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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영덕 Dec 21. 2022

공군사관생도 시절

   

3월 2일 입교식에는 어머니와 동생들, 친구들이 와서 축하해 주었다. 생도 제복을 입은 나는 가입교 훈련을 이겨낸 나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입학식을 마친 후 면회가 허락되어서 어머니가 준비해 오신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 내 인생에 있어서 이때만큼 많이 먹은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가입교 훈련 동안 항상 배고픔을 느껴서 그런지 이후 나에게는 식탐이라는 것이 생겼다. 예전에는 음식을 많이 먹지 않았다. 밥을 먹다가도 시장기가 사라지면 수저를 놓곤 했는데, 가입교 훈련 이후에는 배가 부를 때까지 먹어야 만족이 되는 습관이 생겼다. 그래도 몸무게는 늘지 않았다. 아마도 운동량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생도 생활의 가장 큰 특징은 모든 것을 규정에 따라 해야 한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적응이 되지 않았다. 여름에는 오전 6시에 일어나 점호를 하고 간단히 구보를 한 다음, 아침 식사를 하고, 8시부터 12시까지는 학과 수업, 그리고 점심 식사 후에는 대개 체육 활동이나 군사훈련을 했다. 그리고 일과 후에는 몸을 씻고 오후 5시에 저녁 식사를 했다. 이후에는 약간의 자유시간과 자습시간이 주어졌다. 그리고 오후 10시에는 모두 불을 끄고 취침을 해야 했다. 

공군사관학교에서는 1학년 생도를 ‘메추리’라고 불렀다. 아직 정식 생도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1학년은 청소 및 잔심부름을 도맡아 해야 했다. 그리고 틈이 날 때마다 2학년 생도들이 ‘지도’라는 명목으로 ‘기합’을 주었다. 아침 식사를 한 후 학과 수업이 시작되기 전까지 기합받다가 ‘학과장’에 들어서면 갑자기 긴장이 풀리고 졸음이 쏟아졌다.

고등학교 때까지 나는 수업시간에 졸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사관학교에서는 무척 많이 졸았다. 학과장에 들어서기만 하면 잠이 쏟아졌다. 어느 날은 국어 담당 교수님에게 지적을 받았다. 이분은 수업시간에 졸다가 걸리면 무자비하게 구타를 하거나 벌을 주는 교수로 악명이 높았다. 그런데 수업 첫 시간에 내가 졸다가 걸린 것이다. 이제 죽었구나 했는데, 이름이 뭐냐고 묻고서는 수첩에 내 이름을 적고 나서 한 번 더 걸리면 용서하지 않겠다고 했다. 이후 나는 국어 수업시간만 되면 긴장이 되어 혀를 깨물면서 졸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생도 생활 중 좋았던 것은 외출 시간이었다. 1학년 때에는 한 달에 두 번 일요일 외출이 허용되었다. 학년이 올라가면서 외출 횟수가 늘어나는데, 4학년이 되면 거의 매주 ‘외박’(1박 2일의 외출)이 허용되었다. 집이 지방에 있는 생도들은 보통 사관학교에 들어가서 잤지만, 나는 집이 서울이기에 집에서 잤다. 

그런데 외출, 외박보다 더 좋은 것은 1년에 두 번 있는 3주간의 휴가였다. 이때에는 사관학교에서 할 수 없었던 많은 것을 했다. 특히 여행을 많이 했다. 친구나 동기생들과 함께 설악산, 경포대, 홍도, 제주도 등에 가서 마음껏 자유를 누렸다. 외출과 휴가는 나의 생도 생활에 있어서 윤활유와 같은 것이었다. 내가 생도 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졸업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외출과 휴가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였다. 

생도 생활을 잘하려면 공부도 열심히 해야 했다. 당시 공군사관학교에서는 매 학기 시험을 보았다. 그리고 하위 5퍼센트의 성적을 받은 생도는 퇴교 심의 대상이 되거나 퇴교를 당했다. 그래서 독감에 걸려 지독하게 아팠을 때도 나는 덜덜 떨면서 담요를 뒤집어쓰고 시험공부를 한 적이 있다. 덕분에 학과 성적은 그런대로 양호했다. 하지만 공부는 별로 재미없었다. 전공이 적성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3학년부터 전공을 선택했다. 나는 국방관리학과를 선택했다. 유일한 문과 전공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 교장은 국방관리학과가 공군사관학교에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조종사 양성에 필요한 전공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국방관리학과는 성적이 좋지 않은 생도들만 선택하게 하고, 나머지 생도들은 항공, 기계, 전자공학 중에서 선택하도록 했다. 지금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조치였다. 

할 수 없이 나는 기계공학을 선택했다. 전자공학은 전자회로 등 복잡한 것이 생각나서 끌리지 않았고, 항공공학은 너무 낯설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잘 모르지만 많이 들어 본 이름의 기계공학을 선택했다. 그런데 기계공학은 내가 막연히 알고 있던 그러한 학문이 아니었다. 

당시 교수 중에는 기계공학 분야에서 유명한 분이 계셨다. 모두 그분이 강의를 잘한다고 했지만, 나는 그분의 강의를 들으면서도 그 진가를 느낄 수 없었다. 강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문과를 전공했다면 잘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과 당시 교장에 대한 원망이 없지 않았다.

그런데 생도 생활 중 가장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 것은 내무성적이었다. 나의 내무생활 성적은 꼴찌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공군사관학교에서는 매사에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사고를 요구하였으나 나는 그렇게 생활하지 못했다. 게다가 선배 생도들에게 불려가 지적을 받거나 구타를 당하게 되면 모욕감과 분노를 느꼈다. 이렇게 지내다 보니 생도 생활에 대한 나의 태도는 상당히 부정적이었다.

언젠가 이런 일이 있었다. 당시 사관학교에서는 오후에 체육 수업이나 무도 훈련, 군사훈련 등을 했다. 그런데 이 시간을 대부분 사역(잡일)으로 대체하고 있어 한 동기생에게 불만을 토로했다. 그랬더니 그 동기생은 “무슨 소리야, 우리 학교만큼 교육제도가 잘 되어 있는 곳이 어디 있냐?”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너무 무안해서 아무런 말도 못 했다. 그 동기생은 소위 잘 나가는 모범생도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태도로 생도 생활을 하니 아침 기상나팔 소리가 듣기 싫었다. 언제까지 이러한 생활을 해야 하는가 싶었다. 자고 싶을 때 자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일반 대학 생활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다시 자퇴를 생각해 보았다. 그런데 어느 날, 어머니가 당신 꿈에서 내가 작업복을 입고 왔더라는 이야기를 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보통 퇴교를 당하면 작업복을 입고 나가기 때문이었다. 

나는 어머니를 생각해서라도 생도 생활을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마음 깊이 기도를 했다. 기상나팔 소리가 들릴 때마다 하나님을 불러보자는 마음이 생겼다. 나는 이튿날 아침, 기상나팔 소리가 들리자마자 소리를 내어 하나님을 불렀다. 그랬더니 기운이 생겼다. 그때 이후 나는 한동안 가뿐한 마음으로 이불을 박차고 일어날 수 있었다. 

나의 생도 생활은 이때부터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가능하면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즐겁게 생도 생활을 하려고 노력했다. 물론 그 가운데서도 부침이 있었으나 그 덕에 생도 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졸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4년간의 생도 생활은 정말 힘들었으나 나의 삶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시기를 통해 나는 나 자신의 한계를 깨닫게 되었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인내심과 타인에 대한 배려심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공군사관학교 졸업식 날 어머니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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