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수 지음
이어령 씨의 생각의 힘은 그가 했던 말, 그가 쓴 글을 읽어보면 더욱 놀라게 된다.
한 인간의 사유라는 것이 이렇게나 깊고 힘이 있을 수 있는지.
생각의 범위도 여러 영역을 넘나들며 넓은데 심지어 넓으면서도 끝이 뾰족하게
살아있는 예리함까지 지니고 있으니.
이는 마치 무림의 고수가 산꼭대기에서 오랜 기간 수련을 한 결과,
보지 않고 그저 소리만 듣고도 적의 모습을 가늠하고 공격할 수 있는 그런 레벨이랄까.
고수의 인문학자는 이러한 모습이고 이 정도의 수준임을 이 책을 통해 새삼 깨달았고,
이제는 세상에 안 계신 분이지만 그의 생각들은 이렇게 글로 남았어서
책 한 권으로 이렇게 만날 수 있어서,
이 인터뷰집을 집필해 준 김지수 작가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먼저 하고 리뷰를 시작한다.
이어령 작가가 얘기하는 '인생'이란 무엇인가를 살펴보면
인생은 진리와 깨달음의 추구로 이뤄지는데 무언가를 깨닫는다는 건
결국 누가 시켜줄 수 없는 '자신'만이 할 수 있고 그걸 찾아가는 과정이 인생이라는 것.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건 결국 누구를 사랑했느냐, 사랑하느냐이고
내가 이룬 모든 성취와 내가 가진 모든 재능 등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결국은
'선물'이라는 것. 내가 받은 것이지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
선물이기에 그저 잠깐 빌려 쓴 것인데 그에 집착할 필요 없다는 것.
또한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구절은 바로 이것.
"선생님, 럭셔리한 삶이 뭘까요?"
"럭셔리한 삶...... 나는 소유로 럭셔리를 판단하지 않아. 가장 부유한 삶은 이야기가 있는 삶이라네.
'스토리텔링을 얼마나 갖고 있느냐'가 그 사람의 럭셔리지."
"값비싼 물건이 아니고요?"
"(놀라며) 아니야. 똑같은 시간을 살아도 이야깃거리가 없는 사람은 산 게 아니야. 스토리텔링이 럭셔리한 인생을 만들어.'세일해서 싸게 산' 다이아몬드와 첫 아이 낳았을 때 남편이 선물해 준 루비 반지 중 어느 것이 더 럭셔리한가? "
자족과 군자, 예술가에 관한 내용도 인상적이었다.
특히 필연적으로 외로울 수밖에 없음을 아는 것, 그리고 스스로 터득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 내게는 깨달음이었다. 그리고 덧붙여 '실존'에 대한 언급도 흥미로웠다.
예술에 관하여 언급한 내용 중엔 흥미로운 부분인 백남준 작가에 대한 스토리였는데 무엇보다도 백남준 작가가 언급한 '부서져야지. 영원히 안 남기려고 폐품 주워다 하는 거야.'라는 말이 인상적이다.
요즘의 우리들은 무엇 때문에 그다지도 작품을 서로 소장하려고 애를 쓰는 걸까 라는 생각도 들고,
작품을 만들어내는 예술가는 결국 사라져야 하는 것을 생각하며 작품을 만드는데
그 작품을 '상품'으로 만들어 버리는 건 예술가가 아닌 사람들의 몫이었다. 누구를 위하는 걸까.
그리고 '요즘'에 대해서는 재미있는 비유도 들었다.
그가 말하는 눈물 한 방울의 개념은 이러하다.
"이 시대는 핏방울도 땀방울도 아니고 눈물 한 방울이 필요하다네. 지금껏 살아보니 핏방울 땀방울은 너무 흔해. 서로 박 터지게 싸우지. 피와 땀이 싸우면 피눈물밖에는 안 나와. 피와 땀을 붙여주는 게 눈물이야. 피와 땀이 하나로 어울려야 천 리를 달리는 한혈마가 나오는 거라네."
눈물의 세례를 받은 피땀만이 가장 큰 힘을 만들어낸다.
인간만이 흘릴 수 있는 정서인 눈물을 기억하는 것.
로봇은 마음이 아프다는 걸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
그리고 창조와 다양성에 관해서는
"창조는 카오스에서 생겨. 질서에서는 안 생기지. 질서는 이미 죽은 거라네."
그분이 얘기하는 상처의 에너지로 이뤄진 미국에 대한 표현도 흥미로웠고,
이는 평소 다양성이 무기라고 생각하는 내 생각과 일치하는 부분이었다.
죽음에 관해서는 재미있는 시각을 보여준다. 살아있는 것이 '공평하게' 모두 죽는다는 것.
그리고 살아서는 닿을 수 없는, 우주처럼 높은 곳과 심해의 바닥처럼 낮은 곳.
수직의 중심점이 생이고 수평의 중심점이 죽음이라는 것.
이는 명리(역학)에도 나오는 개념이라 신기했다. 이 분이 명리를 공부한 건 아닐 것 같은데도 자연의 이치를
깨달으면 이 정도 사유가 가능한 것인지. 본질은 모두 통하는 걸까.
나는 비교적 젊은 시절에 아버지의 죽음을 겪었기 때문에 죽음에 대해서 깨달은 게 있었는데,
죽는 건 무(없을 무)로 돌아간다는 것이었다. 화려하건 비루하건 어떤 인생을 살았든 간에 죽음 앞에선
모두 없어지고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것.
그는 이렇게 말한다.
"죽음이라는 건 없어지라고 있는 거야. 사라져 버리는 게 최고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젊은이들에게 전하는 메시지.
사실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한 통찰이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메시지일 텐데 내게는 예술과 군자, 자족에 관한 부분이 크게 와닿았고 그가 정의하는 죽음에 대한 시각이 너무 와닿았다. 내가 했던 생각들과 비슷해서 공감이 되고 내 안에서 흩뜨려져 있는 생각을 그가 명쾌하게 정의하고 정리해 준 것 같았다.
이 책은 성경처럼, 집안에 두고 가끔씩 꺼내보면서 작가가 하는 말들을 곱씹어 보면 좋을 책이다.
아마도 40대인 지금 와닿는 느낌, 내가 60대가 되어서 와닿을 느낌, 그리고 80대쯤 되어 와닿을 느낌이
모두 다를 것 같기 때문에.
책의 분량이 많은 건 아니지만 생각할 거리가 너무도 많아서 한 챕터 한 챕터 읽는데 시간이 꽤나 걸렸다.
예술과 철학, 삶과 죽음, 그리고 인간과 인생. 그리고 눈물 한 방울.
마음속에 아로새기면서
이렇게 향기로운 책을 읽을 수 있음에 행복했던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