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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aMya Mar 26. 2019

느닷없이 봄

덴마크 말 한마디 할 줄 모르고 스케이트를 시작했던 시아는 참 오랫동안 아이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 혼자 자리를 잡고 서서, 말로 듣고 이해 못한 동작을 다른 아이들을 보며 따라 했다. 그런 날들이 영원같이 길게 느껴졌고, 어느새 안쓰러운 시아와, 그런 시아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내가 당연해졌다. 

연두색 싹이 움트는 봄이 오던 날에 아이들과 시아 사이의 간격이 갑자기 사라졌다. 나에게는 '갑자기'처럼 느닷없는 광경이었다. 

탈의실에서 스케이트를 갈아 신고 있는 시아에게 금발 머리의 꼬마가 "시아"하고 크게 이름을 부르며 인사를 한다. 시아도 친구 이름을 부르며 답을 했다.

금발의 친구는 나와 시아 사이로 쏙 들어와 앉아 시아 옆에서 스케이트를 신으며 시아에게 장난을 건다.


겨울이 녹는 것도, 조금씩 조금씩 아이들이 서로에게 다가가는 것도 나는 눈치채지 못했다.

"엄마, 우리 집에 A 초대하면 어때?"

"응? A를?"

"응, 우리 집에 덴마크 친구가 놀러 오면 좋겠어."

"응..... 엄마가 한번 물어볼게......."


그렇게 대답은 했지만, 물어보지 못하고 며칠이 지났다.

덴마크 아이가 우리 집에 놀러 오려면, 일단 그 엄마와 대화를 좀 해야 하고, 아이가 놀러 오면 아이와도 조금 대화를 해야 하고. 나는 그 엄마를 모르고, 나는 덴마크도 모르고...

별 일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나는 머리가 복잡해졌고, 쉽사리 마음이 먹어지질 않았다.

그렇게 며칠 내일, 내일 하면서 미루고 있는데, 금발머리 시아 친구 엄마에게서 메일이 왔다.

시아를 집에 초대하고 싶다고 했다. 

시아가 편한 시간을 얘기해주면 스케줄을 맞추어 보자고 했다.

반가웠고, 내가 먼저 초대하려고 했는데... 뒤늦게 멋쩍었다.


시아가 편한 날을 메일로 전달했고, 스케이트 수업 시간에 만나 토요일 오후로 약속을 잡았다.

"엄마, 친구네 집 처음 가는데, 선물을 가지고 가야 하지 않을까?"

"그러게. 엄마 생각에도 그런데, 무슨 특별한 날이 아니니까.. 선물하기도 그렇고..."

"난, 알아. 뭐 가지고 가면 좋을지. 초콜릿, A는 초콜릿 진짜 좋아해. 나처럼. 하하. A는 언니도 있고, 쌍둥이 남자 동생도 있고, 나도 갈 거니까 초콜릿 4개 사면 어때?"

"좋아. 그렇게 하자."

아이들에게 무조건 통하는 달걀 모양 초콜릿 4개를 사들고, A네 집으로 갔다.


여덟 살이 친구네 집에 놀러 가는 것뿐인데, 나는 떨리고 긴장했다.

시아는 저만큼 앞질러 가며 나를 재촉했다.


아이 셋에 고양이 두 마리까지 있는 A의 집에 들어서자 조금 어수선하고 따뜻한 분위기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시아는 옷을 척척 벗어 옷걸이에 걸고 A에게서 고양이 소개를 받았다.

인사를 하고 돌아서 나오려는 나에게 A의 엄마가 커피 한잔을 권했다.

잠깐 흡, 당황했지만, 이내 나도 옷을 척척 벗어 걸고 거실 탁자 앞에 앉아 이태리 커피보다 양이 아주 많은 커피를 기다렸다.


A 엄마는 보잘것없는 내 덴마크어 실력을 고려해 영어와 덴마크어를 섞어가며 별스럽지 않은 얘기들을 시작 했다. 

아이 셋을 키우는 얘기, 고양이 두 마리를 사던 날 얘기, 시아는 언제쯤 동네 학교로 옮기게 될지, 시아가 오게 되면 좋을 것 같다는 얘기, 창고에 넣어둔 재봉틀을 꺼내 겨울 이불에서 오리털을 좀 빼고 다시 밖아두려고 한다는 얘기, 젊었을 때는 재봉질을 잘했는데, 아이들 생긴 이후로는 시간이 없어서 통 못했다는 얘기.

잘 모르는 덴마크 사람 거실에 앉아서, 고양이 재주를 구경하며 친구와 깔깔거리는 시아를 엿보며, 안 주인과 별스럽지 않은 얘기들을 주고받고 있는 오늘이, 갑자기 핀 봄꽃처럼 갑작스럽고 생경하지만 반가웠다.


커피를 다 마시고, 저녁 시간 전에 시아를 데리러 오겠다고 하고 내가 먼저 나왔다.

시아는 걱정할 것 전혀 없을 얼굴을 하고 크게 두 번 손을 흔들어 보였다.


데리러 가서 만난 시아는 아까보다 기분이 훨씬 좋아 보였고, 훨씬 수다스러워져 있었다.

A에게 다음에는 우리 집에 꼭 놀러 오라고 얘기하고, A 엄마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시아랑 손을 잡고 해가 길어져 환한 저녁길을 걸었다.


"진짜 진짜 재밌었어. 언니도 우리랑 같이 놀았어. 고양이들도 진짜 착해. 귀여워."

"친구가 얘기하는 거 다 못 알아들어서 힘들지 않았어?"

"아니야, 나 다 할 수 있어. 모르면 다시 말해달라고 하면 다시 말해줘. 그럼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어. 줄넘기도 했다. 날씨 좋으면 같이 놀이터 가기로 했어. 다음에 우리 집에 언제 올 수 있을지 보고 A 엄마한테 빨리 말해주자."


A네 집에서 초콜릿 같이 먹은 얘기, A도 초콜릿을 너무 많이 먹으려고 해서 엄마가 잘 안 사준다는 얘기, A네 언니는 SNS를 한다는 얘기, TV로 덴마크 만화를 같이 본 얘기. 를 들으면서 발그란 저녁 하늘이 참 인심 좋게 생겼다는 생각을 했다.


"덴마크에 와서 친구네 집 가본건 처음이야. 정말 재밌었어. 그래도 이태리에 가고 싶긴 해. 아직은 그렇지. 이태리 친구들이 더 많이 보고 싶으니까... 그런데. 아주 이태리에 가면, 덴마크 친구들이 보고 싶을 수도 있겠다. 그렇지?... 그게 안 좋은 거네. 친구가 있는 건 좋은데, 보고 싶은 건 좀 슬프니까...."


겨울이 다 녹은 것 같다가도 차갑게 비가 오기도 하고, 매섭게 바람이 불기도 한다. 그래도 봄은 온다. 

언 땅 아래서 싹이 돋고, 뿌리가 힘차게 뻗는 동안은 아무것도 모르다가 꽃이 피고 나서야, 아! 하고 봄을 반긴다.

덴마크 사는 여덟 살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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