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변 Mar 15. 2016

산재, 법정과 병원 사이

소송이 아니라 병원을 권하는 변호사의 마음 

우리나라에서는 1년에 약 2천명이 산업재해로 죽습니다( http://goo.gl/X9rd50  ). 하루에 5명 이상이 일하다 죽는 것이지요. 통계에 잡히지 않는 사망에는 이르지 않은 산재의 규모는 짐작조차 어려울 정도입니다. 공장에서 기계에 잘려 죽었다든지 하여 명백하게 신고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사망해야 그나마 산재처리가 쉬운데 그 숫자가 2천 명이나 되는 것입니다.


제조업 현장은 갈수록 위험해지고 있고, 비정규직의 확대로 인한 위험의 외주화도 심각합니다. 더 취약한 처지의 근로자가 더 위험한 일을 맡습니다. 안전관리는 허술하고 산재처리는 어렵습니다. 2013년 5월부터 2016년 2월 사이 현대중공업에서 사망한 근로자는 모두 비정규직이었습니다.( http://goo.gl/DNRvaX 그렇다고 정규직이면 안전한 것도 아닙니다. 당장 올해 초에도, 현대중공업에서는 현장확인을 나온 정규직 근로자가 깔려 죽었습니다. 


저는 서울에 사는 사무직이라 현장을 잘 모릅니다. 큰 공장이 '먹여살리는' 지역에서, 작업복을 입고 팔다리가 날아가거나 몸에 파이프가 꽂힌 채 대낮에 '회사 책임자'와 함께 병원에 간 환자가 의사 앞에서 '집에서 다쳤다'고 말하면 그런 것이 된다는 것을 말과 글로만 압니다. 


가끔 그런 사건을 맡기도 합니다. 현장을 아는 분들이 그런 업무는 도저히 그 시각에 끝났을 수가 없다고 하는데, 회사는 공장 문도 열지 않았다고 하고 출퇴근 기록이나 업무일지는 대충 쓰여 있고 근로자는 몸 어디가 날아갔는데 산재로 인정받지 못한 기록을 봅니다. 수없이 많은 산재가 소위 '공상처리' 내지 '합의'로 은폐됩니다.


산재 근로자를 지원하는 단체에서 일하는 노무사 님을 뵌 적이 있습니다. 이리 말씀하시더군요. 사람이 너무 원시적으로 죽어요. 그게 어디 찰과상을 입었다, 부딪혔다, 이런 게 아니에요. 안전망 하나를 안 쳐서 추락해서 퍽 죽고, 공정 순서 조절을 안 해서 유해가스가 발생해서 펑 터져서 죽고, 그래요.


상병 인정되나 업무상 인과관계 없으므로 불승인

제조업 현장만 문제가 아닙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계속 무리해서 일하고 있고 그러다가 몸과 마음을 다칩니다. 많이 일하는 것이 너무 당연하고, 죽음은 너무 가볍고, 목숨값은 너무 싸서(그 큰 사고를 낸 현대중공업이 낸 과태료는 10억원이었습니다) 이 모든 일이 자꾸 당연해집니다. 


사무직이나 서비스직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입니다. 일 주일에 팔십, 구십 시간을 일하고 종일 서 있고 밤에는 회식에서 술잔을 돌리고 VIP가 던진 명패를 맞고 반말과 욕설을 듣고 다음 고객에게 웃는 얼굴로 사탕을 건넵니다. 몸에도 마음에도 병이 듭니다. 회사 화장실에서 죽고 출퇴근 버스에서 죽고 회식 후 귀가길에 죽고 주말에 그냥 죽습니다. 산 사람은 병원에 갑니다. 근로복지공단에 산재신청 등을 하지만, 가장 흔히 나오는 답은 '상병 인정되나 업무상 인과관계 없으므로 불승인'입니다.


이 결론을 참을 수 없어 소송을 원하는 근로자나 유족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산재불승인은 법적으로는 근로복지공단의 요양불승인처분이라고 하고, 이에 불복하면 회사가 아니라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하는 행정소송을 합니다.) 많은 경우 저는 소송을 말립니다. 소송은 길고 고통스럽고 돈도 들고, 결국 지면 상처가 더 크기 때문입니다. 


기록을 보면 대충 '각이 나옵'니다. 어쩔 수 없어요. 도시인 서울에서 개인법률사무소를 운영하는 저 같은 변호사가 만나는 분들은 지지해 줄 노조가 없는 분들이 대부분이고, 그 재해의 내용도 제조업보다는 사무나 서비스업의 과로나 업무환경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습니다. "소송하실 이 돈으로 병원을 다니세요. 억울하신 마음은 정말 아는데, 안 될 수도 있어요. 안 되면 더 억울해요." 그렇게 말을 합니다. 변호사가, 법적 싸움에, 변호사한테 돈 쓰지 말라는 말을 합니다. 법정이 아니라 병원이 당신에게 최선이라고 말합니다. 



법정에서 부당하다고 말하는 용기를 가지는 것에는 물론 큰 의미가 있습니다. 소송을 하는 분들은 보통 안 되더라도 하는 데 까지 해 보기라도 하겠다, 나는 이미 끝났지만 또 이런 일은 없어야 한다고 주장이라도 하고 싶다, 이런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변호사는 법정을 가는데, 열심히 해도 자주 집니다. 입증부터가 어렵습니다. 출퇴근 기록에는 이렇게 쓰여 있지만 사실은 앞뒤로 얼마나 더 많은 일을 했는지, 얼마나 고약한 말을 들어야 했는지, 회사 상황 상 서류상의 업무분장과 실제 맡은 일이 어떻게 달랐는지 말해도 인정받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설령 날마다 7시에 출근하고 12시에 퇴근했다고 입증해도, 이렇게 이상한 일을 업무랍시고 시키면서 괴롭혔다고 입증해도, 이렇게 자주 회식을 하고 이렇게 사람을 들들 볶았다고 입증해도, 그 정도로는 일하다 다치거나 죽었다고 볼 수는 없다는 판결문을 받습니다. 


그러니 모든 사람이 그렇게 법원까지 가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저는 자꾸 법정이 아니라 병원으로 가시라고, 지금 회사를 더 못 다니실 것 같으면 가진 돈을 일단 생활비로 쓰셔야 하지 않냐고 말합니다. 한 번은 너무 열심히 말리다가 내담자로부터 "변호사님은 자신이 없는 것 같아요."라는 말을 들은 적도 있습니다. "현실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저는 그저 이리 답했습니다.


사람의 자원은 돈과 정신 모두 한정적입니다. 억울하지만 나를 치유해 나가는 것과 법원을 통해 끝까지 싸워 보는 것 모두 무게의 경중을 가늠할 수 없는 용기입니다. 한 사람이 가진 용기의 크기와 방향을 쉽게 가늠할 수 없는 저는 모든 분들에게 투쟁하시라고, 싸우시라고, 끝까지 하면 이길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럴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니까요. 


그러나 이런 현실이 당연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이 세상이 당연해서는 안 됩니다.


모두가 같은 용기를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아직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도, 나는 다리 한 번 부러진 적 없고 종이에 손가락 한 번 베인 적 없어도, 많은 사람들이 일하다 죽고 다치고 있고 그 죽음이 결코 당연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알고, 말하는 용기는, 어쩌면 우리가 함께 가질 수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어떠한 목숨도 가볍지 않고 어떠한 진지한 싸움도 억지가 아닙니다. 어떠한 분노에든 나름의 이유가 있고 버티는 것은 고집이 아니라 용기입니다. 저는 이렇게 함께 믿으며 살아가는 것이 연대라고 믿고, 이렇게 소리내어 말할 수 있는 것이 자유라고 믿고, 때로 그런 용기를 선택하는 분들의 옆에, 질 각오를 하고 섭니다. 

작가의 이전글 재판은 시간이 걸리는 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