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라미수와 숙주나물과 COVID 19
COVID 19 확진자로 분류된 나는 덴마크 건강부의 지침에 따라 딸아이 방에 스스로를 격리했다.
딸아이가 없는 딸아이의 방은 적막했고, 바깥에 남은 두 사람의 시간이 막막했다.
남편과 아이는 내가 남긴 흔적들을 분주하게 소독하고 세탁했다.
소독과 세탁과 당황이 어느 정도 가라앉고 나니 몹시 망연한 목소리로 황가수가 물었다.
"저녁은 어떻게 하지?"
저녁은... 나는 딸아이의 방에 들어서자마자 그 생각에 막막했던 것이고 황가수는 이제 막막해진 것이다.
황가수는 설거지도 하고 빨래도 하지만 밥은 못한다. 한두 가지 간단한 파스타를 만들 줄 알지만, 그것도 아주 힘들어했고, 노력에 비해 결과가 그다지 훌륭하지도 않았다.
저녁은 라면을 먹기로 했다. 화상통화라는 것이 있어 참 다행이다.
황가수는 조리 과정을 생 중계했고, 나는 아이의 침대에 기대어 앉아 조리 과정을 감시했다.
달걀은 생략했다.
파를 써는 동안 너무 힘을 뺀 황가수에게 달걀을 톡톡 깨서 껍질이 안 들어가게 넣어 적당히 풀어 익히라고 하는 건 아무래도 가혹할 듯했다.
방 문 앞에 배달 온 라면 한 그릇을 다 먹고, 빈 그릇을 내어주고 나니 막막함은 여전했지만 몸이 너무 편안하여 혼자 좀 웃었다.
황가수는 부지런히 배달 앱을 다운로드하여 아이에게 맘에 드는 음식을 골라보자고 제안했지만, 까다로운 식성의 열 살은 덴마크식 피자와 햄버거를 먹고 싶지 않다고 했고, 야채와 소스가 화려한 초밥 세트도 먹을 수 없다고 했다.
두 사람은 길고 긴 대화 끝에 덴마크식 햄버거와 피자를 한 번씩은 배달시키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이틀 정도 할 줄 아는 파스타를 만들고, 배달 온 피자를 먹고, 치우고 잠 못 드는 열 살과 침대에 누워 수다를 떨어주던 황가수는 요통을 호소했고, 한숨이 늘었다.
나는 그 이틀동안 막막했던 마음이 좀 느긋해졌고, 사실 혼자있는 시간이 좀 즐거워지기도 했다.
아내의 격리 3일이 지나고 황가수는 무언가 큰 산을 넘을 사람처럼 청소기를 돌리고, 빨래를 정리하고, 과일을 깎아 아이 간식을 준비하며 가사에 열심을 내었다. 비로소 현실을 직시한 것이다.
"냉장고에 마스카포네가 있어. 티라미수 만들려고 샀는데... 내가 나갈 때까지 그냥 두면 상할 것 같아."
"티라미수?"
"응, 나도 한 번도 안 해보긴 했는데, 레시피 보니 그렇게 어렵지는 않더라고, 한번 해볼래? 마스카포네 아까워서..."
"응, 해볼게."
"엄마, 나도 같이 할게. 어떻게 하는지 말해줘."
나는 왜 갑자기 티라미수가 먹고 싶어, 마스카포네를 두 통이나 샀는지 모르겠다. 마스카포네가 아깝지만 황가수가 거부했다면 과감히 버리라고 했을 것이다. 이 상황에 황가수에게 티라미수를 강요하는 건 잔인한 일이라는 것을 나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황가수는 모든 것에 체념한 듯 티라미수 마저 받아들였다.
화상 통화를 통해 레시피 내용을 전해주고, 황가수의 요리 과정을 체크했다.
황가수는 거품기 돌아가는 소리에 많이 놀라긴 했지만, 다행히 거품기를 놓치지는 않았다.
노른자로 크림을 만들고 치즈를 섞고, 커피를 미리 끓여 두는 과정까지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지만, 티라미수의 하이라이트인 흰자 머랭에 이르러 문제가 터졌다.
흰자 머랭은 아이가 도전해 보기로 조리 시작부터 약속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거품기를 들고 준비하는 아이뒤에 황가수가 지켜 서서 잔소리를 해대는 바람에 열 살은 마음이 상해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조리는 중단되고 삐침과 호통의 전쟁이 발발했고, 나는 노른자 크림과 치즈를 이대로 버리게 될 것이 아까워 마음을 졸였다. 얼마 후에 열 살은 황가수의 품에 안겨 부엌에 다시 등장했고, 황가수의 잔소리 없이 흰자를 여기저기 튀겨가며 머랭을 올리기 시작했다.
"아빠 너무 팔이 아픈데, 더 못하겠어. 이제 아빠가 해."
황가수는 거품기를 돌리고 돌렸다.
"이게... 진짜 힘드네. 언제까지 하는 거야?"
"흰자가 구름처럼 돼야 된다는데..."
"구름? 그게 어떻게 되는 거야?"
"푹신푹신하고, 동글동글하고 뭐 그렇게 되는 거겠지."
"푹신푹신하고 동글동글? 그게 뭐지?"
여하간 황가수는 푹신 푹신과 동글동글의 확신이 올 때까지 거품기를 돌리고 돌려 머랭을 올렸다. 과연 그릇을 기울여도 흐르지 않는 구름 같은 머랭이 완성되었다.
레이디 핑거를 커피에 하나씩 적셔가며 황가수는 땀을 흘렸고, 열 살은 완성된 크림을 나란히 누운 레이티 핑거 위에 두껍게 쌓았다.
하룻밤 냉장고에서 푹 쉰 티라미수는 우유 거품을 얹은 카푸치노와 함께 아침 식사로 배달되었다.
왜 맛있지?!
많이 달지도 않고, 크림은 구름처럼 푹신했고, 마스카포네는 느끼하지 않고 부드러웠다. 모카로 내린 커피 향이 잘 스며든 레이디 핑커는 쌉쌀하고 달콤한 향을 남기고 녹아내렸다.
황가수는 자화자찬의 세계에 빠져들어 헤어날 줄을 몰랐고, 열 살은 아빠처럼 팔이 컸다면 자기도 얼마든지 만들 수 있었을 거라며 아빠를 질투했다.
생각해 보니 냉장고에는 숙주도 있을 것이다.
"냉장고에 숙주 있어... 그것도 먹어야 하는데..."
"숙주? 이거 맞지? 콩나물처럼 생긴 거?"
"응, 맞아."
"이건 어떻게 하는 건데?"
"그걸 데쳐서 무쳐야 하는데, 할 수 있겠어?
"응, 티라미수도 만드는데 뭘 못하겠어? 어떻게 하는지 말만 해봐."
한 시간쯤 지나서 황가수가 다시 연락을 했다.
"이걸 이제 프라이팬에 넣었어, 그다음엔 뭐하지?"
"프라이팬에? 왜? 프라이팬에 숙주를 넣었다고?"
"여기다 넣고, 양념 넣고 익혀야지."
"익혀? 안 데쳤어?"
"데쳤어. 물도 다 빼고."
"그런데 왜 프라이팬에 넣었어? 이제 무치면 되지."
"응, 무치려고 프라이팬에 넣었지."
"프라이팬에 넣으면 볶는 거지. 그릇에 넣고 무치면 되는데... 이미 프라이팬에 넣었으면 그냥 거기다 무쳐.. 불은 다시 키지 말고."
"아, 무치는 거. 무치는 건 불은 안 키고 하는 거구나."
........
저녁 반찬으로 배식받은 숙주나물은 맛있었다. 적당히 아삭거리고, 참기름 향이 고소했다.
"야, 진짜 맛있네. 이거 하나만 있어도 밥 먹겠다. 그렇지? 어때?"
"응, 맛있네."
황가수는 또 꼬박 하루 자화자찬을 했다.
조금 짠 떡볶이, 국물이 맑은 백숙, 양파 조각이 손가락 만한 참치 파스타와 같은 다양한 음식을 배식받는 사이 무증상자 필수 격리기간인 7일이 지났다.
다시 검사를 받고 음성 판정을 받기까지 이틀을 더 기다렸다가 꼬박 9일 만에 방을 나왔다.
아이는 환호하며 나를 반겼고, 얼굴이 홀쭉해진 황가수는 다소 차분하게 감격했다.
냉장고에 남은 식재료들을 대충 섞어 준비한 저녁 식탁에 둘러앉아 우리는 고생한 서로를 격려했다. 셋이 마주 앉은 식탁은 경쾌했다. 서로 반찬을 밀어주고, 더 먹을지 묻고, 다 먹은 그릇 설거지는 서로 안 하겠다고 미루는 그저 그런 식탁. 내일이면 다시 지루하고 지겨운 일상이 되겠지만, 오늘 이 식탁은 특별하다.
연신 웃으며 저녁을 먹은 황가수는 "아, 좋다, 참 좋네." 같은 감탄사를 남기고 티라미수와 숙주에 대한 공치사를 얼마 늘어놓다 바로 들어가 잠이 들었다.
그동안 아빠랑 지내면서 좋았던 것 화났던 것을 털어놓다 잠이 든 열 살에게 이불을 잘 덮어주고 이미 꿈나라 저편에 가 있는 황가수 옆에 누워 황가수 흉내를 내본다.
"아, 좋다, 참 좋네."
세상을 모두 아프게 한 COVID19가 내게도 왔지만 아무런 고통도 상처도 남기지 않고 떠났다.
나는 괜찮았고, 우리에게는 조금 다른 일상을 만들어 주었을 뿐이지만 크게 감사하지 못한다.
차별이 없는 전염병이 조용히 나를 떠난 것은 나의 어떠함 때문일 리가 없기 때문이다. 내 곁을 스윽 지나간 전염병은 지금도 누군가에게 치명상을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저 그렇게 된 것뿐이다.
다시 돌아온 싱크대 앞의 내 자리가 참 좋지만 어쩐지 미안하다.
누구에게 빚을 지고 돌려받은 안녕일까?
이제는 정말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