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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aMya Nov 12. 2019

수퍼 감자깎기

옛날 옛적에 녹색 어머니회라는 어머님들의 모임이 있었다.

정확한 모임의 성격은 몰랐지만, 그 모임에 참석하는 엄마들의 아이들은 공부를 잘했고, 예쁜 옷을 입고 다녔고, 상도 많이 받았다.

우리 엄마는 녹색 어머니회에 참여하지 않으셨고, 나도 우리 엄마가 녹색 어머니회에 참석하기를 바랐던 적은 없었지만, 가끔 초록색 앞치마를 두르고 학교에 오시는 엄마들의 존재는 특별하게 느껴졌고, 녹색 앞치마를 두른 엄마에게 손을 흔들며 달려가는 친구들이 평상시와는 다르게 보이기도 했었다. 

엄마가 되는 것과 엄마들의 세상에 들어간다는 것은 또 다른 것이라는 것을 그때 직감했었나 보다.


시아가 스케이트 학원을 옮긴 지 이제 3개월이다. 시아는 어느새 스케이트 학원의 언니 동생 친구를 모두 사귀었다. 자주 만나 긴 시간 같이 운동을 하니 자연스레 가까워진 모양이다.

그런가 하면 나는. 3개월째 '안녕'만 하고 다니는 중이었다. 

덴마크 사람은 사귀는데 천이백 년은 족히 걸릴 것처럼 까칠하고, 나는 더듬거리는 덴마크어를 선보이며 그들의 곁으로 다가갈 의욕이 있을 만큼 젊지 않다. 다 귀찮은 중년이란 말이다!

일주일에 4-6번은 꼭 만나는 사람들인데, 먼저 좀 말을 걸어도 좋으련만, 이태리 사람들 같았으면 벌써 한국에 사는 부모님네 안방 모양도 다 파악했을 시간인데, 흥! 


시아가 스케이트에 더 마음을 주고, 더 자주 스케이트장에 가고 싶어 할수록, 다 귀찮은 중년의 꼭 다문 입이 부자연스럽고, 갑갑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덴마크 사람들이 겨울이 오기 전 마지막 광합성을 하러 따뜻한 남쪽나라로 여행을 하는 가을 방학 기간 동안 스케이트 학원에서는 러시아 선생님들을 모셔 캠프를 연다고 한다. 우리에게 따뜻한 남쪽 나라에 갈 예정 같은 건 없었지만, 그래도 귀한 방학 일주일을 스케이트장에서 보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엄마, 나도 캠프하고 싶은데, 많이 비싸?"

"가을 방학 때 하는 캠프?"

"응, 그거 진짜 재밌대. 아침부터 계속 스케이트 타고, 같이 밥 먹고 체조도 하고 그런대. 나도 해보고 싶어."

"음.... 엄마는 방학 때 시아랑 박물관도 가고 미술관도 가고 그러려고 했는데, 그런 건 별로야?"

"아니, 그것도 좋은데, 스케이트에서 친한 친구들은 캠프에 간다고 하니까, 나도 가고 싶어. 그리고 오랫동안 운동하는 거 해보고 싶어."


전혀 마음이 없었고 좀 비싼 것도 사실이었지만, 간절한 시아의 바람을 꺽지 못했다.


캠프를 신청하고, 캠프 일정을 받았다. 하루 종일 운동, 운동, 운동. 시아가 좋아할 것 같다.

캠프 기간 중에 아침, 점심을 함께 먹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럼 그 밥은 누가 하나?..

조금 더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보니, 밥은 몇몇 엄마들이 모여서 만든다고 한다. 

엄마들 몇몇이 모여 선생님까지 다 해서 30명 정도의 밥을 하려면 쉽지는 않을 것 같다.

내가.... 도와줄까?.... 말까?....


"저기, 캠프 기간에 혹시 도움이 필요해? 내가 같이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래? 정말? 너무 고맙다. 스케줄 보내줄게. 정말 고마워!"

3달 동안 시큰둥으로 화답하던 그녀의 얼굴에 웃음꽃이 만발했다.


캠프 첫날 시아와 같이 일찍 스케이트장에 도착해 프로그램에 대한 설명을 듣고 선생님들의 소개도 받았다.

아이들은 아침을 먹기 시작했고, 나는 자연스럽게 부엌에 들어갔다.

얼굴이 낯에 익을 대로 익은 엄마들이 나를 반겨주며 고맙다고 인사를 한다.

흥! 이렇게 다 할 줄 알면서, 그동안 참 대단히도 무심들 했다.


구운 빵을 오븐에서 꺼내고, 버터를 바르고, 쨈을 꺼내고, 우유를 꺼내고, 커피를 내리고, 시리얼을 담아주고, 주스를 따라주고, 차를 마실 뜨거운 물을 따라 놓고. 아이들이 아침을 다 먹고 스케이트를 타러 내려가자 잠시 앉아 다 같이 아침을 먹자고 했다.

그녀들의 덴마크어 대화를 알아듣기도 하고 못 알아듣기도 하며 같이 아침을 먹었다.

그리고 아이들 먹을 간식을 준비했다. 와플, 토스트, 과일

운동을 하고 허기진 아이들이 몰려와 전쟁 같은 간식 시간을 치르고 난 후에 상을 치우고, 점심 준비를 시작했다.

덴마크 사람들은 모이면 뭘 만들어 먹나?

점심 메뉴표가 화려하다.


닭고기와 카레, 라자니아, 칠리 미트 소스, 미트볼과 크림 감자, 나초칩과 고기 소스.

음식 맛이 없기로 유명하다는 덴마크에서는 전통 대신 맛을 택했나보다. 미트볼과 크림 감자 빼고 나머지는 다 딴 나라 음식이다.

비록 말을 잘 못 알아들어 답답지만, 현지화된 다양한 요리의 조리법을 배운다는 마음으로 감사하고 경건하게 참여하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자! 

카페 오픈을 앞두고 있다는 한 엄마는 매일 다른 종류의 케이크를 구워 디저트를 준비하고, 

스웨덴 출신 엄마는 소스 담당, 러시아 출신 엄마는 쌀, 파스타를 담당했다. 다들 각자 제 몫을 찾아 하는데, 바삐 움직이는데 나는 뭐해야 하나? 

괜히 어정쩡 행주질을 한번 더 하는 나에게도 업무가 주어졌다.

당근 깎기.

덴마크 아이들은 당근을 간식으로 먹고 밥 먹을 때도 먹는다.

세로로 손가락 정도 길이로 잘라 수북이 쌓아두면 오독오독 소리를 내며 토기처럼 당근을 먹는다.

그래서 오늘의 메뉴인 닭고기와 카레, 내일의 메뉴인 라자니아, 그 다음 날의 메뉴에도 매일매일 당근을 같이 내야 한다고 했다.


주황색 당근 2킬로.

껍질을 깎고, 자르고 담았다. 엄마들이 소스를 만들고 파스타를 삶았다.


다음날도 당근 2킬로.

그리고 사과 2킬로.


다음날도 당근 2킬로

오이 3킬로


물론 내가 당근만 깎은 건 아니다. 커피도 내리고, 설거지도 돕고, 아이들에게 배식도 도왔다.

당근을 총 6킬로째 깎던 날, 부엌의 엄마들이 나에게 속도가 많이 빨라졌다고 칭찬을 해주며 웃었다.

나도 같이 웃었다. 말이 짧으니 대꾸는 피하고 웃음만 늘었다.


Flødekartofler (크림 감자)라는 덴마크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는 감자 요리를 하는 날이다. 메인은 미트볼이지만 아이들도 어른들도 모두 사이드로 나오게 될 '크림 감자' 요리를 기다렸다. 

감자를 아주 많이 깎아야 할 테니 간식 시간에 한 두 사람은 감자 깎기를 시작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다른 엄마들이 아침을 치우고 간식 준비를 할 때 나는 산더미 같이 쌓인 감자를 마주하고 커다란 쓰레기통을 곁에 세우고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7킬로의 감자를 깎았다.

시간이 좀 남아서 당근 2킬로도 깎았다.

테이블 한 가득 쌓인 하얀 속살의 감자들을 보며 엄마들이 수고했다. 대단하다 칭찬을 했다.

급기야 나는 super skralder 슈퍼 깎기의 칭호를 부여받았다.

다 같이 크게 한번 웃었다.


그리고 엄마들은 하나씩 하나씩 질문도 하고,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마른행주를 한쪽 어깨에 걸치고 바쁘게 주방을 오가며, 아이들 이야기 남편 이야기 덴마크 이야기 이태리 이야기를 했다.

크림 감자 요리가 절찬리에 소비되고 같이 앉아 늦은 점심을 먹으며 시아가 스케이트를 배우게 된 과정, 이태리에서 했던 운동, 덴마크에 오게 된 이유를 물었고 답했다.


점심 설거지를 하고 뒷정리를 하고 인사를 하는데,

"네가 도와줘서 참 좋다. 너도 이 시간을 즐겁게 생각해주면 좋겠어"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마음을 드러내 주었다.


금요일, 30개의 와플을 굽고, 10개의 토스트를 굽고, 라자니아와 사과 케이크로 화려한 마지막 식당 봉사를 마치고 엄마들은 와인을 한잔씩 마셔가며 수고한 서로를 격려했다.


캠프가 다 끝나고 일반 연습이 있는 토요일 스케이트 장에서 엄마들은 멀리서부터 나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를 했다.

나도 반가이 인사했다.

그렇게 인사를 나누고 아이들을 아이스 링크 안으로 들여보냈는데 한 엄마가 은근히 다가온다.

"아! 맞다! 너 우리 그룹에 안 들어왔지? 자, 지금 초대할게. 이건 식당 그룹인데, 부담 가질 건 없고, 그냥 지켜보다가 네가 참여할 수 있을 때 같이 하면 돼."


그렇게 나는 식당 담당 그룹 소속이 되었다. 영예롭게도 덴마크 온 이후로 메시지 받을 일이 없어 숨이 거의 끊어질 뻔 한 whatsapp이 다시 생기를 띄었다. 


"스케이트 협회 대회하는 날 시간 되는 사람?"

"메뉴 짜야하는데 일요일 아이들 연습 시간에 2층 사무실에서 만날까?"

"메뉴 짜면서 와인 한잔 어때? 내가 가지고 갈게."

"이번에도 감자 요리할까? 저번에 반응 좋았어."

"감자! 감자는 걱정하지 마, 우리에게는 한국에서 온 슈퍼 감자 깎기가 있어!" 


초록색 앞치마를 두르고 특별한 기류를 만들어내는 녹색 어머니회 대신 식당 엄마들의 모임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어찌 어찌하여 덴마크까지 와서 덴마크 엄마들의 세상에 끼어 앉았다.

그 옛날 녹색 어머니회 어머니들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주부 17년차에 감자깍기 영웅으로 등극하면서까지 엄마들 세상의 문들 두드린 것은 아이를 위해서.. 는 아니다. 내가 식당에 가서 밥을 하는 것과 아이가 스케이트를 타는 것은 전혀 상관이 없다. 여기 분위기는 그렇다. 누구는 밥을 만들고 누구는 그 밥을 먹는게 이상하지도 않다.  덴마크의 식당 엄마들 사회는 (어쩌면 다른 사회도)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아무도 초대하지 않는다. 스스로 문을 두드리고 문을 박차고 들어가면 모두 고개를 들어 찡긋 인사를 하는 정도로 반기는 그런 미지근한 사회이다. 누군가 초대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다가는 아이가 다 클때까지 덴마크 아이 엄마들의 마음을 들을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누구는 봉사를 하고 누구는 안해도 아무렇지도 않은 이 분위기가 궁금하기도 했다. 

다 귀찮지만, 가끔 외롭기도 했다.

내가 먼저 사람들 속으로 뛰어들어가 야심차게 감자를 깍게 되었다는 사실을. 이태리에 두고온 인연들은 믿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서있는 곳이 달라지면, 풍경이 달라지고, 풍경이 달라지니 풍경속의 나도 달라졌다.

스케이트 협회 대회가 있는 날을 위해 감자 깎을 때 어울리는 필수 문장 몇가지를 미리 작문 해두어야겠다. 


1. '내 생에 가장 많은 감자를 깎은 날이야' 

2. '사람들에게 덴마크에서 친구 사귀려면 감자를 깎아야한다고 얘기해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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