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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aMya Jun 17. 2020

아침상에도 정답이란 건 없습니다.

짧은 덴마크 체험을 통해 내가 본 덴마크 사람들은 주로 흑빵, 통밀빵 아니면 겉이 바삭한 동그란 빵에 버터와 쨈, 치즈, 초콜릿 슬라이스를 곁들어 아침 식사를 한다. 더러는 곡물이 거칠게 씹히고 단 맛이라고는 여운만 있는 정도의 시리얼을 먹기도 한다. 음료로는 오렌지 주스나 우유 혹은 오트 우유와 커피를 함께 마신다. 덴마크 사람들은 건강을 참 많이 생각한다. 뭘 먹어도 유기농을 찾고, 저지방을 찾고, 식물성을 찾는다. 야채를 많이 먹으려고 기를 쓰고 모든 음식에 섬유질의 질감을 느껴져야만 안심을 한다. 그래서인지 아침부터 보리 알갱이가 씹히는 흑빵과 오트 우유를 마시는 사람들이 많다. '입이 깔깔하다' 어릴 적 어른들로부터 들었던 표현이다. 아침이면 할머니도 아버지도 입이 깔깔하다고 하셨던 것 같다. 뭔가 부드럽고 따뜻한 걸 먹어야 할 것 같은 입안의 느낌 이리라 짐작한다. 아침부터 깔깔하게 건강의 풍미가 그득한 식사를 하는 것을 보면 덴마크 사람들은 아침에도 입이 깔깔할 수가 없는 태생인 모양이다. 

우리는 여전히 이태리식 아침 식사를 선호하지만 가끔은 덴마크 사람들을 따라, 그러나 흑빵까지는 못 가고 겉이 바삭한 모닝빵에 버터를 바르고 쨈이나 슬라이스 초콜릿을 곁들여 먹는다. 아직 덴마크에 내 마음을 다 주지 않았고 두고 온 이태리가 많이 그리워 덴마크가 무엇을 해도 드러내어 잘했다 할 수 없는 심리 상태이지만, 덴마크 버터는 맛있긴 하다. 고소한 우유향이 진한, 존재감이 대단한 버터라 빵에 발라도 그 맛이 숨는 일이 없다. 그래. 버터는 맛있다. 



15년을 살았던 이태리에서는 정신이 번쩍 드는 까만 에스프레소 한잔이나 우유 거품이 푹신한 카푸치노와 브리오쉬로 아침 식사를 한다. 브리오쉬는 크루아상과 거의 같은 모양의 파이 느낌이 나는 빵이다. 하지만 브리오쉬는 크루아상에 비해 버터가 덜 들어가 조금 더 담백하다. 아무것도 안 들어 있는 플레인 브리오쉬도 있지만, 노란 슈크림이 흐르도록 가득 들어가 있거나, 초코 크림이나 누텔라 혹은 살구 쨈 같은 것이 들어 있는 브리오쉬가 내 주변 사람들에게는 더 보편적이었다. 집에서 아침을 먹는 사람들도 있지만 많은 이태리 사람들은 집에서는 물 한잔 마시고 나가 출근길에 등굣길에 골목마다 반드시 있는 BAR에서 아침을 먹는다. 아침식사 10번 혹은 한 달 정기권을 구입하는 사람들도 있다. 제대로 의자에 앉지도 않고 선채로 커피와 브리오쉬로 아침 식사를 하며 BAR를 가득 채운 동네 주민들과 수다를 나누는 것으로 수다스러운 이태리 사람들의 진짜 하루가 시작된다. 

이태리에 사는 동안 우리는 주로 집에서 아침 식사를 했지만, 주말에, 휴가 때는 이태리 사람들을 흉내 내며 BAR에 들러 아침을 먹는 호사를 누려보기도 했다. 우리 부부는 슈크림이 들어간 브리오쉬와 에스프레소를 먹고, 아이는 초콜릿이 들어간 브리오쉬와 따뜻한 우유를 마셨다. 브리오쉬를 직접 굽는 BAR에 가도 빵 굽는 향보다는 커피 향이 공간을 압도한다. 이태리 커피 향은 혼절한 사람도 일으킬 것 같은 강한 향이라 문을 열어 둔 BAR 앞을 그냥 지나가는 게 쉽지 않다. 1유로 동전을 내고 잠깐 서서 에스프레서 한잔을 꼭 마시게 만든다. 어떤 음식에도 만족하는 편이지만 이태리 커피에 대한 아쉬움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는다. 커피 향, 시끌벅적한 BAR의 분위기, 탁탁 커피 가루를 털어 버리는 소리, '자, 여기' 하고 커피를 내어주며 꼭 눈을 한번 마주치는 친한 척이 천성인 이태리 사람들이 다 같이 어우러져야 만들어지는 그 에스프레소는 꼭 그곳에서만 맛볼 수 있다.


젊은 시절 잠시 들려 낭만을 배운 프랑스의 아침 식탁은 이태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크루아상이나 딱딱한 토스트 빵에 각종 쨈과 커피. 다만 커피는 이태리와 다르게 카페라테를 주로 마시는 듯했다. 이태리와 프랑스는 질투와 시기가 넘치는 이웃이라 크루아상과 브리오쉬를 실제 이태리 사람이나 프랑스 사람과 함께 있으면서 비교한 적은 없다. 나에게는 그저 양식일 뿐이지만 자국의 음식에 대한 자부심이 날카로운 칼날 같아서 잘못 말을 꺼냈다가는 찔릴 수도 있다고 직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야 말할 수 있다. 나는 칼로리가 더 높고, 콜레스테롤이 더 많다고 하는 버터향이 풍만한 크루아상이 더 좋다. 크루아상을 먹고 나면 입안에 남은 느끼한 기름기도 좋고, 따뜻한 크루아상의 향기도 참 좋다. 또 그렇다고 해서 내가 프랑스 아침 식사에 아주 만족하는 것은 아닌데, 그 이유는 커피 때문이다. 카페라테로는 정신을 차릴 수 없는 것이다. 부드럽고 향긋한 카페라테를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아침엔 에스프레소가 필요하다. 이태리 15년이 나에게 남겨준 쌉쌀한 낙인 같은 것인데, 아마 나는 이제 평생 그 낙인을 지우지 못할 것 같다. 


또 내가 10년을 살았던 러시아에서는 아침에 오픈 샌드위치나 죽을 먹기도 하고, 달걀 프라이와 소시지를 먹기도 한다. 이렇게 적고 나니 좀 아무거나 먹는 것 같지만 그렇지는 않다. 아침에 고기나 생선이나 야채를 먹지는 않는다.  오픈 샌드위치에는 버터를 바르고 기름기가 많은 슬라이스 햄을 얹거나 치즈를 얹는다. 러시아의 오픈 샌드위치는 식사 시간의 경계를 무시하고 아무 때나 등장하는 요리다. 위에 올려지는 토핑에 따라 아주 고급스러운 음식으로 변하기도 하는데 그 고급의 정상에는 케비어를 얹은 흑빵이 있겠다. 맛은... 비린 흑빵 맛이다.

러시아에서 아침에 죽 대접을 받고 조금 반가웠다. 하얀 죽이 꼭 흰 죽을 닮아서 고소하고 따뜻할 것이라는 기대를 했지만, 성경에 나오는 만나의 죽이라고 불리는 그 하얀 죽은 들척지근하고 끈적끈적한 세멀 리나 죽이었다. 하얀 죽에 버터를 한 숟가락 섞어서 먹기도 하고 가끔 쨈을 섞어 먹기도 한다. 러시아에 살면서는 나도 간간히 만나의 죽을 먹었지만 그곳을 떠난 이후 그 음식이 그리운 적은 없었다. 러시아에서는 커피도 물론 많이 마시지만 차를 주로 마신다. 아침에도 점심에도 저녁에도 홍차를 많이 마시는 그곳의 풍습에 맞게 10년 동안 나도 많은 홍차를 마셨다. 커피가 아니라고 홍차를 무시할 일이 절대 아니다. 이른 아침에 진한 홍차를 마시면 에스프레소 못지않은 각성 효과를 누릴 수 있었다. 


긴 방랑생활을 시작하기 전 한국에서는 아침마다 엄마의 정성이 담긴 아침상을 누렸다. 따뜻한 잡곡밥에 계란말이, 계란찜, 생선 구이, 김치를 포함한 갖가지 밑반찬에 절대 빠지지 않는 국으로 이루어진 풍성한 아침상이었다. 잠이 덜 깬 나는 싱크대 앞에서 탁탁 도마 소리를 내며 무언가를 보글 보글 끓이는 엄마의 실루엣을 확인하고서야 새 하루를 실감했다. 아침을 잘 먹어야 키도 크고, 건강하고, 학교에서 공부도 잘한다고 해서 꼬박꼬박 아침을 먹었다. 아침을 잘 먹었어도 남들 다 하는 위로 성장의 효과는 보지 못했으나, 건강하다. 어느 정도 어린 시절 꾸준히 골고루 아침식사를 한 덕을 보고 있을 것이다.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 나는 그런 아침을 더 이상 먹을 수 없었고, 이제는 어쩌다 한국에 가서 그런 아침을 먹고 나면 하루 종일 배가 불러서 저녁때까지 답답하기도 하다. 해외에 살면서 가끔 친구들에게 우리나라 아침 식사 문화를 소개하면 예외 없이 몹시 놀란다. 우리나라의 전통적 가정식 아침, 점심, 저녁 식사의 메뉴는 크게 다르지 않다. 아침에 고기를 먹고 생선을 먹어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데, 그게 외국인들에게는 다소 큰 충격인 듯하다. 나는 편리함을 선택한 대가로 더 이상 한국식 건강한 아침 식사를 소화해 내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하여 나의 가족 2인은 어디 살아도 한국말을 하고 한국 뉴스를 보지만 아침 식사만은 서양 사람들 하듯 먹어야 하는 운명을 맞이했다. 한국식 아침을 먹으면 슈퍼맨처럼 건강해진다고 해도, 나는 우리 엄마들처럼 정갈하고 다채로운 아침상을 차릴 수 없다.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몇 시에 일어나도 아침엔 언제나 졸리고 기분이 별로인 나에게는 무척 비현실적이고 초인적인 행동이다. 한국식 아침상을 차려내는 엄마들은 가족의 하루를 색색으로 여는 대단한 창조가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나의 사랑하는 동거인 그대들. 

미안합니다. 나의 창조는 빵, 우유, 커피에서 완성되었습니다.


매일 똑같은 아침을 먹다 문득 내가 살아오면서 만났던 아침상들을 돌아보았다. 

모두 자신의 아침식사가 전통이고 정석이고 옳다고 믿고 있었다. 자신들의 아침식사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뿐 아니라 활기찬 하루를 시작하기에 가장 적합하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매번 나도 확신에 찬 사람들에 설득되어 금세 그들의 아침 식사에 대한 확신에 편승하고 살았다. 내가 모르는 많은 나라에서는 또 다른 아침 식사를 할 것이고 모두 그것이 정답이라고 확신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무래도 괜찮다는 생각이다.

우리는 저마다의 확신을 가지고 아침을 먹고, 점심을 먹고, 저녁을 먹는다. 그리고 아침 식사 때문에 한 국가가 모두 병들거나 모두 슈퍼맨이 되는 일 같은 건 일어나지 않는다.

글로벌 시대에 맞게 우리는 그저 스스로가 믿는 대로 먹는 것이고, 타인의 식탁을 판단하는 우를 범하지 않고, 내 믿음이 변화하더라도 자책하지 않으며 매일 아침을 맞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이다.


그래서 나는 어떤 날은 크루아상을 먹고 어떤 날을 브리오쉬를 먹고, 또 어떤 날은 모닝빵에 버터를 발라 먹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쿠키 하나를 먹기도 하며 나의 아침을 매일 정의하지 않으나 인정할 것이다. 



이미지 출처: https://blog.hellofresh.com/breakfast-around-the-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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