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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왕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진실도 말하지 않는다.

by 소윤
너는 말할 수 있는 비밀만 말하는 사람같아.



내게 이런 말을 해준 사람이 누구인지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이름도, 얼굴도, 목소리도. 당신이 누구인지 기억할 수 있다면 나는 당장에라도 찾아가서 밤새도록 말하고 싶다. 무엇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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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시인에게 시를 배웠다. 나는 그 분을 선생님이라기보다는 시인으로 생각했고 지금도 그렇다. 나는 그분의 수업 방식이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아 다음 학기에는 수강 신청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모두들 그 선생님을 좋아했다. 은사님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그분은 시 창작 시간에 시를 읽는다기보다는 시를 쓴 사람의 마음이나 불안 같은 것을 보곤 했는데 내가 다음 학기에 그분의 수업을 듣지 않은 이유는 그분이 본 것이 대부분 맞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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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70을 가지고 있고 그 70만으로도 충분한 사람인데 왜 억지로 100을 해내려고 힘을 빼고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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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는 우연한 기회로 멘토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을 만났다. 나는 그 사람과 같이 지내면서 다섯 편의 글을 썼다. 그는 내 다섯 번째 글을 읽고 이제 됐다고, 이정도면 많이 노력했다고, 그만 써도 된다고 했다. 다시 말해 앞선 네 편의 글은 모두 까였다. 그는 내 글을 읽을 때마다 언제나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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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솔직하게 쓰지 못해요?
하고 싶은 말은 정작 못하고 주변부만 빙빙 돌고 있어요.
그래서 이야기가 전부 파편화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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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박 3일 정도를 멘토의 집에서 숙식한 후 쓴 내 다섯 번째 글은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중학생 때 부친이 남극으로 떠났다...' 밤새 글을 다 쓰고 해가 뜨는 것을 보고 그와 맞담배를 피운 뒤 가방을 메고 집을 나와 다시는 그를 만나지 않았다.
앞으로도 만나지 않을 것이다.
시를 가르쳐 준 시인과도 우연히라도 마주친 적이 없다. 그 시인의 시집조차 읽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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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거짓말을 못한다. 어쩌다 하게 되더라도 표정에서 드러나고 목소리에서 탄로난다. 고민 끝에 생각해 낸 나의 얕은 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대신 진짜도 말하지 않는 거였다. 시인의 별명은 무당이었다. 멘토 역시 자기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정말로 쓰는 사람들은 한 문장만 봐도, 눈빛만 봐도 다 알 수 있다고 했다. 꿰뚫린다는 건 그런걸까. 같이 수업을 들은 친구들은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자신을 읽어내는 그 눈빛을 좋아했다. 멘토의 집에서 같이 글을 쓰던 사람들은 글로 쓰지 않은 자신을 멘토가 읽어낼 때마다 화를 내거나 울었다. 나는 좋아하지도, 화를 내거나 울지도 않았다. 그냥 아무렇지 않은 척 했다. 나는 이것이 조금 비겁하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에세이를 쓰기 시작했다. 할 수 있는 한 내 자신에게 솔직해지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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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해지고 싶다는 말 한마디를 하기 위해 몇개의 고백을 한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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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읽은 산도르 마라이의 <열정>이라는 책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나는 언젠가 실제로 고백할 일이 있을 거라는 것을 아는 사람만이 그처럼 성실하게 고백하고 겉으로 솔직하려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네. (...) 그렇게 애써 솔직하려고 하는 사람은 무엇인가 두려워하는 게 있다는 것을 나는 시간이 많이 지난 다음에야 깨달았지. 다른 사람에게 알릴 수 없는 진짜 비밀, 글로 쓸 수 없고 말로 할 수 없는 순수한 비밀로 자신의 삶이 채워질 것을 두려워한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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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말 할 수 있는 비밀만 말하는 사람같아.
이 말을 도대체 누구에게 들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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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 할 때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이야기해야 하는지 가늠해보는 것이 제일 어렵다. 누구에게나, 다른 사람의 고백을 짊어진다는 건 꽤 부담스러운 일이고 그렇다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입을 닫을 수도 없으며 거짓말을 할 수도 없다. 결국 나는 끝없이 고백하게 된다. 그러자 테이블 너머 상대도 고백해온다. 이럴 때 테이블 위에는 마치 젠가가 놓인 것 같아, 나는 중간의 블록 한조각을 조심스럽게 꺼내어 당신이 무너질만한 위치에 놓는다. 당신 역시 그 조각을 내가 곤란해 할 만한 위치에 놓지. 그 밤에 우리는 모든 것을 나누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우리가 주고받은 건 진짜를 고백하지 않기 위해 늘어놓은 수많은 고백들과 아슬아슬하게 뒤틀린 모양으로 쌓인 블록. 젠가는 무너질 것을 알고 하는 게임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가 너무 많이 말한 건 아닐까. 무너진 쪽은 내가 아닐까 곱씹으며 후회하고 잠들지 못한다. 그날 마지막 조각을 뺀 것이 나인지 당신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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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보는 사람, 그리고 다시는 못 볼 것을 아는 사람에게 모든 것을 내려 놓듯 고백한 날도 있었다. 나는 그 사람이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행복하게 살거나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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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일기를 쓰는 기분으로 일기를 쓴다. 일기장에도 진짜를 말하지 못하니까 평생 일기를 쓰는 기분 밖에는 될 수 없다. 나는 아무도 읽지 않는 일기장에도 거짓말을 쓴다. 글로는 거짓말을 해도 들키지 않는다. 사실 내게 '너는 말할 수 있는 비밀만 말하는 사람'이라고 한 이가 누구인지 똑똑히 기억한다. 그렇게 말해준 사람을 쉽게 잊을 리 없다. 그이를 만나면 내가 말할 수 있는 고백 대신 말할 수 없는 고백을 털어놓고 젠가처럼 무너질까봐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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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자물쇠가 달린 일기장이 있어, 아무도 열 수 없지만 때로는 누군가에게 열쇠를 줘 버리고 싶다는 마음으로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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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에 거짓말을 쓰지 않았어.
그렇지만 진짜를 쓰지도 않았다.
어디까지나 끝없이 이어지는 고백으로,
여기까지가 끝, 더는 열리지 않는 벽인 척 하지만 실은 또 다른 문의 고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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