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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aMya Sep 01. 2018

여덟 살 거인

아직 학교 소식은 없고, 날씨는 제법 쌀쌀하고, 종이 상자로 가면도 만들고, 수십 장의 그림을 그리고, 먹는 슬라임도 만들고, 못 먹는 슬라임도 만들고, 좋아하는 꼬마 유투버들의 방송을 시청하고, 트와이스 노래에 맞추어 춤을 추어도 시아의 하루가 남는다.

학교보다 체조를 먼저 해볼까?

동네 산책하다 덤블링을 하는 여자 아이들을 고개를 쏙 내밀고 쳐다보는 시아를 보고 생각했다.

덴마크어 구글 번역을 돌려가며 체조 학원 사이트에 들어가 연락처를 찾아 연락을 해보니, 이미 방학 전에 예약한 아이들로 꽉 차 더 이상 학생을 받을 수 없다고 했다. 다음 학기 혹은 내년에는 자리가 날 수 있으니 등록은 해두라고 해서 등록을 하고 대기자 34번을 받았다.

"시아야... 어떡하지?... 체조 학원에 자리가 없어서 이번에는 못 할 것 같아.."

시아가 시무룩하다.

"뭐, 괜찮아, 집에서 스트레칭하고 연습하고 있다가 자리 있다고 하면 가자."

"응...."

여덟 살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일을 당장은 할 수 없게 되었다.

체조를 왜 미리 생각하지 못했을까? 하루라도 빨리 연락했으면 대기자 앞 번호라도 받을 수 있지 않았을까? 

또 미안했고, 속상했다.


아파트 옆에 동그란 건물 안에 불이 켜져 있다. 뭐라고 이름이 쓰여 있는데 뭔지 모르겠어서 가까이 가서 보니 아이스링크다. 시아 또래로 보이는 남자아이들이 아이스하키 연습을 하고 있다.

어쩜 저기서 피겨스케이팅을 가르치지 않을까?

이태리에 있을 때도 스케이트 배우고 싶어 했는데, 집에서 너무 멀어서 엄두를 못 냈었다.

다음날 아이들 학교 끝날 시간쯤 스케이트장에 다시 찾아갔다.

어디로 갈지 모르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우리를 보고 어느 여성분이 먼저 인사를 하셨다.

스케이트를 가르치고 싶은데, 가능한지 물었다.

일주일에 두 번 수업하는 반과 한 번 수업하는 반이 있는데, 두 번 하는 반에는 한 두 자리 정도가 남았고, 한번 하는 반에는 자리가 좀 있다고 했다.

시아 또래로 보이는 아이들이 스케이트를 갈아 신고 있다.

"시아야, 어때?"

"음... 배우고 싶은데... 나는 말을 못 하니까... 체조는 말을 몰라도 내가 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스케이트는 아직 못하니까... 잘 몰겠는데... 지금 얘기해줘야지 할 수 있어?"

"아니, 그런 건 아니야. 엄마가 며칠 생각해보고 연락한다고 할게."

연락처를 받아 집으로 왔다.

"엄마는 내가 스케이트 배우면 좋을 것 같아?"

"응, 배우는 건 좋은 거니까, 시아 원래 스케이트 배우고 싶어 했잖아. 김연아 언니처럼 뱅글뱅글 도는 것도 해보고 싶다고 했고. 배우면 재미있을 것 같은데..."

"그렇지. 나도 그럴 것 같은데.. 말을 몰라서..."

"선생님이 몸으로 보여주시니까 따라 하면 할 수 있지 않을까? 엄마가 밖에서 보고 있다가 너무 어려우면 선생님한테 영어로 얘기해달라고 해서 시아한테 얘기해 줄게. 어때?"

"응, 해볼래. 해보고 싶어."

바로 메일을 보내고, 답변으로 받은 링크를 따라 들어가 또다시 구글 번역기를 돌려가며 일주일에 두 번 수업하는 반에 접수를 하고, 수강료를 지불했다.

수업 첫날은 시아에게 맞는 스케이트를 찾아야 하니 조금 일찍 오라고 연락이 왔다.

조금 일찍 가서 하얀 스케이트를 받았다.

하얀 스케이트가 마음에 드는지 시아가 웃는다.

엄마도 서툴고 아빠도 서툴러서 한참만에 겨우 스케이트를 신고, 빌려준 헬멧도 쓰고 아이스링크로 들어갔다.

춥다.

아.. 여기는 춥구나.

시아 만한 여자 아이들이 열명쯤, 시아보다 어린것 같은 아이들이 두 명쯤 있었다.

잘 타는 아이들도 더러 있고, 못 타는 아이들도 몇 있지만, 시아처럼 제대로 된 스케이트를 처음 신는 아이들은 없는 것 같다.

들어가자마자 크게 엉덩방아를 한번 찧은 시아가 우리를 돌아본다.

우리는 철렁했지만, 크게 웃는 얼굴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이 시아 손을 잡아 일으켜 주시고, 인사를 나누셨다.

시아가 덴마크어와 영어를 못하고 이탈리아어와 한국어를 한다고 들으셨다고 하면서, 유감스럽게도 선생님은 이탈리아어도 한국어도 못한다고 하시며 웃으셨다.

선생님을 보고 잘 따라 하면 금방 배울 거라고 하셨다.

시아에게 짧게 선생님 말씀을 전하고 다시 크게 웃으며 격려했다.

시아가 천천히 살살 빙판 위를 걷는 걸 보고 링크 위 관중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가만히 앉아 있기엔 너무 춥다. 집에 가서 두꺼운 옷을 가져와야 하는 생각이 잠시 들기도 했지만, 첫 수업이니 만큼 오늘은 우리가 시아를 위해 추위쯤은 견디기로 했다.

뒤뚱뒤뚱 거리기도 하고, 팔을 휘저어 가며 겨우 균형을 잡기도 했지만 시아는 곧잘 선생님의 동작을 따라 했다.

다른 아이들도 시아가 궁금한지 가까이 오기도 하고 시아가 넘어지면 일으켜 주기도 했다.

서너 번 넘어졌지만, 조금 자신감이 생겼는지 이내 웃으면서 일어나 우리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스케이트를 신고 얼음 땡 같은 놀이를 할 때도 천천히 앞으로 가기도 하고 잘 멈추어 서기도 했다.

선생님 곁에 서서 선생님 팔을 보고, 다리를 보고 자세를 따라 하느라 한 시간 내내 표정이 진지하다.

수업이 끝나고 나오는 시아가 숨을 헉헉 내쉰다. 두 볼이 발갛다.

"진짜 재밌는데, 그런데 진짜 힘들어. 하하. 어려운데, 이제 쪼끔 어떻게 하는지 알았어."

말이 안 통하는 시아에게 선생님은 엄지 손가락을 들어 올려 보여주셨다.


두 번째 수업을 하는 날은 스케이트를 완전히 대여받았다. 이제 수업이 끝나면 집에 가지고 갔다가 챙겨 와야 한다.

지난주에 신었던 하얀 스케이트를 품에 안고 신이 났다.

"내가 신어볼게. 여기 있는 친구들은 다 혼자 하네."

결국은 매듭은 내가 묶어 주었지만 그래도 열심히 신었다.

이미 한번 본 아이들, 한번 본 선생님이지만, 인사말도 모르는 시아는 그냥 수줍게 한번 웃고 아이스링크로 들어갔다.

두 번째 수업하는 날은 선생님이 한 분 더 오셔서 모두 세분이다.

아이들을 세 그룹으로 나누어 수업을 한다.

지난번 수업과는 다르게 처음부터 뭔가 말로 많이 설명을 하신다.

시아는 아이들과 조금 떨어져, 못 알아듣는 말을 하는 선생님을 뚫어져라 보고 있다.

아이들은 설명을 듣고 동작을 시작하지만 시아는 몸으로 보여주신 다음에야 동작이 가능하니, 아이들보다 조금씩 늦게 동작 연습을 한다.

혹시 시아가 힘들지 않을까? 혼자 말을 못 알아들어 속상하지 않을까?

멀리 있는 시아 표정을 자꾸만 살피게 된다.

아이들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시아가 안타깝다. 언어를 못하는데 운동을 배우자고 하는 게 아니었나... 

아이들은 이미 저 앞으로 갔는데 시아는 제 자리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가만히 서 있기도 했다. 

어쩌면... 오늘 수업이 끝나면 시아가 못하겠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시아는 가끔씩 당황하거나 망연한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여전히 진지하다.

내 마음이 조금씩 굳어갈즘 시아가 한걸음 아이들 쪽으로 다가선다. 

조금 긴 설명을 하실 때는 선생님 쪽으로 바짝 다가가 선생님 얼굴을 빤히 보고,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기도 한다.

조금씩 시아의 얼굴이 편안해지고, 선생님과 아이들을 번갈아 보며 동작을 따라 한다.

아이스 링크를 크게 돌 때는 조금 속도를 내며 아이들을 따라잡아 보기도 한다.

처음 배우는 회전을 시도할 때는 혼자 한쪽으로 떨어져 조금씩 조금씩 돌아보다가 넘어지지 않고도 약간의 회전이 가능하다는 확신이 들 때쯤 다시 아이들 곁으로 갔다.

잘 넘어지는 법을 배울 때는 앞으로 넘어지는지 뒤로 넘어지는지 설명을 못 알아들었지만, 아이들이 다 넘어진 다음에 그대로 따라서 혼자 넘어졌다.

시아는 스케이트를 배우고 있지만 사실 말이 통하지 않을 때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고 있었다. 


한 시간 수업을 받고 링크 밖으로 나오는 시아를 만나러 갔다.

시아가 웃는다.

"엄마, 나 죽고 있어. (죽을 것 같아) 진짜 힘들어. 오늘은 더 힘들어. 그래도 재밌어."

"재밌어? 어렵지는 않았어?"

"어려웠는데, 그래도 괜찮아.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는데, 그래도 선생님이랑 친구들 보고 따라 하면 되니까, 괜찮아. 그리고 덴마크 말도 자꾸만 들으면 나도 배우겠지."

"친구들은 다 덴마크 말로 얘기하는데 시아는 괜찮아?"

"괜찮아. 나는 아직 말을 못 하니까, 나랑 친구하고 싶어도 못하지. 나중에 내가 배운 다음에 친구 하면 돼. 스케이트가 진짜 재밌네. 다리가 좀 아프지만"



다행이다. 나보다 마음이 건강한 너라서. 

나만 모르는 말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 있는 것, 많이 겪었지만 한 번도 쉬운 적이 없었고, 한 번도 괜찮은 적이 없었다.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모르는 말인데, 온몸의 모든 기운을 귀에 모아 더 열심히 들으면 알아듣기라도 할 것처럼 애쓰며 듣느라 피곤했다.

나만 모르는 일로 웃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어정쩡하게 반쯤 웃는 표정을 짓고 있는 스스로가 한심한 기분이 들기도 했었다.

그런데 시아는 좀 다르다. 여덟 살이라 그런가... 시아라 그런가... 

재밌는 일, 하고 싶은 일을 위해서는 부끄러움이랑 불편함도 다 넘겨버릴 줄 아는 건지..

거친 오늘도 내일이면 어제가 되어버린다는 진리를 몸으로 깨우친 것인지..


뜨끈한 핫초코에 커다란 마시멜로를 동동 띄워 거인 시아에게 대접했다.

"시아가 참 멋있다."

"스케이트? 한 번도 안 넘어질 수 있었는데, 오늘 한번 넘어졌어. 그래도 괜찮아. 나는 아직 배우고 있으니까. 엄마도 배우고 싶어?"


"우리도 배울까? 시아가 좋아하니까 다 같이 스케이트 타면 어때?"

황가수가 그런다.

"우리는 언어를 먼저 배우면 어때?" ㅎ

내가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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