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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윤 Feb 28. 2022

회보랏빛 겹꽃으로 꽃점 치는 일

그리고, 점괘가 맞아 떨어지는 순간

회보랏빛 겹꽃으로 꽃점 치는 일

요새는 무언가를 끊임없이 읽고 있다. 뉴스레터 몇 개를 구독했고, 출퇴근길에 오가면서 시집 두어 권을 번갈아 읽는다.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3주 전 승연이 보내준 시편에도 피드백 메일을 보냈다. 요즈음은 주로 소설보다는 시를 읽는다. 승연의 시를 읽는 내내 안도 타다오의 건축물을 떠올렸다. 콘크리트와 빛의 향연으로 어우러진 그 집, 안도 타다오는 빛과 바람이 그대로 들이치는 집을 짓는다. 천장이나 바람막이가 없는 중정, 십자가 모양으로 빛이 들어오는 교회. 사람이 살기 불편한 대신에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고자 하는 집이다. 승연의 시 역시 빛과 유령이 자유롭게 드나드는 정원처럼 투명했다. 첫 시의 제목 역시 ‘카레산스이’(일본식 정원)이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사라지고, 다시 생겨나는 그녀의 시적인 몸이 참 좋았다.


승연과 매영 선배는 시를 쓰는 사람들, 나는 시를 쓰는 사람들이 그 자체로 귀하다고 생각한다. 시를 쓰는 사람들은 오직 자신, 한 사람으로만 이뤄진 하나의 종족. 문장으로 나아갈 때마다 진화에 진화를 거듭한다. 승연이 쓴 시의 한 구절을 빌리자면 ‘기댈 것은 서로의 말밖에 없을 때까지’ 그러나 앞 문장이 뒤 문장을 배신하고 뒤 문장이 앞 문장을 무너뜨리는 것 역시 시라서. 스스로가 발 디딘 땅을 무너뜨리고 다시 재탄생하는 문장들, 자신이 직조한 태피스트리를 찢고 나오는 시. 그래서 나는 시 쓰는 사람들을 귀하게 생각한다. 자신의 세계를 자신이 무너뜨려야 하는 질서, 그 긴장을 놓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안미린 제2 시집을 너무 귀하게 잘 읽었다. 너무 아름다운 문장들이 가득해서 눈이 부실 정도였다. 시집을 읽고 눈물이 날 수도 있을까. 아마 그건 슬픔이나 기쁨의 눈물이 아니라 햇빛을 맨눈으로 볼 때 너무 눈부셔서 흘리는 눈물에 더 가까울 것이다. 우리는 햇빛을 맨눈으로 볼 수 없어서 매번 필터를 통해 봐야만 한다. 시는 우리가 볼 수 없는 빛과 물질에 언어라는 필터를 씌워서 보여주는 장르 같다.


빛과 유령의 태피스트리

사랑과 죽음의 태피스트리


누군가는 시를 쓰는 일이 세상에서 제일 무용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마치 ‘회보랏빛 겹꽃으로 꽃점 치는 일’(안미린)처럼 말이다. 그러나 나는 시인들이 샤먼과 비슷한 일을 한다고 생각한다. 언젠가는 그 꽃점의 점괘가 보기 좋게 들어맞기를 기다리고 있다. 부디 그들의 언어가 멸종하지 않기를, 사멸하지 않기를. 누군가가 글을 쓰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쓸쓸한 일이 생기지 않기를, 문장으로 맺은 연을 생각하며 거듭 거듭 비는 밤.


당신이 눈을 감기 전에 이 눈부심을 보여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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