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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변 Mar 15. 2016

재판은 시간이 걸리는 일

성숙에 필요한 시간

소송과 같은 법적 절차는 느리다. 나는 의뢰인들에게 항상 "지금부터는 한 달이 하루"라고 말을 하지만, 보통 법적으로 해결을 하기로 마음먹는 단계에 이른 사람들은 이미 오랫동안 자신의 문제를 거듭 생각하고 내/외면의 갈등을 거친 다음이기 때문에 대개 무척 초조해 하고, 다시 또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한다.


그러므로 가끔 변호사나 법원 직원들을 괴롭히게 되는데(달리 적절한 표현이 없네...), 나는 갈등상황에 처한 사람을 지원하는 역할을 맡은 사람들이 해야 하는 중요한 일 중 하나가 그런 당사자의 조급함에 휩쓸리지 말고, "이 과정에서는 시간이 다르게 흐른다. 당장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빨리 끝난다고 좋은 것도 아니다"는 사실을 당사자에게 납득시켜 결과적으로 당사자가 그 기간을 덜 괴롭게 여기고, 가능하면 그 기간이 갈등을 종결하는 과정이 되도록 돕는 데 있다 생각한다. 변호사 뿐 아니라 사회복지사, 상담가 등 갈등상황에 있는 당사자를 마주하는 사람들이라면 마찬가지일 것이다.  



당신의 문제가 빨리 대충대충 진행되기를 바라나요, 아니면 시간이 걸려도 법원이 제대로 보아 주기를 바라나요?

특히 소송은 보통 '최후의 기회'이다. 시효와 제소기간이 있으니 갈등을 마냥 방치할 수 없어 결단을 필요로 하고, 확정되고 나면 집행력이라는 강력한 권리가 생겨나고, 기판력이 있으니 보통 번복될 수도 없다. 돈도 많이 들고 정신적으로도 이만저만 큰 일이 아니다. "이만한 무게를 가진 엄중한 절차에서 당신의 문제가 빨리 대충대충 진행되기를 바라나요, 아니면 시간이 걸려도 법원이 제대로 보아 주기를 바라나요?"로 질문을 바꾸어 던지면, 전자를 택하는 사람은 아마 많지 않을 것이다.


몇 년 전, 이삼일 꼴로 나에게 같은 질문을 반복하고 자신의 고충을 계속하여 토로하는 외국인 의뢰인이 있다. 어려운 사정은 이해를 한다. 한국인이 아니니 더 답답했을 것이다. 물론 나는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사건에 특별히 이례적으로 느리게 진행된 부분도 없었고, 변호사가 사건 내용이 아니라 속도 면에서 어떻게 더 손을 댈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경우도 아니었다. 오히려 전략적으로 따지자면 내가 시간을 끌어 입증기회를 더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사안이었다. 


처음에 그는 나에게 직접 연락을 했다. 하루에 한 번을 연락한들 상황이 바뀌지 않았으니 당연히 나의 답은 달라지지 않았다. 지금 어느 단계에 있고 앞으로 얼마나 시간이 걸릴 것인지 설명을 하고 또 했다. 그 다음에는 '아는 한국인 형'이 전화를 했다. 그 다음에는 드디어(?) '아는 선교사'가 전화를 했다.


"이걸로 제가 지금 같은 답을 열 번째 하고 있는 겁니다."

내가 말했다(나는 실제로 이 의뢰인이 얼마나 자주 나에게 푸념을 하는지 중간부터 기록하기 시작했고, 그 날이 열 번째였다.)


선교사님이 말씀하셨다.

"ㅇㅇ씨가 상황이 어려워서 많이 초조해하세요. 그래서 제가 이게 우리나라의 나쁜 부분인데, 빨리빨리 안 되고 이런 게 시간이 걸린다. 한국인인 내가 봐도 나쁜데, 어쩔 수 없다고..."


나는 그 지점에서 일면식도 없는 선교사님께 정색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빨리 된다고 좋은 게 아니에요. 제일 무거운 절차니까 그만큼 느린 겁니다.

"선생님, 그건 한국의 나쁜 부분이 아닙니다. 그렇게 설명하시면 안 됩니다. 소송은 지금 ㅇㅇ씨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이고, 우리사회에서 가장 신중하고 엄중한 절차예요. 이게 ㅇㅇ씨가 원하는 만큼 빨리 진행되지 않는 점을 무작정 '나쁜 것'이라는 식으로 설명하시면 정말 곤란합니다. 빨리 된다고 좋은 게 아니에요. 제일 무거운 절차니까 그만큼 느린 겁니다. 현장에서 대응하는 선교사님께서 제일 고생이 많으시고 난처한 일도 많으시겠지만, 소송에 대해서는 왜 느리게 느껴지고 얼마나 걸리는지 정확히 설명을 해 주셔야지, 마치 빨리 안 되는 것이 우리나라 사법절차의 결함인 것처럼 말씀하시지 말아 주세요. 결국 이후 과정에 대한 불신과 다음 사람들의 부담만 커집니다."


그 선교사님께서 사례관리를 하고 계신 사건도 아니었는데 너무 단호하게 정색을 하여 전화를 끊고 뒷맛이 썩 좋지 않았다. 그렇지만 현장에 계신 분이고, 사회복지사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분명 임상 전문가이실 분이 외국인 내담자에게 지금 상황을 "우리나라의 나쁜 부분"이라 했다고 너무 자연스럽게 말씀하시니 나도 나대로 앞으로는 안 그러셨으면 좋겠다는 말을 아니 할 수가 없었다.


솔직히, 실제로 사건 진행이 느린 이유가 사법판단절차가 엄중하고 진중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송사는 급증하여 민사소송만도 일 년에 사백만 건이 넘는다고 한다. 형사고소도 엄청나게 많고 가사며 행정이며 법원마다 사건이 넘쳐난다. 인력과 공간이 턱없이 부족하여 법정이 없어 재판기일이 늦게 잡히기도 한다. 재판이 지연되는 일은 허다하다. 지연되지 않고 제 시간에 진행되면 이상할 지경이다. 5시 40분 재판에 출석하러 법원에 갔더니 아직 3시 사건을 하고 있었다든가, 10시 50분 사건을 (점심시간인) 12시 45분에 들어간다든가 하는 일도 있다. 사건당사자들과 변호사 뿐 아니라 판사를 비롯한 모든 법원공무원들이 일상적으로 초과근무를 한다. 기타 절차에 비효율적인 부분도 있을 것이고, 아직 부족한 내가 모르는 이런저런 사정이 있을 것이다. 


그래도 법적 절차가 느린 것이, 정확히 말하자면 당사자가 원하는 만큼 빠르지 않은 것이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아니다. "우리 제도가 잘못되어 요 모양 요 꼴이니 기다리세요", 라는 말과 "하나하나의 사건을 제대로 보기 위한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하니 기다리세요", 라는 말은 전혀 다르다고 생각한다. 법원이 100배로 늘고 판사가 100배로 늘어도 여전히 법적 절차에는 일정한 숙성과 검토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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