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재의 기록 ⠀ 8년 간의 연애가 끝났다. ⠀ 돌아서는 마음조차 다정한 그 이는 내가 혹시라도 슬픔에 겨워 삶을 내던지는 건 아닌지 마지막까지 걱정했다. 이별한 다음 날 전화가 왔다. 나는 다행히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고 출근도 잘 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이는 마지막까지 내가 하는 모든 일이 잘 되기를 기원했다. 고생했어. 그 한마디를 마지막으로 ⠀ 전화가 끊겼다. ⠀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글을 쓴다. 나는 그이를 처음 보자마자 나와 비슷한 동류의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다정함에 재능이 없는 사람. 다정함은 재능이고 선천적으로 타고 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정함에 재능이 없는 사람들이 누군가에게 다정하려고 할 때는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 안간 힘을 써야 한다. 나는 그이의 그 안간 힘을 사랑했다. 매끈하고 유려한 다정함보다, 안간 힘을 써서 건네주는 그 서툴고 모난 다정함을 사랑했다. 비록 모서리에 찔려 상처가 날 지라도. ⠀ 어떤 눈 밝은 이가 그의 안간 힘을 알아줄까. 무뚝뚝하지만 선량한 품성을. ⠀ 나는 우리가 (이제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수 있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마주보고 서 있지는 않지만 언제나 같은 방향으로 나란히 달리고 있다고 믿었다. ⠀ 알고보니 그 길은 평행선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는 만난 적도 없었던 것 같고, 앞으로 만날 수도 없을 것만 같다. 아니, 헤어지고 나서야, 이제야 그이를 다 만난 듯한 느낌이 든다. 한 사람의 가장 밝은 양지와 가장 어두운 협곡 안을, 가장 뜨거운 끓는 점과 가장 차가운 어는 점을 전부 샅샅이 훑고 통과한 느낌이다. 어떤 통과 의례를 거치는 것 같다. 질곡이 많았다. 8년이라는 시간은 물리적으로도 꽤 길다. ⠀ 그이는 헤어지면서 내게 부탁했다. 앞으로는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쓰지 말아달라고. 나는 알겠다고 했다. 그러나 앞으로 내 문장들은 그이에게 닿을 일이 없으니 나는 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모든 문장들이 길을 잃었다. 내 문장들은 실은 모두 한 방향으로 쓰이고 있던 것이다. 밤하늘의 모든 별자리가 사라진 것 같다. 나침반이 없던 시절, 사람들은 별자리를 보고 길을 찾았다. 이젠 내게 길잡이가 되어줄 별도, 별과 별 사이를 이어 만든 아름다운 이야기도 없다. 모든 이야기가 사라졌다. 어둠에는 방향이 없다. ⠀ 내가 지금 쓰는 글이 연서인지 유서인지조차 이제는 모르겠다. ⠀ 어둠, 방향 없는 어둠. 내게는 그런 어둠이 있다. 내 어둠은 단순히 빛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게 아니었다. 나의 신은 나를 빚을 때 빛이 있으라 말하지 않고, 어둠이 있으라, 고 말했다. 내 어둠은 그 자체로 자생하는 어둠이었다. 신이 내 어둠을 다루는 감각은 너무도 민감해서, 잔인했다. ⠀ 그러나 그이는 내 어둠을 '빛이 없는 상태'라고 믿었다. 지금도 그이가 내게 건네준 빛들은 소중하다. 내 신의 부드러운 어둠 감각 때문에 그 빛이 빛을 낼 수 없었을 지라도. ⠀ 그러나 한때는 나도, 빛으로 가득 찬 적이 있었다. 너무 뜨겁고 너무 밝아서 빛은 빛 스스로를 보지 못한다. ⠀ 눈 안의 빛 때문에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 2012년, 한강 공원. ⠀ 빛도 별도 다 사라진 어둠 속에서, 신의 섬세하고 예민한 어둠 감각 속에서 나는 쓴다. 나는 충분히 어둠으로 살아갈 수 있다. 내 눈은 암순응에 익숙해져 있다. 그래서 단 한 번 담은 빛 때문에 영영 눈이 멀어버린다해도 그때는 좋았다. ⠀ 좋았다. 모든 것들이 다. ⠀ 나는 어째서 손 안에 타오르는 빛을 쥐고 싶다고 생각했을까. 최근에 나는 실제로 화상을 입었다. 흉터가 꽤 크게 남았다. 사람의 여린 살을 가진 주제에 어째서 맨 손으로 빛을 쥐어보려 했던 걸까. 그건 어떤 마음이었을까. ⠀ 기꺼이 손으로 타오르는 빛을 쥐는 마음이 다시는 내게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내 손 안에는 이제 다 타고 남은 재가 있다. 희고 부드러운 재. 다 타 버리고 나서야 비로소 손에 쥘 수 있게 되었다. ⠀ 나는 이제 내 손 안에 남은 마지막 재의 기록을 쓴다. 나는 다시 암순응 속에서 모든 것을 볼 수 있고, 모든 것을 손에 쥘 수 있다. ⠀ 그이는 흐르는 물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다. 천변에서 한없이 물을 바라보던 뒷모습만은 시간이 아주 많이 흐른다 해도 선명할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을 흐르는 물 위에 새기는 사람. 나는 백지 속에 잉크를 흘려 넣는 사람. 모든 문장을 음각으로 새겨 그 안에 기억을 가두는 사람이다. 각자 다른 방식으로 서로를 잊어가거나, 기억할 것이다. ⠀ 나는 금이 갔고, 빛은 그곳으로 들어올 것이다. ⠀ 책갈피 효과, 라는 말을 만든 적이 있었다. 그이를 생각하며 만든 말이다. 아름다운 순간 속에 그이가 책갈피처럼 꽂혀 있다. 언제든지 쉽게 찾을 수 있게. 그러나 이제 그 책갈피는 낙엽이 부서지듯, 가루가 되어 흩날릴 것이다. ⠀ 앞으로 내게 불보라처럼 일렁이는 순간은 오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이에게서 순간을 배웠다. 순간을 기억하는 법, 소중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기록하는 법, 내게는 그런 순간들이 많다. 그러나 앞으로 모든 시간은 손 틈새로 새어나가는 하얀 재처럼 부드럽게 흘러갈 것이다. ⠀ 나는 이제 꼭 쥐었던 손을 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