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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aMya Feb 27. 2019

여덟 살, 달콤한 자본

햇수로 10년 전, 바르셀로나에서 여름휴가를 보냈다.

아주아주 더운 여름에, 호텔방에서 만든 샌드위치를 들고 땀을 뻘뻘 흘리며 가우디를 찾아 걸어 다녔고, 바르셀로나 아래 해변 도시에서 수영을 했었다.

그리고, 그 여름 그 바르셀로나에서 예고도 없이, 손톱보다 작은 시아가 우리를 찾아왔었다.


1주일 겨울 방학이고, 덴마크는 아직 춥고 바르셀로나는 이미 봄이다.

생명이 된 시아가 처음 만난 도시이지만 정작 본인은 기억하지 못하는, 우리도 시아와 함께였지만 함께했는지 몰랐던 도시를 셋이 다시 찾기로 했다.

이태리에 살면서 스페인 가요를 쉽게 접했던 시아는 하나도 모르는 스페인을 마침 동경했고, 덴마크에 와서 스페인 친구 두 명을 사귀면서 더욱 스페인을 궁금해하던 참이었다.


여행 떠나는 날 간단히 가방을 챙기고 보니, 유로 현금이 없다.

환전을 하러 나갔다 올 시간도 없고, 카드로 안 되는 게 없는 세상에서 현금이 얼마나 필요할지도 모르겠고...

"시아야, 유로 있지?"

이태리에서 이빨 빠질 때마다 받은 이빨 요정의 선물, 가끔 어른들이 주시는 용돈을 모아들고 왔다.

"응, 있어."

"그거 엄마 좀 빌려주면 안 될까? 스페인에 가서 쓰게 되면 쓰고, 안 쓰면 다시 돌려줄게. 혹시 쓰면 쓴 만큼 돌아와서 환전해 줄게"

"응?"

"유로를 좀 빌려 달라고"

"싫은데...."

"응?"

"싫어"

"싫어? 왜?"

"엄마가 돈은 빌리는 거 아니라고 했었잖아. 안 빌리는 게 더 좋은 거 아니야?"

"응, 그건 그런데, 지금 환전하러 가기도 시간이 없고, 공항에서 환전하면 유로를 너무 조금 주고, 스페인 가서 얼마나 쓰게 될지도 모르니까, 시아한테 잠깐 빌렸다 돌려줄게."

"돈을 빌려주면, 나중에 빌려준 돈 보다 더 주는 거 아니야? 엄마도 더 줘야지 그럼."

"응?!!!!!!!!"

"그때, 엄마가 텔레비전에서 돈 빌려주는 거 나왔을 때 그랬잖아. 은행이나 다른 데서 돈을 빌리면 원래 돈 보다 더 많이 돌려줘야 한다고."

"응, 그랬지. 그렇지만 시아가 은행도 아니고, 시아는 엄마 딸인데..."

"난, 싫어. 싫은 마음이야."

이쯤 대화를 이어가다 묘하게 기분이 확 상했다. 치사해.

"시아, 너무 치사해. 어쩜 엄마가 부탁을 하는데, 그걸 들어주기가 그렇게 싫어? 그럼 이제 앞으로 시아도 엄마가 사주는 물건 가격 모두 적어두었다가 나중에 더 많이 갚아."

말하면서 내가 내 말에 움찔했지만, 그냥 그렇게 나도 치사해져 버렸다.

시아 말이 하나도 안 틀리다. 하지만, 우리가 남이가? 내가 너에게 그 알량한 현금보다 못한 존재였던가?

공항에서 환전하기 싫고, 당장은 시내 환전하러도 못 가는 상황에 이미 슬쩍 짜증이 나기도 했었다.

여하튼 우리는 치사했다.

시아는 한참 씩씩 거리다가 슬그머니 내 지갑에 유로를 넣어두고, 긴 편지를 건넸다.


엄마가 다시 준다고 했는데, 그래도 싫다고 해서 미안해요.

엄마한테 돈을 너무 아까워해서 미안해요...

엄마가 돈을 빌려주면 더 많이 갚아야 한다고 얘기해서 나도 그렇게 말했는데, 엄마한테는 그렇게 안 하는 건지는 몰랐어요...

엄마가 꼭 준다고 했으니까, 꼭 줄 거예요.

그리고........


삐뚤빼뚤 맞춤법이 다 틀린 편지를 다 읽고 반성문을 닮은 차용증이구나 했다. 사인을 할 뻔했다.

못 이기는 척 지갑 속의 유로를 받아 들고, 시아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앞으로는 엄마도 돈을 빌리지 않게 미리 준비하겠다고 약속하고, 서로 다시 사과를 주고받고 화해를 했다.


"엄마, 그런데, 나도 유로를 좀 가지고 가서 쓰면 어때? 내가 사고 싶은 거 내가 살 수 있게. 나도 그렇게 해보고 싶어."

"그래? 뭐 사고 싶은데?"

"가방도 하나 사고, 장난감도 있으면 사고... 아직은 잘 모르겠어. 가서 봐야지."


바르셀로나 도착 후 택시비부터 카드 결제가 되는 걸 확인하고 빌렸던 유로를 시아에게 돌려주었다.

속이 다 후련하다. 역시 사람은 채무가 없어야 하는 것이다.

한편 시아는 여행 첫날 몬세라트에서 꿀 사탕을 하나 사서 먹어 보고, 덴마크 가서 먹을 것까지 미리 사두는 걸로 쇼핑의 문을 열었다.

그렇게 시작한 시아의 쇼핑은 조금씩 대담해졌고, 계획적이고 치밀해졌다.

가격을 비교하고, 평소 가지고 싶었던 것과 갑자기 가지고 싶어 진 것들 사이에서 고심을 하기도 했다.


막바지 세일 중인 바르셀로나에서 다리가 길어진 시아의 바지를 몇 개 사기로 하고, 쇼핑센터에 들렀다.

내가 한참 제 바지를 고르고 있는 동안, 시아는  마음에 드는 옷을 척척 골라 탈의실에서 입어보고, 나와서 선을 보이기를 몇 번 한끝에,, 알록달록한 스웨터 두 가지를 선택했다.

"그것도 시아 돈으로 사는 거지?"

"응? 그건 아니지. 이건 옷이잖아. 나한테 필요한 거. 그런 건 엄마 아빠가 사주는 거지. 나는 그냥 갖고 싶은데 엄마 아빠가 안 사주는 걸 사는 거고."

"그 옷도 뭐 꼭 필요한 건 아닌데, 필요한 건 바지니까, 바지는 약속대로 엄마가 사주고, 스웨터는 시아가 사는 게 어때?"

"필요하지. 나도 좀 새로운 옷 입어야 되는 거 아니야? 그리고 이거 봐. 세일도 진짜 많이 하고, 내가 엄청 예쁜 거 골랐어."

"그래. 진짜 예쁘다. 아빠가 사줄게."


시아가 나한테 단돈 몇 푼으로 치사하게 굴 때는 숨죽이고 눈치만 보던 황가수는 내 눈을 피하며 신속하게 시아편을 들어준다.


계획에 없던 쇼핑을 하고 기분이 좋았는지, 미안했는지,

"엄마도 하나 골라봐. 내가 사줄게." 한다

"우하하하하하"

매장이 떠나가라 셋이 크게 웃고 나왔다.


종일 투어를 하고, 저녁에 야경 투어까지 하는 중에, 피곤하다고 아빠 목마 찬스를 쓰던 시아가 갑자기 눈을 확 크게 뜨면서 내려 달란다.

"저기, 저기 내가 찾는 그 가방이 있을 것 같아."

방금 전까지 가물가물 감기던 눈은 동그랗게 커졌고, 축 느려졌던 온몸에 생기를 되찾았고, 목소리는 한낮에 놀이터에서 놀 때처럼 우렁차다.

시아에게 원기를 되찾아 준 곳은 다름 아닌 여자아이들이 좋아하는 것들이 가득 있는 그런 매장이었다.

시아는 요즘 아이들이 모두 들고 다니는 슬림 백, 웨이스트 백을 찾고 있었는데, 마음에 드는 걸 못 찾아 결국 코펜하겐에 가방 없이 돌아가야 할 것 같다고 포기를 했더랬다.

그런데, 그런 가방이 꼭 있을 것 같은 매장을 발견한 것이다.

날 듯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매장을 살펴, 가방을 발견했다.

우리가 보기에는 예쁘지도 않고, 실용성도 없어 보였지만, 가격이 놀라울 만큼 저렴하였기에 토를 달지 않았다.

세상에서 제일 갖고 싶었다는 복슬복슬한 털이 달린 볼펜과 가방을 사 들고 시아는 기분이 너무 좋아 콧노래를 불렀다.

"힘들었는데, 쇼핑하니까 힘이나 네. 어디 또 뭐 구경하러 갈까? 다른 가게?"


바르셀로나 갈 때는 거의 비워서 들고 갔던 시아 가방이 제법 채워졌다.


"시아는 바르셀로나 와서 제일 좋은 게 뭐야?"

"쇼핑!!!!"

"가우디, 바닷가, 해물, 그런 거는?"

"그런 것도 좋은데, 쇼핑. 이렇게 내가 사고 싶은 거 사는 건 내가 처음 해봤잖아. 너무 기분 좋았어. 내가 생각해서 사니까 더 재밌어. 스페인이 코펜하겐보다 더 싸니까 다음에도 스페인에 오면 쇼핑을 해야겠다. 다음에는 뭐 살지 생각해서 써 놔야겠어. 아, 이제 이빨 빠져도 이빨 요정이 유로 안 주고 덴마크 돈 줄 텐데, 유로 다 쓰면 다음에 못 쓰니까 이제는 쇼핑 그만할래."


두 여자의 빚 싸움으로 문을 연 여행에서 시아는 난생처음 경제 활동을 경험했다.

폭신폭신한 고양이 모양 숙면 안대, 용수철 모양 장난감, 꿀 막대 사탕, 색색 볼펜, 동전 지갑, 슬림 백, 가우디의 용 모양의 열쇠고리 같은 물건을 천천히 고르며 쇼핑이라는 새로운 즐거움을 발견했다.

갖고 싶은 걸 하나 고르고, 갖고 싶은 다른 건 마음에만 담고 꾹 참는 시아는 마치 날 때부터 쇼핑을 했던 것처럼 자연스럽기까지 했다.


시아가 과하지는 않지만 적절히 즐겁게 소비할 줄 아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소비로부터 자유롭지만, 그 소비를 충분히 즐길 줄도 아는 세련된 어른으로 자란다면 참 고마울 것 같다.



10년 만에 다시 온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내부도 외부도 많이 완성되었다. 10년 전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역시 아름답고, 역시 감동적이고, 더 아름답고, 더 감동적이다. 2026년에 완공이 된다고 한다. 그때 다시 오면, 성당은 어떤 모습일까? 우리는 어떤 모습일까? 시아는 또 무슨 쇼핑을 할까? 시아가 과연 그때도 우리를 따라 여행을 다닐까?


한 사람의 신앙과 삶이 모두 녹아 있는, 시민들과 그 도시를 찾는 모든 사람들의 소원과 희망을 담고 있는 거대한 기도의 전에서 경건치 못하게 돈과 시아, 늙은 우리를 묵상했다.


쇼핑이 어려운 덴마크로 돌아와서, 가정 경제 개혁을 추진키로 결정했다

시아에게 소액의 용돈을 지급하기로 한 것이다.

'엄마 아빠 말을 중간 이상 들으면' 한 달에 한 번 소액의 용돈을 지불하고, 그 용돈의 사용은 전적으로 시아가 알아서 하기로 했다.

"내가 말을 안 들으면 안 줄 수도 있지?"

"그럴 수도 있지. 돈은 그냥 받을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럼. 내가 잘 들어볼게. 그런데 혹시 좀 들었는데, 아주아주 잘 들은 게 아니면, 좀 깎아서 주면 어때?"

"그래? 그럴까? 좋은 생각이야. 한 달 지날 때 지난달에 어땠는지 같이 얘기하고 결정하면 되겠다."

"좋아. 나는 잘 들을 거야. 할 수 있어."

"용돈 받으면 뭐 할 거야?"

"몰라. 장난감 살 수도 있고... 아니면 이 돈을 모았다가 나중에 유로로 바꿀 수도 있지?"

"응, 그럼, 바꿀 수 있지."

"그럼, 보고... 모았다가 바꿔서 이탈리아나 스페인 가면 쓸까? 아니면 다음에 한국 가면 쓰던지. 어때?"

"그래. 그것도 괜찮을 것 같아."


용돈 정책의 시행을 앞두고 시아는 솔선하여 일기도 쓰고, 제 도시락 통을 스스로 설거지하는 등, 성과급을 위해 무척 성실하다. 자본이 좋구나. 치사한 나는 이렇게 미성년자 앞에서 자본을 손에 쥔 갑 노릇을 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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