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그는 왜 나보다 강한가
그날 오후, 나는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을 만났다.
이름만 들어도 속이 뒤틀리는 이름.
한때는 친구였고, 한때는 경쟁자였고, 지금은 그저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존재.
SNS 속에서 그의 이름을 보게 되는 날이면 나는 늘 나도 모르게 움찔하곤 했다.
오늘은 그를 오랜만에 직접 마주하게 되었다.
모임이었고, 우연이었다.
아니, 필연에 가까웠다.
인생은 늘 내가 피하고 싶은 것을 눈앞에 데려다 놓는다.
그는 여전히 유능해 보였다.
자연스럽게 말하고, 웃고, 사람들의 중심에서 무언가를 주도하는 모습.
나는 구석에서 조용히 웃는 사람이 되었다.
그런 역할이 편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아니었다.
오늘은, 왠지 모르게 그에게 졌다는 기분이 들었다.
“왜 너는 늘 조용히 있으려고만 하니?”
내 안에서 또 다른 내가 속삭였다.
그 말은 비난이 아니었지만, 분명 따갑게 박혔다.
나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라고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진심은 아니었다.
그도 알고 있었다.
나는 지금 내 자신이 싫었다.
그와 나 사이엔 과거가 있다.
대학 시절, 같은 수업을 들으며 시작된 묘한 긴장감.
같은 주제의 발표를 놓고 비교당했고, 어느 날은 내가 앞섰고,
또 어느 날은 그가 나를 눌렀다.
그는 언제나 정답을 말했고, 나는 종종 정서를 말하곤 했다.
사람들은 그를 더 많이 신뢰했고, 나는 감정이 많다는 이유로 종종 불편한 존재가 되었다.
그날 이후, 나는 점점 말을 줄였다.
감정은 다루기 어려운 것이라는 걸 깨달았고,
다수가 선호하는 방식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내 안의 그는 그걸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그가 다시 말하는 것이다.
“넌 왜 너를 지키는 데에만 익숙하니.
한번쯤은, 뚜껑을 열어야 하는 거 아니야?”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할 말을 고르느라 시간이 필요했다.
아니, 진짜는 대답할 용기가 필요했던 거다.
그건 늘 그랬다. 내 안의 그가 나를 도발할 때, 나는 침묵했고,
그는 그 침묵 속에서 더욱 선명해졌다.
그건 마치 해가 질 무렵, 그림자가 길어지는 것과 같았다.
모임이 끝난 후, 나는 혼자 골목을 걸었다.
일부러 천천히 걸었다.
사람들의 웃음소리, 건물 사이사이 스며드는 노을빛,
그리고 가슴 깊이 올라오는 이상한 분노와 부끄러움.
나는 내가 그보다 못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나는 늘 도망치듯 살아가는 걸까?
“그는 너보다 강하지 않아.
다만, 너는 그에게 자리를 내어줬을 뿐이야.”
내면이 말했다.
이번에는 다정한 목소리였다.
그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늘 세상과 싸우기보다는, 피하는 쪽을 선택해왔다.
하지만 피하는 동안에도 내 안에서는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누구도 이기지 못한 채, 고요하게 흐르는 긴 전쟁.
“내가 나를 증명할 필요는 없어.”
“그래. 하지만, 네가 너에게는 진실해야 해.”
둘 사이의 대화는 그렇게 끝났다.
누군가에게 이기지 않아도 된다는 건, 약함이 아니라 해방이었다.
나는 오늘도 그에게 지지는 않았고, 나 자신에게도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날들이 있다는 것을 배워야 했다.
편의점에서 맥주 한 캔을 샀다.
돌아오는 길, 공원 벤치에 앉아 천천히 마셨다.
달지도, 쓰지도 않았다.
딱 지금 내 마음 같았다.
어쩌면 나는 계속해서 그와 함께 살아야 할지 모른다.
내 안의 또 다른 나.
나보다 솔직하고, 때론 차갑고, 가끔은 구원 같은 존재.
그는 내가 무너지지 않도록 붙드는 이름 없는 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