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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aMya Jul 27. 2019

느린 풍경. Marche- Numana

이태리 서쪽에는 이태리 안 사는 사람들도 다 아는 로마도 있고, 피렌체도 있고, 나폴리, 소렌토, 폼페이가 있다.

그래서 이태리 서쪽은 사는 사람 안 사는 사람으로 늘 성황이다.


하지만 이태리 허리춤의 동쪽에는 아는 사람만 안다는 Marche주가 있다. 이태리의 최 장수 고장. '마르케 지방 산업 모델'이라는 말이 탄생할 만큼의 산업 지역, 이태리에서 해산물 수확량이 가장 많은 지역. 

나는 아는 사람이 아니니, Marche를 모른다. 떠나온 이태리의 모르는 곳엘 가보기로 했다. 추억이 떠오르는 곳보다 추억을 만들 수 있는 곳에서 살면서 모르던 이태리를 만나보고 싶었다. 


그래서 Marche주의 작은 도시 Numana를 선택했다. Conero 산맥 아래 해변가 도시 Numana는 어떤 곳일까? 늘 그래 왔듯이 아는 만큼 보인다는 여행의 규칙에는 흥! 게으름이나 날려주며, 아무것도 모르고 궁금증만 가지고 떠났다. 


밀라노에서 차로 4간 반 정도가 걸리는 Numana는 Ancona라는 큰 항구 도시 아래에 위치해있다.

옆으로 가로질러가면 해마다 다니던 Toscana가 멀지 않은데, Marche는 느낌이 다르다. Toscana는 좀 더 부유하고 번듯했다면, Marche는 소박하고 왜소한 느낌이랄까? 같은 포도밭이고 같은 구릉인데, Toscana는 더 넓고 더 윤택한 것 같다. Toscana는 외국 영화에 나오는 좋은 시골이라면, Marche는 그냥 시골이다. 포도밭은 조금씩 더 작고, 자투리 땅에는 채소들이 자라고 있고, 농장 가운데 집들은 저택이 아니라 그냥 집이다. 


그래서. 나는 Marche에 반했다. 편하고 푸근해지는 풍경이다. 마음씨 좋을 것 같은 풍경이다.



포도밭들을 조금 지나면 해바라기 밭이 넓게 펼쳐진다. 선물처럼 펼쳐진 노란 해바라기들이 너무 예뻐서 시아도 나도 박수를 쳤다. 마침 우리의 행선지인 Conero 해안은 Marche에서도 해바라기 밭이 많은 지역이라고 한다. 해바라기 밭을 좋아하는 나는 Toscana를 다니면서 눈이 시원할 만큼 크고 노란 해바라기 밭을 보지 못해 늘 아쉬웠는데, 아주 옛날에 프랑스에서 본 것처럼 넓고 풍성한 해바라기 밭을 Marche에서 만났다. 노란 밭이 좋아서 매일 빵을 사러, 과일을 사러 부러 돌아가고, 구릉을 넘어 다녔다. 

고개를 돌리기도 하고, 뜨거운 하늘을 꼳꼳하게 올려다 보기도 하는 해바라기들이 선보이는 장관에 매일 감탄했다.  보고 있어도 그리운. 그런 풍경이다. 사랑하는 풍경이다. 


초저녁에 해바라기 구경을 나가면 종일 해를 만나고 한 낯보다  더 노랗게 핀 해바라기들이 고개를 살짝 돌리고 섰다. 노을을 배경 삼은 노란 해바라기들이 모두 우리를 반기는 것 같아 황송하고 황홀하기까지 했다. 

사진으로 담아도 눈에 담아도 넘치는 광경이다. 해바라기를 그린 화가들의 마음을 알 것 같다. 그리지 않을 수 없는 광경이다. 나도 그림을 그릴 줄 알았다면, 시인의 말을 가졌다면, 하며 내내 아쉬웠다. 


편안한 시골 풍경과 해바라기 밭으로도 이미 충분했다. 


그런데, Marche에는 가도 가도 끝이 안 보이는 길고 긴 해변이 있다. 동글동글한 자갈이 발바닥 아래서 동글동글 굴러다니는 바다다. 철썩철썩 파도에 애도 어른도 몸을 맡기고 수시로 크게 소리를 지르게 하는 바다다. 파도가 없는 날은 소금기에 겨우 떠다니는 정도의 수영을 하는 사람도 한참 사사로이 물 위에 누워 하늘 구경을 하게 해주는 바다다.

길고 완만한 해변이 있는가 하면, 깎아지른 듯한 절벽 아래 해변도 있다. 

산 아래 해변의 물은 더 맑고 상쾌하다.

고요한 바닷가에서는 산 냄새, 바다 냄새가 소리를 낸다. 냄새가 귀에 들린다. 조용하지만 잔칫집처럼 생기가 넘치고, 부산하다. 


Numana의 바다는 물이 적당히 따뜻해 거북이가 즐겨 찾는 다고 한다.

몇 년 전부터 Numana 지역에서는 찾아온 거북이들이 무사히 자라 바다에 나가도록 보호하고 있다고 한다.

산 아래 고요한 그 바다에 살고 있다는 거북이를 혹시 만날 수 있을까?

조용조용 거북이들을 보호하고 있다는 그물가에 앉았다. 바닷소리, 펄럭거리는 기러기 날개 소리를 들으며, 지난밤 파도에 내려앉은 거북이 보호 그물을 복구하는 어느 중년 부부를 한참 구경했다. 거북이를 만나지 못했다.

거북이가 우리를 만나러 와주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우리가 걸터앉았던 바위 아래 거북이가 있다는 걸 알았으니 우리는 거북이를 만난 거다.


"거북아, 오늘은 나오기 싫어? 나오면 누가 괴롭힐까 봐? 나는 안 괴롭히는데... 


거북아, 나 거북이 만져봤어.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어린이집에 거북이가 살았어. 그래서 매일 보고, 내가 상추도 주고 그랬다. 우리 어린이집에 사는 거북이는 진짜 잘 먹었어. 사과도 먹고, 오이도 먹고, 너는 뭘 좋아해? 너도 뚜껑? 뚜껑인가? 등! 맞다, 등! 이 동그래?

나는 너를 진짜 보고 싶은데..


거북아, 물속에 재밌는 게 있어? 저기 아줌마랑 아저씨랑 너네 집을 고쳐준다. 친절하지? 좋은 아줌마 아저씨 같아. 나도 나중에 어른이 되면, 그래서 할 수 있게 되면 너네 집 고쳐줄게.


거북아.. 오늘은 가야겠어. 나도 너처럼 수영하러 갈 거야. 내가 다음에 또 올게. 나는 이태리에 이제 안 사는데, 그래도 자주 올 수 있어. 아주 멀리 사는 건 아니거든. 그러니까 다음에는 꼭 만나자. 그런데, 너희들이 크면 덴마크에도 올 수 있어?"


시아는 얼굴을 못 본 거북이를 기대와 꿈으로 마음에 초대했다. 


고깃배가 들어오는 Numana 항구에는 멀리서부터 생선 비린내가 진동을 한다.

구릿빛을 한참 넘은 에스프레소 빛 피부의 어부들이 그물을 정리하고, 잡아들인 생선을 종류대로 분리해 담는다. 신선한 해산물을 사기 위해 부지런히 나온 식당 주인들이 배 주인들과 내 키보다 더 높이 쌓인 홍합 무더기를 흥정하고 살이 꽉 찬 스캄피를 먼저 사려고 앞을 다투기도 한다. 몸이 빨간 작은 생선은 이름이 뭐였더라... 구워도 먹고 튀겨도 먹는 맛있는 생선인데...

생선을 사고파는 사람들이 Triglia di scoglio 한다. 아! 맞다. 우리말로는 성대라고 하는 생선인데, 고기 맛이 참 좋다. 그 맛있는 생선이 그물에 많이도 걸렸다.

어부들은 깜깜할 때 바다에 나가 겨우 해가 오를 때쯤 배 가득 고기를 싣고 돌아온다고 한다. 

마디가 굵고 볼품없는 어부들의 손이 숭고하고 영광스럽게 보였다.

땀내와 비린내가 가득한 그을리고 주름진 어부들의 얼굴이 해바라기만큼 환하다.


항구 위 높은 언덕 위에 있는 Numana 시내는 깨끗하다. 작은 Numana 시내 광장에 Bar가 몇 개나 있는지 광장이 온통 커피 향으로 가득하다. 이태리 냄새. Numana의 보통 사람들 곁에서 꼴깍 마시고 나면 잠시지만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것처럼 용감하고 씩씩해지는 에스프레소를 마시고, 작은 빵가게를 기웃거리고, 문구점 앞에서 한참 구경을 했다. 늘 천천히 살았던 사람들처럼 뜨거운 해를 핑계로 천천히 걸었다. 


해변가 지역인 Marcelli Numana 시내에 나가면 휴양지 기분이 난다.

간단한 식사부터 멋진 식사가 가능한 식당들이 줄 을지어 있고, 거리 공연도 있다. 아이들을 유혹하는 회전목마도 있고, 한번 사면 다시는 갖고 놀지 않을 장난감들을 파는 가게들도 많다.

바다를 즐기고 잠깐 나와 여유롭게 슬리퍼를 끌어가며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물고, '장난감 사주세요'와 '안돼'를 천 번씩 되네이며 휴양객을 했다. 


살면서 만난 이태리도 예쁘고 고왔지만 다시 찾은 이태리는 찬란했다. 소박하고 조용하고 촌스럽고 화려한 Marche를 이제라도 만나서 참 다행이다. 


"나는 여기가 너무 좋다. 다음에 꼭 다시 올 거야. 마음이 편해지고, 기분이 좋아지는 곳이야."

황가수가 마음이 불편하고 기분이 안 좋은 때도 있다는 걸 Marche를 살아보고 알았다. 


나도 Marche에 다시 가고 싶다. 느리게 살았던 일주일을 느리게 오래 추억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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