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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aMya Jun 19. 2020

근자감이라는 파랑새

6월 5일은 덴마크의 제헌절이다. Grundlovsdag. 1849년 5월 6일에 덴마크의 첫 헌법이 제정되었고, 의회 민주주의의 기초가 세워졌다고 한다. 덴마크 사람들은 제헌절과 자국의 민주주의, 헌법에 대한 자긍심이 대단한 듯하다. 언어학교에서도 두어 번 제헌절과 첫 번째 헌법을 제정한 페데리코 7세에 대한 본문으로 수업을 했다. 친절하지만 시니컬은 기본인 덴마크어 선생님이 제헌절에 대해 설명할 때 유난히 밝고 환했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참 좋아하는 날인가 보다.

덴마크의 6월 5일은 제헌절이기만 한 게 아니고 또 아버지의 날이다. 아버지의 날은 Louise Dodd라는 여성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자신을 포함한 여섯 명의 자녀를 혼자 양육한 아버지를 기념하기 위해 미국에서 처음 제안했고, 1910년 미국의 Spokane시에서 첫 번째 아버지의 날을 기념했다. 이후 아버지의 날은 세계의 여러 나라로 전파되어 1931년 노르웨이와 스웨덴에 도착했고, 덴마크도 이웃 나라들의 영향을 받아 1935년 아버지의 날을 도입했다. 미국에서는 6월 셋째 주 일요일이 아버지의 날이지만 덴마크에서는 이미 공휴일인 6월 5일에 아버지의 날을 더해 제헌절과 아버지의 날을 한날에 기념한다.


그렇게 이름도 많고 사연도 많은 6월 5일이 도래했지만 팬데믹 시대를 사는 이들 답게 우리는 집에서 놀기를 실천하기로 했다. 느긋한 아침을 보내던 중 친절한 SNS를 통해 제헌절을 맞아 콘서트를 생중계한다는 안내를 받았다. 원래 제헌절에는 대규모 콘서트를 한다고 하는데 우리는 전혀 몰랐던 사실이다. 덴마크 대중음악이라면 한국 전쟁 당시 원조했던 유틀란디아호를 노래한 국민가수 킴 라센에 대해 겨우 알고 있을 뿐이었다. 젊고 유명한 가수들이 들려주는 덴마크 최신 가요를 들을 수 있는 기회라니 기대가 되었다. 

안내된 시간에 맞추어 유튜브 생중계를 틀어 놓고 셋이 나란히 앉았다. 

진행자가 시작부터 영어로 행사와 가수 소개를 하고, 가수들도 영어로 자신의 작품 소개를 하고...

아니. 왜. 덴마크 제헌절 콘서트를 영어로 진행하는 걸까? 

그것은 다름 아닌, All around the World가 콘서트를 관람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진행자도, 가수들도 몇 번이나 All around the World의 시청자들께 감사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유명한 아티스트가 출연한다고 해도 자국의 제헌절 행사를 자국어가 아닌 영어로 진행하는 건 좀 과하지 않을까?

뭐 이렇게까지...라고 생각하는 찰나 동시 접속자 수가 눈에 들어왔는데.

unbelievable! 41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앵커는 연신 '전 세계'를 호명했다.

실시간 채팅창에 실제로 '여기는 한국이에요, 여기는 타일랜드예요.'라고 하는 글이 달리긴 했지만, 그래도 우리 셋을 포함한 동시간 접속자는 다 해서 41명이었다.

"하하하하하하하"

오랜만에 배안에 모든 공기가 빠져나갈 만큼 웃었다.

가수들의 실력은 훌륭했고, 귀에 쏙쏙 들어오는 멜로디의 음악은 친절했지만, 나는 자꾸 실시간 접속자 현황에서 눈을 떼지 못했고, 그 때문에 생명이 연장되는 느낌을 받을 만큼 자주 웃었다.

콘서트가 끝날 때쯤의 접속인원은 500명 정도였고, 콘서트 이후 2주가 지난 지금의 현황은 조회수 6.1천 회이다. 

처음엔 어처구니가 없기도 했지만, 아주 자연스럽고, 전혀 과장되지 않은 톤으로 전 세계를 호명하는 그 분위기에 결국 나도 조금 취했다. 행사를 영어로 진행할 필요는 절대 없었고, 전 세계를 호명한 것은 과장되었다는 내 생각은 변함이 없지만, 이상하게 콘서트는 부드러웠고, 전 세계를 호명하는 그들의 자신감에는 신뢰가 갔다.

나 같으면 절대 그렇게는 하지 않았겠지만, 그 사람들은 꼭 그렇게 해야만 하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만큼 나는 설득당했다.

전 세계가 지켜보지는 않았지만, 전 세계를 위해 콘서트를 준비하면서 그들은 더 많은 노력을 했을 것이고, 그 과정은 더 진지했을 것이다. 자신의 음악을 전 세계에 들려주는 무대를 준비하며 가수들은 신중히 선곡을 했을 것이고, 전 세계가 자신의 음악을 사랑하게 될 것을 기대하고 설레었을 것이다. 덴마크 민주주의 기초를 놓았다는, 그래서 여전히 덴마크 사람들이 참 좋아하는 제헌절을 맞아 COVID 19로 아픈 2020년의 전 세계를 함께 위로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 근거 없는 자신감.

그 유쾌한 근자감.

2년 덴마크에 살면서, 하루에 한 번은 갸우뚱했다.

이 사람들은 도대체 뭐 때문에 행복한 걸까? 진짜 행복하긴 한 걸까?

한 시간을 크게 웃으면서, 그들의 자신감에 설득되면서, 어쩌면 그 자신감이 406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이 나라의 파랑새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개인과 공동체의 마음에 있는 대단한 자신감은 기대했던 결과를 얻어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자연스러운 불안마저 가뿐히 녹여버리는 것이 분명하다.

어떻게 하면 구성원들이 이토록 자신하는 사회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사실 그 사회는 그 자신감만큼 대단하지 못하고, 그 자신감이 때로는 이방인의 눈에 과장된 자기 최면처럼 보이더라도, 구성원들의 근거가 있거나 없거나 한 그 자신감이야 말로 사회와 구성원을 행복하다고 느끼게 해주는 파랑새 같은 것이 아닐까?

행복은 그러니까 정말 제 안에 있을 뿐이고, 근거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이 없는 것인가 보다.


그렇다면 역시 행복은 당신들의 몫이다. 나는 그렇게는 또 못하겠다.

겨우 하루 10명 조회수를 유지하는 시시한 브런치 글 하나를 협소한 관계로 구성된 SNS에 공유하기까지 부끄러움과 멋쩍음을 달래느라 마음의 수고와 수고를 더 하는 나는 All around the World를 결단코 호명할 수 없을 것이다.


#MusicAcrossBord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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