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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슬기 Dec 30. 2021

나라면 네게 고마울거야

가위, 바위, 보!


배민 서비스가 활성화되기 전까지, 내 동생과 나는 짜장면 주문에 앞서 늘 가위바위보를 해야 했다. 우리에게 있어서, 배달 음식 주문을 누가 할 것인가는 꽤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나와 동생은 태생이 내성적인지라, 음식점에서도 점원을 부르는 벨이 없으면 난감해했고, 버스 정류장을 지나쳐도 "내릴게요!"라고 말을 못 하는 사람들이었다. 차라리 한 정거장 지나쳐서 다시 걸어가리라. 나는 성장하면서 이런 상황들이 덜 불편해지기 시작했으나, 동생은 여전히 그러한 상황들을 불편해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덜 불편하다고 해서 그런 행위들을 기꺼이 하겠다거나, 좋아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래서 우리 사이에서는 늘 이러한 거래가 이뤄졌다.


"오늘 내가 배달 전화할 테니까, 네가 배달비 내."

"오늘 언니가 다 해주면 안 돼? 대신 화장실 청소 내가 할게."

"화장실 청소 받고, 설거지까지 네가 해 그럼"

"뭐야, 그런 게 어딨어"

"그 정도로 하기 싫다는 거지 ^^!"


이런 우리에게 비대면 배달 서비스는 솔직히 혁신이었다. 휴대폰으로 주문하고, <벨 누르시고 문 앞에 놔주세요>를 기본 메시지로 저장해 두면 전화도 안 해도 되고, 직접 물건을 받을 일도 없으니 너무나 좋은 것이다.


"이제야 세상이 좀 살 맛 나네."

"그러니까. 세상 진짜 좋아졌다."



동생이 얼마 전에 은행에 전화하면서 적은 대본. 그 전에 이미 썼던 대본은 다 버렸다고 한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전화를 해야 하는 상황을, 언제나 피해 갈 수는 없는 법이다. 동생은 상담원한테 전화를 하면서 항상 흰 종이 하나와 펜이 필요했다. 동생은 언제나 전화를 하기 전에 자신이 할 말을 적어 놓고 전화를 시작했다. 그리고 어떤 날은 그 대본 수정을 몇십 분에 걸쳐서 하기도 했다. 열심히 연습하는 것은 덤.


"언니, 내가 너무 소심하게 말해서 상담원이 나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어떡해?"

"하나도 안 이상해. 근데, 너무 자신감 없이 말하면 당황스러워하실 수도.."


동생은 자기 자신을 꽤 답답하게 여기고 있었다. 옆에서 보는 나도 솔직히 말하면 답답하다. 하지만 내 예전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별 말은 안 한다. 어련히 자기가 알아서 하겠지, 하고 내버려 둔다.


하지만 이렇게 고민하는 것 치고 동생은 상담원한테 전화를 하면 원하는 것을 잘 얻어내는 편이다. 성격이 내성적이다 보니, 오히려 전화를 하는 입장에서 더 위축이 되어있기 때문에 상담원분들께 화를 내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하는 일이 없다. 그녀는 늘 공손하고, 조곤조곤하게 말한다.


"아, 안녕하세요... 저, 그, 이거 때문에 전화를 드렸는데요.. 네.. 혹시 이거.. 이렇게 안될까요..? 제가 좀 급해서요.. 진짜 죄송해요.."


그녀가 만난 상담원분들이 친절했던 건지, 전화를 거는 입장에서 저렇게 조곤조곤하게 숙이고 들어가서 그런 건지 모르겠으나, 그녀가 만난 상담원분들은 모두 그녀를 열심히 도와주셨다. "원래는 안되지만... 저희가 더 빠른 전화번호 알려드릴게요. 이 쪽으로 전화해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하고 오히려 더 잘해주려고 하시는 분들도 계셨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최대한 저희가 빠르게 일 처리 도와드리겠습니다."하고 말하며 웃어주시는 분들도 계셨다. 동생은 전화를 끊고 나면 안도의 한숨을 쉬며 이렇게 말했다.


"막상 전화해보면 별 거 아니고 다들 친절하신데, 왜 이렇게 긴장이 되는 건지 모르겠어."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이상하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내가 큭큭거리자 그녀가 말을 이었다.


"아, 웃지 마. 솔직히 언니도 나 답답하지?"

"아니. 내가 상담원이면 너 같은 사람만 있었으면 좋겠는데."

"뭔 소리야. 나는 심각해 죽겠구."

"그만큼 말을 여러 번 생각하고 조심스럽게 내뱉는다는 거니까, 너무 안 좋게만 생각하지 마."


나는 그녀에게 위로 아닌 위로를 해주었다. 하지만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내 동생의 전화를 받으시는 상담원분들은 이런 모습을 아실지 모르겠다. 누군가는 상담원분들께 하는 전화에도, 대본을 써가면서 여러 번 읽어보고 전화를 드린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자신의 분풀이를 막 하기도 하고,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상담원의 잘못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불같이 화를 내기도 한다. 그들이 순전히 '을'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하지만 내 동생은, 상담원분들이 그녀에게 해코지를 한다든가 불친절하게 대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여러 번 생각하고 전화를 건다. 그분들을 '상담원'이 아닌 '대화의 상대방'으로 보기 때문에 그런 태도가 나오는 걸지도 모르겠다. (사실은 이것이 그분들을 대하는 기본 태도여야 하는 것이 아닌가.) 물론 모든 내성적인 사람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닐 테지만, 나는 그녀의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태도 덕에 그녀가 얻을 것도 많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가끔은 조금 답답할 때도 있지만. 내가 상담원이라면, 나는 내 동생 같은 사람들만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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