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 집과 학교를 오갈 때마다 김정미 노래를 들었다.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김추자가 ‘소주병 테러 사건’으로 여러 번의 수술을 거치는 동안 김추자의 대타로 무대에 올랐지만 지금도 그에 가려 이인자로 불리는 김정미의 노래를. 1973년 <나우>라는 앨범을 발매하면서 도약의 기회를 얻었지만 2년 후 미국으로 떠나 다시는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은 김정미의 노래를. '목소리가 불온하다'라는 이유로 더는 한국에서 부를 수 없게 된 그녀의 노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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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미를 들을 때마다 노래는 ‘노래하다’라는 뜻 말고도 새로운 길路이 내게 온다來라는, 하나의 뜻이 더 있는 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전철 안의 익숙한 소음과 일정한 리듬의 진동, 수업이 늦게 시작되는 날 맞은편 차창에서 쏟아지는 하오의 빛, 포구에 인접한 역에서 풍겨오던 생생한 짠 비린내. 나는 그런 모든 것을 김정미의 노래 한 곡으로 응집할 수 있고 김정미의 노래 한 곡에 그 모든 것이 세세하게 풀어지며 떠오른다. 어떤 길은 노래로 다가와 노래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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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즐겨 들은 노래는 '햇님'과 '봄'이었다. 만일 무인도에 단 하나만 가지고 갈 수 있다면 김정미의 <나우> 앨범을 선택할 것이다. 그 앨범에는 ‘햇님’도 있고 ‘봄’도 있고 ‘바람’도 있으니까. 영원한 이곳에 그대와 손잡고 햇님을 보면서 다정히 살리라. 봄바람 불어오누나,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봄봄, 봄봄, 봄이여. 김정미가 노래하는 세계는 균열도 없이 따뜻하고 다정했다. 마치 온실 정원 같은 세계를, 김정미는 1973년에 노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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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자의 시대, 너무 많은 피를 흘렸고 너무 많은 죽음이 있던 그 시절에 김정미는 '햇님'과 '봄'을 불렀고, 그녀의 노래는 창법이 저속하고 목소리가 불온하다는 이유로 대부분 금지곡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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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가 불온하다는 이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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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김정미의 목소리는 내게 정말로 불온하게 들렸고 어딘가 위태로웠다. 마치 나에게 이렇게 아름다운 세계 뒤에는 무엇이 있지? 라고 속삭이는 듯했고 이 얇은 베일을 걷어내면 꼭 무언가가 숨겨져 있을 것 같지 않니? 라고 나를 충동질하는 듯했다. 그때부터 나는 이 평온하고 무탈한 일상을, 그런 일상들이 모여 만들어낸 나의 아름다운 세계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토록 불온한 목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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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창작 수업을 들으러 가는 길에 김정미의 노래를 들으면서 나는 내가 쓴 문장이 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문장이 소환한 여백이나 예감들이 빛나는 순간이 시가 되는 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녀가 1973년, 독재자의 시대에 ‘얼마나 좋은 곳에 있나. 태양빛 찬란하구나. 무지개를 타고 햇님을 만나러 나와 함께 날아가자’라는 노래를 부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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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이 있는 날은 늘 곤혹스러웠다. 소설을 쓰고 싶었고, 소설을 너무너무 잘 쓰고 싶었기 때문에 왜 시를 써야 하는지 심정적으로 납득하지 못한 상태에서 늘 시를 썼다. 선생님은 소위 '무당'으로 불리는 시인이었다. 수업 시간마다 작두 타듯이, 시를 쓴 그 사람 자체를 간파해낸다고 생긴 별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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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한 문장을 남기고 온 세계를 시로 만든다. 나는 지나치게 많은 문장을 썼고 쓰면 쓸수록 무언가를 흘려버렸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 세계의 비밀 대신 누구나 쓰는 흔한 문장들이었고 환한 빛 아래에서 드러나기를 두려워하는 문장들이었다. 선생님은 말했다. 너는 70을 쓸 수 있고 70으로도 충분한 사람인데 왜 굳이 나머지 30을 억지로 채우려고 드니. 그게 네 시를 안 좋게 만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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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선생님을, 선생님이 아니라 시인이라고 생각했다. 다음 학기부터는 수업을 듣지 않을 거라 다짐했다. 지금 내게는 시인이 아니라 선생님이 필요해. 뾰족하게 올라온 마음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위악을 부리며. 그러나 그 말만은 마음속 깊이 음각으로 남았다. 시인은 이렇게 말하고 싶었던 걸까. 너는 70의 문장을 써라. 나머지 30은 늘 은밀한 것으로 남겨두어라. 세계는 늘 그런 식으로 지탱되고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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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노랫말이 아름답듯이.
그녀의 목소리가 불온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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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갈 때 환승역에서 나는 가만히 앉아 몇 대의 전철을 그냥 떠나보냈다. 환승역은 이 도시와 저 도시의 경계선이었다. 지상 역이었고, 스크린도어가 없었다. 그날따라 햇빛이 유독 강렬했다. 열차가 지나가면서 부는 바람이 나를 다른 곳으로 이끌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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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내 시를 좋다고도 말했지만……. 저 햇빛이 철로와 철로 위의 자갈들과 내 정수리와 수치심을 눈부시게 비추었다. 환한 빛 아래에서 드러나기를 두려워하는 문장들. 환한 빛 아래에서 드러나기를 두려워하는…… 나는 명순응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저 햇빛에 모든 걸 내던져버리지 않기 위해 자신을 견디며 플랫폼 벤치 위에 한참 동안 앉아 있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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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밝았으므로, 나는 자신을 전적으로 의심해야만 하는 순간에 처음으로 직면했다. 아마도 그때 나는, 역시 김정미의 노래를 듣고 있었겠지. 불온한 목소리로 지탱되는 세계의 비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