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는 산책하듯이 퇴고는 마라톤 하듯이
에세이 쓰기의 3요소
톨스토이의 3대 걸작 중 하나인 《안나 카레니나》를 읽다가 혀를 내둘렀다. 청소년기에 서점에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사서 읽고 ‘이 양반 글 참 잘 쓰시네’라고 생각했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어떻게 하면 1000페이지가 넘는 소설을 이토록 섬세하고 긴장감 있게 쓸 수 있을까. 인간의 심리를 면밀하게 들여다볼 수 있게 된 그는 '심심한데 작가나 할까'하며 의자에 앉아 한가롭게 수염을 다듬었을지도 모른다.
이해사 작가의 《내 글도 책이 될까요?》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톨스토이 글의 위대함은 초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퇴고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그의 초고는 보통 사람과 다를 바가 없었으나 수십수백 번의 퇴고를 거쳐 그만한 작품이 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 작가 미루야마 겐지 역시 초고를 써놓고 최소 7번은 퇴고해야 한다고 말했다. 글 잘 쓰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렇게 말한다. 초고는 직관적으로, 퇴고는 이성적으로. 초고는 마음으로, 퇴고는 머리로.
글을 쓰기 전에는 나를 방해하는 완벽주의와 한바탕 싸움을 벌여야 한다. 이 완벽주의 속에는 다양한 첨가물이 들어있다. 그건 게으름일 수도 있고 타인의 시선일 수도 있다. 완전무결한 글을 써야 하며 브런치에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는 ‘이게 공모전에 출품할 수 있을만한 글인가’에 대해 생각할 때도 있다. 이런 것들은 내 마음에서 진정으로 우러나오는 글쓰기를 방해한다.
정지우 작가는 《우리는 글쓰기를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에서 에세이를 쓸 때 필요한 3요소에 대해 이야기한다. 첫째는 개인성에서 보편성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 둘째는 정서. 셋째는 솔직함이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이 세 가지 요소를 앉은자리에서 다 외워버렸다. 그리고 늘 이 세 가지를 염두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생각보다 글 앞에서 자기 자신을 내려놓지 못한다. 특히나 다른 사람이 열람할 수 있는 글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브런치에서 글을 쓰면 솔직해질 수 있을까? 당신은 정말 솔직하게 쓰는가? 초고를 작성하며 솔직함보다는 유려한 문장에 더 힘을 쏟고 있는 것은 아닌지?
놀랍게도 도서관에서 많은 책들을 읽으며 경험해본 결과 내게 깊은 울림을 줬던 에세이들은 모두 아주 솔직했던 에세이들이다. 자신의 허점을 드러내기도 하고 과거에 이런 생각을 했던 게 부끄럽다고 썼던 사람들도 있었으며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독특하고 감상적인 사람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의 문장은 아름다움과 숙련됨을 불문하고 마음속에 오래 남아있다. 나도 그들처럼 쓰고 싶어졌다. 그저 비유가 가득하고 현학적인 문장이 아니라 마음에 오래 남는 할머니의 편지처럼 말이다.
솔직하게 쓰려면 초고는 아주 휘갈겨 쓰듯이 써야 한다. 생각의 필터를 너무 많이 거치지 않고 써야 한다. 초고를 쓸 때 마음을 좀 더 가볍게 하는 방법은 초고를 브런치에 쓰지 않는 것이다. 컴퓨터를 켜고 한글이나 워드, 혹은 메모장을 열어 파일 이름을 ‘그냥 아무 글’ 혹은 ‘토막글’이라고 써놓고 시작하면 좀 더 직관적이고 솔직한 초고를 쓸 수 있다. 어떤 방법이든 상관없지만 쓰고 싶은 주제가 생기면 일단 뭐라도 써 봐야 한다.
그렇게 가볍게 산책하는 마음으로 초고를 완성하면 다음에는 며칠을 묵히면서 마라톤을 하듯이 인내심을 갖고 퇴고해야 한다. 미루야마 겐지가 말한 7번의 퇴고는 말 그대로 7번 수정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 정도로 생각날 때마다 자주자주 봐야 함을 의미한다.
글을 쓰는 사람들의 마음을 안다. 내 글이 빨리 세상에 나왔으면 좋겠고 내 글이 하루빨리 사람들의 관심을 받길 바라며 누군가 내 글을 진심으로 읽어주길 바라는 그 간절한 마음. 하지만 쓰는 사람은 퇴고의 지겨움을 견디면서 '독자가 어떻게 하면 내 글을 더 쉽게 읽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쏟아야 한다. 이 시간을 버티며 내가 썼던 초고는 일기에서 편지가 되고 ‘나를 위한 글’에서 ‘우리를 위한 글’로 변화한다. 우리처럼 쓰는 이들은 그 힘겨운 과정을 사랑하며 버텨야 한다.
사실 나는 이 글을 쓸만한 자격이 되지 못한다. 어떤 책의 저자도 아니고 국문학과도 아니고 그냥 대한민국 구석탱이에 사는 보통 사람일 뿐이다. 그럼에도 이 세상에는 쓰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많음을 아주 잘 알고 있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이든 잘 쓰지 못하는 사람이든 누구나 쓰는 것은 두렵다.
처음은 가볍게 산책하듯 쓰자. 산책이 소화를 시키는 것이 목적이든 풍경을 즐기는 것이 목적이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걷는 것이 목적이든 간에 일단 쓰자. 우리에겐 ‘퇴고’라는 신이 있다. 신이 존재하든지 존재하지 않든지 간에 그 믿음을 이행하는 것은 우리에게 이로움을 가져다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