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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aMya Feb 01. 2019

코펜하겐에서 만난 평화

우리 동네에서 핸드볼 세계 선수권 대회가 열렸다.

이번 대회는 덴마크와 독일 여러 도시에서 치러졌는데, 코펜하겐의 경기장은 어쩌다 보니 우리 집 옆이다.

북유럽 사람들은 핸드볼을 좋아한다고 한다.

날이 추워 밖에 나가지 못하니 실내 스포츠가 발달한 게 아닌가 라고, 혼자 생각해 봤다.

세상 모든 스포츠 동향에 밝은 황가수가 우리나라 선수들도 참가하는데 초반의 경기는 독일에서 치르기 때문에 직접 응원하기 어렵다고 아쉬워했다.

옛날에는 핸드볼 아주 잘했다는 우리나라 남자 국가 대표팀의 성적은 부진했고, 결국 순위 결정전만을 남겨 두게 되었고, 그 순위 결정전은 하필 우리 집 옆에서 하기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우리 선수들의 성적이 부진한 건 아주 속상한 일이었지만, 집에서 2분 정도 걸어 나가 우리나라 국가 대표 선수를 볼 수 있다니, 속으로 좋을 뻔하였다.

단일팀이라고 했다.


단일팀은 처음이다.

단일팀을 현장에서 응원하는 기분은 어떤 걸까?  궁금했었다. TV로 집에서 응원하는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겠지만, 극장에 가는 것처럼, 미술관에 가는 것처럼. 현장은 뭔가 다르겠지.


"대~항밍국! (대한민국)이렇게 하면 되는 거지?"

"아니, 오늘은 코리아, 코리아 이렇게 하는 날이야."

"왜? 대항밍국이 아니야?!"

"북한에서 온 선수들이랑 우리나라 선수들이 같이 한 팀 이래. 그러니까 오늘은 코리아라고 응원하는 거야."

"아.... 정말?!!! 신기하겠다. 북한에서 온 사람은 한 번도 못 봤는데. 그럼 '코리아 코리아' 해야겠네. 대항밍국만 하면 북한에서 온 사람들은 기분 안 좋겠지. 알았어. 코리아 코리아 이렇게 할게."

"엄마도 북한 선수들이랑 우리나라 선수들이랑 같이 운동하는 거 직접 보는 건 처음이야. 신기할 것 같아."

"원래는 북한이랑 친구가 아니었는데, 이렇게 운동도 하고, 산에... 어디랬지? 그때 산에 갔잖아?"

"백두산"

"응, 맞아. 백두산, 그런데도 같이 가고 그러면 쪼끔씩 친구가 되겠지. 그치? 그러니까 대항밍국 오늘 못해도 그래도 좋은 거야. 그치?"

"응, 맞아. 아주 좋은 거야."


거기다 한일전이다.

한일전이라 뭐가 어떻다는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할인전은 다르다. 다른 상대와는 다르다.

세련되지 않은 국가관이고, 논리에 근거하지 않은 얕은 감정이지만, 나라로서의 일본은 지고 싶지 않은 상대이다.

아주 좋아하는 일본 친구도 있고, 존경하는 일본 어른들도 있지만, 그래도, 내 마음속에 일본은 다른 나라와는 다른 '일본'이다.


순위가 낮은 팀들의 순위 결정전이고, 너무 먼 나라 선수들의 경기라 보러 오는 사람들이 없을 줄 알았는데, 관중이 적지 않다.

이어 있을 다른 팀의 경기를 보러 일찍 나온 사람들이 대부분이겠지만, 그래도 한산하지 않으니 좋다.

큰 소리로 음악이 나오고, 과장된 억양으로 흥을 돋우는 장내 사회자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다.

흡사 농구 경기장 같다. 핸드볼 경기 분위기가 이렇구나.


태극기도 못 챙겨 온 우리는 어디서 한반도기를 얻을 수 없을까 하고 주위를 살폈다.

우리 앉은자리 조금 앞에 자리를 잡은 우리 팀 스태프들이 보였다.

얼른 내려가 인사를 하고, 한반도기를 얻을 수 있는지 물었다.

한반도기에 기다란 응원 풍선까지 넉넉히 챙겨주셨다.

가방에서 한 번도 기를 꺼내 건네주신 분은 북측 스탭이신 것 같다.

몇 개 필요한지 물으시는 억양이 조금 달랐다.

그 억양에 잠시 마음이 빵 터질 것처럼.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감사 인사를 하고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선수들이 나오고, 태극기 대신 한반도기가 올라가고, 애국가 대신 아리랑이 경기장이 장내를 가득 채웠다.

평창 동계 올림픽을 직접 보고 느낀 사람들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 되었을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처음이다.

코펜하겐에서. 우리 집 옆 원형 경기장에서 한반도기를 손에 들고 아리랑을 흥얼거리는 오늘은. 내게 예고도 없이 찾아온 평화다.


경기가 시작되고, 속도감 넘치는 핸드볼 경기인만큼 점수를 내어줬다 얻어냈다 하기를 빠르게 반복하면서 속이 타들어가다 짜릿하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한반도기를 연신 흔들고, 코리아 코리아를 외치고, 골을 넣을 때마다 환호를 했다.


"엄마, 그런데, 북한 선수가 누구야?"

"글쎄. 엄마도 잘 모르겠어."

"똑같이 생겼네. 그치? 우리나라 오빠들이랑 북한 오빠들이랑 다 똑같이 생겼구나."

"응, 그럼 똑같지. 원래 같은 나라니까."


몸을 부딪히며 땀을 흘리며 뛰고 있으니까 정말 모르겠다.

똑같다.

그렇게 똑같은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땀을 흘리며 몸을 부딪히며 같은 방향을 향해 달려가는 날이 오면, 서로를 바라보기도 하고, 서로의 손을 잡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화해하기도 하는. 서로가 서로에게 아무렇지도 않은 그런 날이 오면...


대사관에서 나오신 분들 포함 열명 정도 되는 우리 관중은, 뛰는 선수들 만큼 뜨겁게 응원을 했고, 우리 선수들은 극적인 첫 승을 거두었다.

경기장을 빠져나가는 우리 선수들의 뒷모습이 안 보일 때까지 한참 한참 박수를 쳤다.


종일 기분이 좋았고 잠자리에 누워서도 기분이 좋았다.

이겨서 좋은 건지, 한일전을 이겨서 좋은 건지, 단일팀이 승리를 해서 좋은 건지. 무엇이 우리를 그만큼 기쁘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셋이 종일 기분 좋았다.


다음날 사우디아라비아와의 마지막 경기에도 응원을 나섰다.

의리. 뭐 그런 마음이었다.

여기까지 와서 고생하고, 한일전 승리하느라 힘들었을 선수들을 향한 의리.

어제 받은 한반도기를 챙겨 들고 경기장으로 갔다.


어제보다 더 힘을 다해 응원했지만, 아쉽게 패했다.

이기지 못했으니 아쉽고, 속이 쓰렸지만, 그래도 손바닥이 아프게 박수를 쳤다.


"오늘은 못 이겨서 선수들이 슬프겠다. 그래도 괜찮은데, 힘내서 했으니까, 꼭 이길 수는 없잖아. 그래도 나는 코리아 핸드볼을 봐서 너무 좋았어. 다음에도 또 북한하고 같이 하면 좋겠다. 이제 맨날 같이 하면 더 잘하게 될 것 같은데."

"그렇지? 맨날 같이하면 더 잘하게 되겠지."

"이번에 만났으니까 다음에 또 만나면 친구 되겠지. 나도 북한 친구 있으면 좋겠다. 그러면 재밌겠다."

"그러게. 그래도 재밌겠다."


선수들에게 죄송하지만 나에게 핸드볼은 영화 '우리 생에 최고의 순간'이 전부였다.

이틀간의 특별한 경험으로 작은 경기장에서 빠르게 골이 터지는 핸드볼이 얼마나 통쾌하고 짜릿한 스포츠인지 배웠다.

우리 집 앞으로 평화를 들고 찾아와 준 선수들, 한 일전을 이겨주고, 비록 패했지만 사우디 전에서도 끝까지 애써주었던 선수들이 대단하고 고맙다.


평화는 마음만 먹으면 성큼성큼 이루어 낼 수 있고, 우리는 만나면 아무렇지도 않은 그런 사람들이었다.


시아는 더 가까운 평화를 만나길. 부디. 시아의 바람처럼 더 많이 만나 친구가 되고, 다음에도 다음에도 같이 할 수 있길.


사사롭고 자연스럽고 짜릿하고 아쉽지만 통쾌 평화를 만나보았다. 한번 만나니 자꾸만 자꾸만 다시 보고 싶다.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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