로 사람을 만났다. 아직도 눈보라 속 여전히 그 눈송이는 지상에 안 닿아 있다.
사이토 마리코 <눈보라>
봄에 일본어 단어를 외우던 친구는 겨울에 번역을 한다. 특별한 취미가 생긴 것이다. 마음에 창을 하나 더 냈구나. 내심 부러운 마음을 갈무리하고 무슨 글을 번역중인지 물었더니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은 프랑스 소설의 일본어판을 읽어보고 싶었다고 답했다. 조르주 페렉의 <실종La disparition>, 아, <사물들>의 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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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La disparition>이 한국어로 번역될 수 없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조르주 페렉은 이 소설에서 언어실험이자 유희를 시도했는데, 그건 바로 이 책 속의 어디에도 철자 'e'를 쓰지 않는 것이었다. 영민한 번역가는, 일본어에는 철자 'e'가 없으니 대신 '이 い', '키 き', '시 し' '치 ち', '니 に', '히 ひ'처럼 우리나라의 모음 'ㅣ'가 들어가는 철자를 전부 빼버렸다. 책의 제목은 <실종La disparition>에서 <연멸 えんめつ(엔메츠)>로 바뀌었다. 연멸. 연기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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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는 이 난관을 어떻게 극복했을까. 친구는 의외로 별 거 아니라는듯이 대답했다. "숫자 2를 다 빼버렸어." 나는 감탄하며 진지하게 진로를 통번역으로 틀어볼 것을 권유했다. 그러자 친구가 말했다.
"나는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은 절대로 안 할거야."
실종(연멸)의 번역본 초고-초반 일부지만-을 읽은 나는 꽤 행운아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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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 이맘 때 즈음 내가 가장 많이 읽었던 책은 사이토 마리코의 시집 <단 하나의 눈송이>였다. 1993년 민음사에서 <입국>이라는 제목으로 초판이 나왔지만 곧 절판, 청계천 헌책방을 이 잡듯이 뒤져도 나오지 않던 <입국>이 복간된 것이다. (함께 돌아다녀 준 애인에게 시집을 선물하고 싶었지만 애인은 시를 읽지 않는다) 아마도 이 시집에선 <눈보라>라는 시가 제일 유명할 것이다.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라는 구절이 들어있는 시. 그러나 내가 이 시집을 특별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이 시집은 번역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본인 사이토 마리코가 한국에 와서, 한국어로 쓴 시집이기 때문이다. (사이토 마리코는 일본어판 82년생 김지영의 번역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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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입국>이라는 제목이 더 좋았다. 온통 하얀 표지를 넘기면 빛이 가득한 게이트로, 정말로 다른 나라로 입국하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눈을 떠보면 여전히 익숙한 풍경, 그렇지만 이방인의 눈. 가끔 모국어가 내 혀나 피부가 되어 언어에 대한 긴장감이 느슨해질 때 이 시집을 읽는다. '나무'는 두 팔 벌려 누군가를 안아줄 것 같지만 ' 키き'는 드높이 솟아 오를 것 같고, '여름바다'는 까만 얼굴에 흰 이가 쏟아질듯이 웃는 소년같지만 '나츠미なつみ'는 방학이 지나면 없었던 것처럼 사라지는 소녀의 이름이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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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떠나기만 하면 꼭 사나흘 앓는 '물갈이'를 겪기 때문이다. 여행 대신 다와다 요코의 <영혼 없는 작가>를 읽는다. 매년 찾아가는 여행지처럼, 아무 페이지나 펼쳐도 금세 익숙해진다. <영혼 없는 작가>는 <입국>(이 제목이 더 좋으니까)과 달리 두번 번역된 책이다. 한번은 작가의 내면에서, 또 한번은 역자의 원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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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와다 요코는 일본인이지만 독일에 살면서 독일어로 말하고 읽고 쓴다. <영혼 없는 작가>는 일본인이 독일어로 쓴 책을 독일어 번역가가 한국어로 번역한 책이다. 일본인의 내면을 독일어로 쓰고 한국어로 읽는다. 그래서 읽다보면 패스츄리처럼 풍성한, 세 겹의 언어 질감이 느껴진다. 심이 날카롭게 깎여 정갈하게 놓인 엔피츠えんぴつ와 길고 매끈하고 단단한 블라이슈티프트Bleistift 사이에 거칠지만 나무 냄새 나는 뭉툭한 연필을 살며시 내려 놓는 마음. 이 책은 그런 수줍고 고즈넉한 마음으로 읽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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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소설을 프랑스어로 번역하는 한국인 · 프랑스인 번역가 부부를 만난 적이 있다. 궁금해서 이것저것 막 물어보는데 일행 중 한명이, "프랑스에서 최초로 번역된 한국 소설은 뭔가요?" 물었다. 프랑스인 남편이 무어라 대답한 것을 한국인 아내가 옮겨주었다. '향기나는 봄' 그런 소설이 있었나? 모두들 갸웃거리는 사이 누군가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춘향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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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날씨가 흐린 타국의 방 안에 홀로 누워 '물갈이'를 할 때, 한발짝도 움직일 수 없어서 창문 너머 나뭇가지들을 오래 보았다. 꽃도 잎도 피지 않았다. 나는 평소에 외로움을 잘 타지 않는데 문득, '아. 좀 외롭구나'하고 저들끼리 스치는 나뭇가지 소리가 대신 말해주었다. 그 어느 곳에서도 모국어가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은, 내가 그 나뭇가지의 말들을 제대로 옮긴 것인지 확신할 수 없다. 키가 나무가 되고 나츠미가 여름바다가 되고 블라이슈티프트가 엔피츠로 부드럽고 정확하게 이동하듯이 흐린 날 바람에 나뭇가지 스치는 소리를 '외로움'이라고 옮겨버려도 좋은가? 한국으로 돌아오는 날까지 자문해봤지만 적확한 말도, 문장도 나오지 않았다. 그때 나는 여행은 번역할 수 없는 마음의 언어를 받아적으러 가는 길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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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의 시를 읽고 조치원이 새들이 이르는 집이라는 걸 알았다. 애인과 자주 말없이 앉아있다 오던 섬이 달의 꼬리(월미)라는 것도, 언니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일했던 곳, 심곡동은 깊은 계곡이라서 다들 마음에 굽이진 물길 하나씩 흘렀나. 수유에 사는 애인은 수유에 사니까 흐르는 물 보듯이 계속 들여다보게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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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하늘을 보면, 낮달의 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