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yaMya Aug 13. 2021

도시락의 이유.

덴마크 여행

덴마크 율랜드 섬의 북서쪽에 있는 Agger라는 작은 도시에서 일주일을 보냈다. 숙소 비용, 이동이 적당한 거리와 같은 요소들에 맞추다 보니 지도 위를 헤매던 커서가 거기 멈추었을 뿐, Agger는 커녕 율랜드 섬에 대해서도 아는 게 없다.

아무리 아무리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고, 여행은 공부를 하고 떠나야 더 풍성하다고 해도, 난 그냥 떠난다. 그냥 떠나는 나의 게으름을 자책해보기도 하고, 억지로 미리 알아보려는 노력을 해보기 했다. 이해의 폭이 넓지 않은 나는 보지 못한 장소를 미리 아는 일이 어려웠고, 조금이라도 알아버린 곳은 어쩐지 심드렁했다.  

역시 모르니까 궁금하고 모르는 만큼 새로운 여행이 좋다. 몰라서 좀 못 봐도 괜찮다. 다 봐야 여행인가? 다들 알아도 나는 모르는 곳을 만나 궁금증 가득한 흥분을 경험하는 것, 처음 보는 것들에 취해 나도 신선하고 새로워지는 기분, 아무 데나 걷고 아무거나 먹고, 아무를 붙들고 질문을 하며 나의 감각, 함께한 이들의 웃음소리, 불평 소리 같은 것으로 채워진 그곳에 대한 추억이 일상의 나를 종종 다시 설레게 해주는 그런 여행. 그게 내가 좋아하는 여행이다. 

새로운 설렘을 쌓으러 그렇게 모르는 Agger를 향해 출발했다.


이번 여행은 시작부터 깊은 깨달음을 주었다.

몇 차례 덴마크 여행 중에 식당을 못 찾아 배고픈 경험이 있었기에 이번에는 라면과 스파게티 면, 쌀과 같은 식재료를 챙겼다. 이 정도면 우리 세 식구 배고플 일은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생각이 짧았다. 돌아서면 휴게소 나오는 이태리 생각만 하고, 가는 동안 먹을 점심 준비를 안 했던 것이다. 코펜하겐이 있는 셀렌 섬을 빠져나와 세계에서 세 번째 길다는 멋진 다리를 건너 첫 번째 휴게소를 만났지만 지나쳤다. 아직 시간이 이르니 좀 더 가다 먹자 하는 안일한 생각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Agger를 향해 달리고 달리는 길에 더 이상 휴게소는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식탁 그림 표지판을 따라 들어가 보았지만 식당은 없고 나무 식탁들이 여기저기 마련되어 있을 뿐이었고, 식탁에는 하나같이 준비성 좋은 덴마크 가족들이 둘러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식탁 그림은 그냥 식탁이 있다는 뜻이었다.

아, 여기는 덴마크구나. 절실히 실감하며  딸아이가 챙겨 온 과자를 아껴가며 나누어 먹었다. 부산하게 나오느라 아침도 제대로 못 먹은 우리는 나눠 먹은 과자 한 봉지로 달래지지 않는 허기에 슬픈 기분이 들 정도였다. 퓐섬을 다 지나고 율랜드섬에 들어서자 드디어 식당이 있는 휴게소가 나왔다. 휴게소가 적고 휴가철이니 사람이 많았다. 줄이 길기도 하지만, 일하시는 분들이 느리기도 하다.  한 분은 계산대에, 다른 분은 간편 식품 앞에, 다른 분은 조리대, 다른 분은 음료 판매대 뭐 이렇게 나누어서 일 하시면 참 좋겠는데, 막 다 모여서 주문을 받다가 다 이동을 해서 조리를 하다가 막 그러신다. 정말 내가 들어가서 거들어 드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그러나 하염없이 줄을 서서 주문을 하고 또 음식 나오기를 하염없이 기다리면서도 서두르는 사람도 없고 지쳐하는 사람도 없다. 기다리는 동안 아이들은 식당 뒤 잔디에서 뛰어놀고, 어른들은 돗자리를 펴고 아주 피크닉을 준비하기도 했다. 이 휴게소가 오늘의 목적지는 아닐 텐데, 다들 아직 갈길이 남았을 텐데, 여기서 이렇게 막 놀아버리다니, 참 매사에 느긋한 덴마크 사람들이다. 휴게소 뒷마당에서 여름을 즐기는 덴마크 사람들을 따라 어쩔 수 없이 잔디밭을 서성이고, 그네를 탔다. 그러고 보니 사실 우리도 바쁠게 하나 없었다. 좀 늦게 도착한다고 숙소가 어디 가는 것도 아니고, 계획된 일정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하염없는 기다림에 순응하는 마음이 생기고, 이렇게 즐기는 햇살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 즈음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그런데 내가 주문한 핫도그에 소시지가 없었다. 그렇게 막 다 같이 준비하셨는데, 핫도그에 소시지를 빼고 주시다니 정말 대단하시다!!! 

"저기, 소시지가 없어요."

"하하하하하하하하하, 어머나, 내가 소시지 없는 핫도그를 만들었어!" (옆에 있는 동료 직원분께 하시는 말씀)

그렇게 크게 웃으면서 가운데가 텅 빈 내 핫도그 빵에 소시지를 쑥 넣어 주셨다. 경상도 사투리로 이런 분을 낭창하다고 한다고 하던가...  나도 웃었다. 그래야 여기서 오래 잘 살 수 있다.

배고픈 만큼 꿀 맛이었던 핫도그를 우걱우걱 먹으며 앞으로는 어딜 가든 무조건 샌드위치 만들어 들고 다니자고 다짐에 다짐을 했다. 

덴마크에서 큰 도시를 벗어나면 피오르드, 북해, 동물원 사파리도 울고 갈 야생 동물은 무한 구경할 수 있지만, 주린 배를 채워줄 식당은 쉬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태리 살면서 북유럽 사람들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배낭에서 샌드위치를 주섬 주섬 꺼내 먹는 것을 보고, '뭐 저렇게까지, 서유럽 사람들보다 생활환경도 좋을 텐데 그냥 사서 먹지'라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이제 알 것 같다. 배낭을 들고 나서려면 무조건 먹을 것을 챙겨야 하는 사회적 배경이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의 행동을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 되겠다. 덴마크 사람들이 베로나의 아레나 극장 제일 좋은 자리에 앉아서도 가방에서 샌드위치 꺼내 먹는 건 다 이유가 있었다. 아마 더 살면 나도 막 샌드위치, 물통, 당근 같은 것을 착착 꺼내 먹으며 배고프지 않은 여행을 할 줄 알게 되겠지. 


나는 여행의 모든 순간을 좋아한다. 가봤는데 아무것도 없어도 좋고, 소문 듣고 기껏 찾아갔는데 맛이 없어도 좋다. 그리고 길에 있는 시간도 좋다. 어디쯤인지 가늠도 안 되는 길에서 나를 맞이하고 또 보내는 풍경을 마음에 담는다.

"하늘 봐, 저기 소 있다. 말 있다. 여기는 토스카나 느낌이다. 바다 색 봐, 저기는 사람들 많다. 더운데 저 사람들은 왜 저기 모여있지?" 운전 못하는 내가 이렇게 말할 때마다 황가수는 속도를 낮추고 아이도 나와 같은 곳을 바라본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셀렌섬, 퓐섬, 율랜섬의 풍경이 딸아이가 선곡한 요즘 유행하는 노래와 섞여 이제 막 시작한 여행의 설렘을 벌써 빵빵하게 채웠다. 



매거진의 이전글 들어와, 앉아봐, 먹어봐. 이태리의 돌직구 인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