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범신 지음
영화 '은교'의 원작 소설자로도 유명한 박범신 작가는 몇 년 전 미투 고발이 횡횡했을 때, 미투 고발 사건에 연루된 한 작가로서 지목됨으로써 정신적 타격을 크게 입은 듯하다. 작가는 이 '순례'라는 에세이에서 자신의 억울함을 항변하였으나, 무엇이 진실이 든 간에 어쨌든 사건은 벌어졌고(그것이 주작인지 오해인지 진실은 무엇이든지 간에 말이다) 작가는 입을 다물게 된다. 그는 고백한다. 가부장적인 한국 사회에서 자신도 모르게 미투에 연루될만한 언행을 자행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어디까지 문제가 되고 어디까지 허용이 될 것인지도 사실 명확하지 않지만, 어쨌든 그는 한쪽 날개를 잃어버린 새처럼 동력을 잃고선 히말라야 트레킹을 하러 떠난다.
이 책은 히말라야 트레킹, 산티아고 순례길의 여정, 그리고 작가가 폐암에 걸린 이야기 이렇게 총 3가지 주제로 이루어진 에세이인데 평생 문학 작가로서 삶을 살아온 작가이기에 문장 하나하나가 수려하고 아름답다.
그리고 히말라야 트레킹에서 느껴지는 쓸쓸하고 스산한 분위기, 문명 발달 속도가 아직은 느리기에 자연 그대로의 감성을 그대로 전할 수 있는 곳들을 지나치며 작가가 경험하는 느낌들이 문장 속에서 고스란히 독자에게 전해져 온다.
산을 넘는다는 것, 산길을 걷는다는 것 자체가 목적은 아닌듯하다.
산은 하나의 도구이자 무대일 뿐.
사실 히말라야 산을 등반까지는 못하더라도 약간이라도 경험하고 온다고 해서 인생이 달라질 리 없다.
아무것도 변하는 건 없다.
달라지는 게 있다면, 아마도 마음이겠지.
마음속에 큰 자연을 받아들이고, 그리하여 나의 사사로운 고민과 번뇌, 슬픔과 응어리들을 그 큰 자연 속에
묻어버리고 다시 내 생활로, 도시로 돌아올 수 있는 것. 그리고 쓸쓸하고 공허함이 느껴질 수도 있는
자연 속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오롯이 갖는다는 것이,
반복적으로 며칠간 걷는다는 것이,
커다란 치유의 힘으로 마음을 어루만질 수 있다는 것이 트레킹의 가장 큰 목적이지 않을까 싶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을 때에는 작가가 좀 더 밝아진 것이 느껴졌고,
시간의 인과관계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히말라야 트레킹보다는 활기찬 기운이 순례길의 여정 속에서
묻어나서 글들을 읽는 나의 마음도 약간은 밝아졌다.
그렇게 산티아고 순례까지 마쳤는데, 글의 마지막 챕터에는 폐암이 발병함을 알리는 글이라니.
역시나 다시 마음이 무거워지면서 글을 읽기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덤덤하게 신체의 아픔을 받아들이는
작가의 태도에서 어딘지 모르게 희망이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병에 걸렸는데 오히려 희망이 느껴진다니.
삶은 태어나서 죽는 것.
이렇게 참으로 단순한 여정인데 그 안에서 너무나 많은 감정의 소용돌이와 관계의 부딪힘 속에서
태어남의 의미, 죽음의 의미를 인지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잊고 살다가
어떠한 사건들이 계기가 되어서 다시 한번 삶의 의미를 개인이 찾게 되는 것인 걸까.
이 책은 드라이하면서도 섬세하고, 연약하면서도 끈질긴
그런 느낌이 드는 에세이집이다. 작가의 마음을 따라가다 보면,
나의 고민도 마음속 깊은 바닷속에서부터 수면 위로 찰랑찰랑 떠오르는 것이 느껴져서
오래간만에 사색이란 것을 해보게 되는 귀중한 독서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