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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aMya Nov 30. 2021

 코펜하겐의 문화의 밤

코펜하겐의 10월은 계절적으로는 가을이라지만 이미 겨울이나 다름없다. 낮의 길이는 이미 한참 줄었고, 기온도 뚝 떨어졌고, 추적추적 비가 매일 같이 내리는, 우울하기 적합한 그런 계절이 시작되는 시기가 바로 10월이다. 이곳에서의 10월은 단풍이 들기도 전에 낙엽이 지는 참으로 쓸쓸한 계절이다. 그렇게 쓸쓸한 10월에 우울해하지 말고 움츠리지 말고, 밖으로 나와 추위도 비도 깜깜한 하늘도 즐겁게 맞으라고 (이건 내 생각이다) 코펜하겐 시에서 개최하는 행사가 있다. 매년 10월 3번째 주일 금요일에 열리는 ‘문화의 밤’이다. 이 행사는 1993년부터 시작되어 올해까지 27번째 개최되었고, 현재 250여 개의 문화 기관이 참여하고 있다. 문화의 밤에는 95KR, 우리 돈으로 만칠 천 원 정도의 문화 패스를 구입해서 코펜하겐 시의 극장, 교회, 도서관, 박물관, 미술관, 국회의사당 등의 공간을 마음대로 관람할 수 있다. 또한 배지 형태의 문화 패스를 소지하면 오후 4시부터 다음날 새벽 4시까지 모든 대중교통을 공짜로 이용할 수 있다. 12세 이하 아동은 성인을 동반할 경우 모든 행사에 무료로 참석할 수 있다. 

덴마크에 왔던 첫 해에 아직 여행객 같은 기분으로 문화의 밤 패스 배지를 달고 나들이를 나섰었다. 날은 추웠지만 과연 날씨쯤은 거뜬히 견디는 사람들답게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배지를 달고 도시를 활보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운하를 잇는 작은 다리들은 화려하게 조명을 켜고 비를 맞으며 걷는 시민들을 응원해 주었고, 핫도그를 파는 트럭들은 소시지 굽는 냄새를 진동하며 행인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문을 활짝 연 박물관에 들어가 역사를 맛보고, 국립 미술관에서 예술을 훑어보고, 커다란 군함에 올라타 국방의 위험을 체험했고, 문이 열린 교회 안에서 새어 나오는 성가대의 합창에 숙연해지는 경험을 했다. 어린이들을 위해 준비된 갖가지 워크숍을 따라다니며 나무 그네도 직접 만들고, 모자 장식도 만들어 보았다. 값비싼 대중교통비 걱정 없이 수시로 버스에 올랐다 내리고, 지하철을 타고 추위를 달랬다. 자정이 넘도록 그렇게 신나게 돌아다니고 나니 막 우울하려고 했던 덴마크의 첫 번째 겨우살이가 조금은 경쾌해졌다. 

작년에는 코로나로 인해 온라인 문화의 밤 행사를 소규모로 진행했지만, 올 9월 10일 덴마크 정부가 방역 조치를 전면 해제하면서 문화의 밤 행사도 정상적으로 개최될 수 있었다. 예상대로 비가 오다 말다 하는 날씨였지만 우산도 받쳐들지 않은 시민들은 오후부터 문화를 즐기기 위해 시내를 가득 메웠다. 올해는 다리가 조금 덜 피곤한 극장 관람을 계획하고 우리도 코펜하겐 사람들의 무리에 합류했다. 왕립 연극 극장, 오페라 극장, 발레 극장을 돌아가며 이번 시즌 주요 공연의 하이라이트를 관람했다. 연극 무대에서는 배우들의 기가 막힌 노래 솜씨로 David Bowie의 주옥 같은 노래를 감상했다. 라이브로 건반과 색소폰 반주를 곁들어 듣는 데이비드 보위의 음악은 짧은 순간이었지만 잊고 있었던 어떤 젊었던 날들을 떠올리게 해 주었기에, 코 앞에서 진심을 다해 노래하는 배우들의 모습에 감사가 우러러 나오는 시간이었다. 감동이 아무래도 가시지 않아 데이비드 보위의 생을 다루는 LAZARUS라는 공연이 시작되면 반드시 보러 가야겠다 다짐을 했다. 오페라 극장에서는 ‘유쾌한 미망인’의 한 장면의 공연을 볼 수 있었다. 오케스트라까지 모두 출근하여 늦은 시간까지 시민들을 위해 열심을 다해 연주를 해주었다. 덴마크 실정에 맞게 각색된 ‘유쾌한 미망인’은 다소 파격적이었지만 테너와 소프라노의 아름다운 이중창은 역시나 아름다웠다. 극장 로비에는 보기 힘든 하프 공연도 마련되어 있었다. 조명이 아름다운 오페라하우스 로비에서 듣는 하프 선율은 평온했고, 감미로워, 뭔가 대단한 대접을 받는 기분마저 들었다. 발레 극장에는 극장의 수석 무용수들이 모두 나와 여러 발레 공연의 주요 장면을 갈라 콘서트 형식으로 선보였고, 마지막으로 발레 나폴리의 파티 장면 전체를 관람할 수 있었다. 민중 발레 나폴리는 가벼움과 자연스러운 유쾌함 같은 것이 안무에 녹아있어, 어수선하고 부산하지만 웃음이 나오는 나폴리의 어느 광장 한가운데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해 주었다. 하루 저녁을 꼬박 공연장에서 보내고 나니 세상이 살만한 것도 같고, 손 붙들고 같이 걷는 내 가족이 더 예쁘고, 이번 겨울도 우울을 이길 힘이 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덴마크는 유럽에서 물가로 1등을 다투는 나라다. 3년 전 덴마크에 입성하고, 하나에 천오백 원 하는 오이를 붙들고 앞날이 막막했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비싼 나라 덴마크이지만, 박물관, 미술관 입장료는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해 높지 않다. 영국처럼 무료는 아니지만, 모든 시민이 마음만 먹으면 관람할 만하다. 공연 비 역시 어마어마한 인건비에 비하면 과한 정도는 아니다. 문화와 예술을 보다 많은 사람들이 누릴 수 있도록 국가의 지원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코펜하겐의 문학의 밤 역시 정부와 시의 지원과 코펜하겐 교통 공사의 지원을 받아 진행되는 행사이다. 1년에 한 번이지만 오페라 극장의 좋은 자리에 앉아 오페라의 한 자락을 감상하고, 수석 무용수의 공연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는 것은 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만칠천원짜리 배지를 달고 코펜하겐의 시민들과 나란히 비를 맞으며 문화에 푹 빠질 수 있었으니 우리도 운이 참 좋은 하루였다. 

집이 없어도, 차가 없어도 가끔 연극을 보고, 오페라도 보고, 발레도 보고, 미술관에서 영혼을 배 불릴 수 있다면 우리는 조금 덜 비관하고, 덜 절망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어디에나 이렇게 문화가 평등하고 풍성한 밤이 넘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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