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 조금 안되는 시점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므로 뭐라도 기록을 해두지 않으면 지금의 이 느낌을 까먹을 것만 같아서
기록하는 중이며 나중에 어떤 삶으로 기록이 되던 확인하는 재미가 있을것 같아서 한편 기대중이다.
퇴사하면 어떨까 라는 막연한 생각에서 행동을 하고 나니, 이렇게 시간이 절로 흘러가서 벌써
약간 모자라지만 한달 정도의 시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혼자만의 생각여행이라는 컨셉하에 퇴사 기념 제주 여행을 약 일주일간 다녀왔는데 월요일부터 시작한
여행은 금요일정도에 남편의 의도치않은 합류로 인해 혼자의 여행에서 부부여행으로 여행 컨셉이
중간에 바뀌어버렸다. 하지만 기획했던 애초의 생각의 틀에는 변화는 없었다.
여행을 시작하던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철저하게 혼자 있으면서 많은 깨달음을 얻게 되었으니.
먼저 사람은 누구나 서바이벌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다는것. 처음엔 다 안될것 같지만 막상 해보면 그럭저럭
하게 된다는것과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고 정석이 아니더라도 야매의 방법으로라도 어찌저찌 하게된다는게 신기하다는것. 운전을 안한지는 몇년된다. 잠깐 차를 가지고 있던 20대 중후반때에도
운전을 잘했던건 아니고 언니가 쓰던차를 어쩔수없이 내가 받게되어 가끔 깔짝거리며 끌고 다닌게 전부.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 차를 가지고 강남역 오피스텔에서 나와 양재 이마트에도 다녀오고, 분당에서 신촌까지 강변북로를 타면서 내비게이션 없이 왔다갔다한적도 있고, 유학준비 한다면서 학생비자를 위한 신체검사를
위해 삼성의료원에 다녀온 기억도 있다. 생각해보니 거기서 더 나아가 서울에서 300km쯤 떨어져있던 부모님댁에 왕복으로 다녀온적도 있으니 운전을 아예 안했던 거라고는 말을 못하겠네.
어쨌든 그랬던 운전이긴 한데 지금 사는 집의 주차 컨디션이 넘 어렵다보니,
그리고 남편이 운전을 잘 하다보니 자연스레 멀어져간 나의 운전면허증이 제주도에서는 어쩔 도리 없이
부활한 것이다. 이건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제주에서의 이동을 위해서는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니까.
2년만에 다시 시작한 운전은 역시나 내 예상대로 종일 버벅대면서 주위의 클랙션을 유발시켜가면서
하지만 빠르게 적응이 되더라. 해 본 가락이 있으니 처음엔 버벅대지만 금방 익숙해지는것이지.
여전히 잘한다고는 말 못하겠지만 그럭저럭 목적지를 티맵에서 찍고 주행은 할 수 있는거지.
하지만 여전히 어딜 다녀온다는거에 스트레스를 받았기때문에 여행의 동선이 자연스레
단조로워 지곤 했다. 나 혼자 하는 여행인데 스트레스 가중치는 낮춰야할거 아닌가.
그리고 혼자 다니다보면 뭐 엄청나게 가고싶은데가 많아지는것도 아니다.
그리고 낮에 뭔가 음주의 욕구를 많이 느끼게되는데 그럼 또 음주운전 걸릴게 생각나서
선뜻 술도 못 마시게 되고 좋은 숙소에서 그냥 하루종일 음악 들으며 책보는것도 충분히 즐겁다.
또 다른 깨달음이란, 환경이 변화한다고 해서 생각의 주제가 크게 바뀌지는 않는다는거.
고민의 방향과 주제는 아마 내가 전세계 어디에 있건 똑같을것 같다.
하지만 그 고민에 대해서 안달복달하는 초조함과 고민의 농도에 있어서는 조금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이번 여행에서 배우게 되었다. 장소가 바뀌기때문에, 그리고 그 장소는 나의 일상과 매우 다르기때문에
고민이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 하더라도, 두번째 숙소였던 귤밭에어비앤비 같은 곳에서 햇빛을 쐬고 있자니
고민 대신 "지금 순간의 행복"이 강해지는걸 느낄수 있었다. 햇살의 힘이 이렇게 강력하던것인가.
심각한 고민들도 강한 햇빛 속에 살균 혹은 멸균되어 많은 부분 옅어지는게 아니던가.
난 여전히 현금흐름에 대해서 고민하고 또한 내 앞날에 무엇으로 먹고살지 치열하게 고민중이다.
지금 이 글을 쓰는 곳은 다시 돌아온 내 방 책상 앞이여서 더욱 그러하겠지만.
다시는 남이 주는 월급을 받는 "회사"로 돌아가는 일은 만들지 않겠다 라고 다짐하고 뛰쳐나온 회사이지만
늘 스윗하게 꽃히던 월급을 생각하면 다시 1년정도만 타협해서 회사를 다녀볼까 하는 생각도
스멀스멀 올라오는게 현실이다. 하지만 제주도에 간다고 해서 고민의 종류가 바뀌는게 아니듯 회사로 돌아간다해서 내가 크게 생각하는 고민의 틀과 주제가 바뀔리도 없고, 바쁘다는 핑계로 미루다가 또 다시 나이만 먹어서 "이건 아니야"라고 고민하면서 밤을 새우는 날이 또 돌아올 것이라는 것도 이제는 너무 잘 알고 있다.
사람의 서바이벌 능력과 급한대로 뿜어지는 해결능력, 그리고 환경의 변화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 절대고민
같은 것들은 나 말고도 각각 모두의 인생에 있겠지. 사실은 2년전에도 혼자 했던 여행에서 고민은 사라지지
않는다는걸 깨닫고 왔었는데, 이번엔 그 깨달음을 그저 확인하고 왔다고 해두자.
덧붙여 이번 퇴사여행에서 얻은 깨달음이 하나 더 있는데 나의 10대와 20대에 너무나 중요했던
음악에 대한 소중함과 나의 20대 후반과 30대를 지탱해줬던 책에 대한 고마움이다.
블루투스였건 오디오시스템이였건 제주 여행에서 숙소마다 들을 수 있었던 멋진 사운드와
거기에 더불어 마시던 와인 한잔, 그리고 소설책이든 에세이든 각각의 책들은
이번 여행을 흡족스럽게 해 준 최고의 덕목이였다. 물론 중간중간 인스타 스팟 찾아다니기도 하고, 맛집
사진을 찍기도하고 그랬지만서도 그래도 가슴 깊숙이 들어온건 책과 음악 아니겠나.
살짝 비싼 금액 지불에 대한 고민을 했었는데 이번 여행은 후회가 없다.
싸게 할 수도 있는 여행이지만, 뭔가 좋은 숙소들에 가고 싶었던 마음이 커서 30대의 마지막을 자축하면서
크게 질렀는데 몇년 지나도 가끔 생각날 것만 같은 여행이 된것 같다.
생각해보니 인생 어떻게 살겠다 뭐이런 다짐같은건 딱히 없었는데 사실 그런 다짐쯤은 당연히 없을거라고
예상되는 바였다. 거창하게 여행 가면 오히려 그날그날의 먹는거에 충실한 하루하루를 보내다 오게되더라고.
어쨌든 퇴사 후 한달, 이렇게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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