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가 묽어 한번도 헌혈을 하지 못했습니다
친구들은 누군가에게 피를 주고 빵과 우유를
받아오는데 아무것도 못하고 기다렸습니다
피를 나누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습니다
딱 제 한 몸 지탱하며 살짝 부족한 채로 살았습니다
혼자일 때는 그런대로 버틸 만했습니다
아이가 나오기 전후엔 빈혈이 심해졌습니다
혼자서는 버텼는데 둘이 되니 좀 부족했나 봅니다
그래도 우리는 피를 나눈 사이가 되었습니다
한여름 선물처럼 멀리서 복숭아가 도착했습니다
모양이 덜해도 맛이 좋은 것부터 최상품까지
온갖 복숭아 맛을 다 볼 수 있습니다
복숭아 달라는 아이들 성화에 껍질을 벗기고
뽀얀 속살을 한 점 두 점 떼어 그릇에 담는데
그 속이 아무리 봐도 붉은 핏빛입니다
어떤 나무는 흰꽃과 분홍꽃을 함께 피운다더니
뽀얀 속살 안에 저런 빛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아이가 보더니 코피 같다고 합니다
피가 부족했던 그때처럼 복숭아를 먹었습니다
오늘따라 더 달콤하고 새콤한데 꽃향까지 납니다
수혈받은 날처럼 속 편한 날이 될 것 같습니다
복숭아 속빛을 보았을 뿐인데
복숭아나무 꽃빛을 노래한
나희덕 시인의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가
떠올라 다시 읽어 봅니다
오는 봄엔 그 복숭아나무를 보러 가야겠습니다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너무도 여러 겹의 마음을 가진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나는 왠지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흰꽃과 분홍꽃을 나란히 피우고 서 있는 그 나무는 아마
사람이 앉지 못할 그늘을 가졌을 거라고
멀리로 멀리로만 지나쳤을 뿐입니다
흰꽃과 분홍꽃 사이에 수천의 빛깔이 있다는 것을
나는 그 나무를 보고 멀리서 알았습니다
눈부셔 눈부셔 알았습니다
피우고 싶은 꽃빛이 너무 많은 그 나무는
그래서 외로웠을 것이지만 외로운 줄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 여러 겹의 마음을 읽는 데 참 오래 걸렸습니다
흩어진 꽃잎들 어디 먼 데 닿았을 무렵
조금은 심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 복숭아나무 그늘에서
가만히 들었습니다 저녁이 오는 소리를
나희덕
철분이 풍부한 복숭아
수천의 빛깔 복숭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