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후 70일

자꾸만 처음의 다짐을 까먹는다

by 세레꼬레

어제 남편이 저녁마다 와인을 마시는 나를 보면서 자꾸 그렇게 술을 먹으면

몸에 안 좋다고 했다. 그뿐인가.

일주일 전쯤엔 아침에 9시 넘어서 일어나는 나를 보고 계속 이렇게 생활하면 역시 또 몸에 안 좋아질 거라고

했는데, 일단 그런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을 리가 없고 나 스스로도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남편은 불만이나 자기 생각을 즉각적으로 말하는 형이 아니고 오랫동안 생각하고 있다가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때 즈음에 조용하게 얘기하는 편인데, 그렇다면 남편은 그런 생각을 한 2주 전부터 해 왔다는 뜻.


내가 생각해봐도 나의 생활리듬은 퇴사 초기의 결연한 다짐에 비해 많이도 무뎌지고 무너졌다.

하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왜 꼭 생활을 정갈하게, 바르게, 정확히 맞는 시계처럼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일까.


게으른 성향 탓에 생활이 불규칙적으로 흐르고 있지만 이런 불규칙함을 사랑하지 않나.

퇴사하기 전보다 책도 많이 읽고 더 많이 걷고 와인도 사랑하게 되었고(덕분에 월 지출이 너무 늘었다)

한동안 잊고 살았던 음악도 예전에 듣던 장르보다 더 확장하여 듣게 되었는데.

그뿐인가. 요리도 직접 해 먹고 한낮의 햇살에도 예전보다 더 감사하게 되었는데.


또한 상상력은 더 늘어나서, 한 100억이 생기면 뭐에 쓰지 고민도 하게 되고

아직 짓지도 않은 교외에 있는 주택의 테라스에서 햇살을 쬐는 모습도 그리고 있으며

늘 좋아하는 귀여운 강아지와 함께 산책하는 생각에 강아지가 물건 자꾸 뜯어놓으면

혼을 어떻게 내야 하나 이런 생각까지 하고 있는데.


얼마 전 퇴사한 회사 근처의 치과에서 6개월 만에 정기검진을 할 일이 있었다.

어쩔수없이, 굳이 가고 싶지는 않았던 회사 근처에 가게 되어

간김에 친했던 회사 선배와 점심 한 끼 했는데 그 언니가 연타로 묻는 질문은 이러했다.

" 요즘은 뭐해? 주식은 잘돼? 아이 갖겠다고 했던 건 잘돼? 운동은 하니? "


사실 나 아무것도 안 하는데.


주식은 하긴 하지만 그건 내가 맨날 주식창을 들여다 본다고 해서 수익이 늘어나는 게 아니고

아이 갖겠다고 하는 건 뭐 퇴사할 때 남이 건드리기 힘든 '그럴듯한 퇴사 이유'였고

운동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몸이 잘 안 따라주는, 실은 의지가 좀 없는 상태이고


왜 자꾸 무언가를 해야 하고 무언가를 하고 있어야만 할까.

따져보니 이제 겨우 100일도 아닌, 퇴사 후 70일 남짓인데.

내 인생에서 그 70일에 무얼 열심히 하든 열심히 하지 않든 조금은 변화가 있겠지만

크게 달라지는 건 없는데.

솔직히 한 1년은 놀 생각으로 퇴직금 챙겨서 주식해야겠다 다짐하고는 나름 수익을 소소히 올려가며

살고 있는데 말이야. 역시 일단은 더 놀아야 겠다.


물론 처음 퇴사할 때의 다짐은 정갈한 삶의 태도, 꼬박꼬박 하는 운동과 산책과 청소

뭐 이런 것들이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퇴사 후 100일도 되지않아 스타트업 창업까지 생각했었지.


회사 다닐 때엔 그 누구보다 프로젝트와 일을 위해 열심히도 하고 솔직히 잘하기도 했다.

나름 통찰력이 있어서 일이든 사람이든 본질 파악이 빨랐기 때문에

일을 하면 효율이 잘 나고 결과도 좋은 경우가 많았고 소위 헛발질이 적거나 없는 편이였다.

뭘 맡겨도 120%는 달성했던 것 같고 그런 이유로 윗사람들도 동료들도 관계 업체 분들도

인정해주고 상도 주고 밑에 있던 친구들도 따라주기도 하고 그랬던 것 같은데.

회사에서의 아이덴티티가 아닌 "진짜 나"는 사실 이다지도 게으르고 나태한 인간인데.

그래서 회사 다닐 때의 동료나 친구들은 나의 이런 게으름과 "무얼 안 한다는 소식"을

이상하고 언밸런스하고 또 소위 "그러고 있기엔 아깝다"는 식으로 여기는 것 같다.


원래 누구나 여러 가지 모습의 "나"를 데리고 살아가지 않나.

회사에서의 "나"도 나의 모습이고 지금 집에서의 "나"도 나의 모습인데

하지만 솔직하게 나는 잘 알고 있다. 이게 원래의 내 모습이고 내 자아의 70% 이상은

이런 건들건들한 나태한 정신이라는걸. 확신이 있으면 움직이지만 확신이 없을때엔 그냥 이렇게

시간을 보낸다는걸. 하지만 허투루 보내는 시간 같아도 지금 나는 에너지를 얻고 있는데 말이야.

게으르고 나태한 삶 속에서 사실은 아이디어나 철학도 자란다는 것도

잘 알고 있는데. 한국 사회와 한국인의 자아 속에는 "놀고 있다"라는건 금기어인걸까.

놀다가 다시 일은 시작할 수도 아닐수도 전혀 다른 일을 할 수도 있고

인생 긴데 왜 자꾸 무언가 해야만 하는 의무감과 압박감 속에 스스로를 가두게 될까.

스스로를 가두는 것으로 그치면 또 다행인데 심지어 다른 사람에게도 은연중에 혹은 노골적으로

강요하고 있지 않나.


음악과 책과 영화와, 그리고 이런 자유로운 삶을 지탱하기 위해 현실적으로 선택한 주식과

그리고 햇살과 남편과 맛있는 와인 한잔으로 아직은 행복한 21년 봄, 퇴사 후 70일.

마흔살이 되어 탁 던져버린 사직서가 너무 적절했던 것 같다.


#음악책영화와인 #퇴사후의삶 #퇴사후70일 #날좀내버려둬 #게으르고나태한

작가의 이전글퇴사 후 2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