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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영덕 Sep 30. 2024

제1장  유년의 기억

제1절 돌사진과 가족 이야기     

나는 1956년 7월 21일(음력) 부산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정확히 몇 시에, 어느 동네에서 태어났는지는 알지 못한다. 이전에는 관심이 없었고, 지금은 알고 싶어도 답해 줄 사람이 없다. 알만한 사람들은 이미 모두 세상을 떠났다.

나의 본적 주소는 서울시 성북구 정릉동 7-73으로 되어 있다. 아마도 이 기록은 혜화초등학교 졸업을 앞둔 1968년쯤에 이루어졌으리라 추측된다. 왜냐하면 이때 초등학교 담임선생님께서 나의 호적이 없다고 어머니를 모시고 오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나의 아버지는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부모를 일찍 여의고 형들과 지내다가 해방 이후 홀로 남한으로 왔다. 사진을 보면 아버지는 키가 크고 말랐으며 얼굴이 갸름하다. 아버지는 부산에서 시계 판매를 하던 중 어머니를 만나 결혼했다. 아버지는 노래를 잘해 기생에게서 공짜 술을 얻어 마실 정도였으며, 인정이 많아서 남을 잘 도와주었다고 했다.

아버지에게는 3명의 형이 있었는데, 그중에서 셋째 형이 아버지에게 가장 잘해주었다. 그런데 그 셋째 형이 남한으로 와서 아버지를 찾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아버지는 너무 기뻐서 어머니와 함께 바로 서울로 올라갔다. 노동자 복장의 큰아버지와 아이를 업은 큰어머니의 모습은 보기에 딱했다. 그리하여 아버지는 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서울로 이사 와서 큰집 가족과 살림을 합쳤다. 그리고 큰아버지와 같이 극장 <단성사> 옆에 있는 상점을 얻어 사업을 시작했다. 아버지는 시계를 판매하고, 큰아버지는 금은보석을 판매했다. 

그런데 어머니가 염려했던 대로 두 가족은 종종 갈등을 겪었다. 특히 아버지와 큰어머니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것이 큰집과 살림을 합쳤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아무리 의좋은 형제일지라도 결혼 후에 살림을 합쳐서는 안 된다고 몇 번이나 강조했다.

어머니는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태어났다. 외증조부 내외를 비롯하여 3대가 함께 살았다. 외증조부는 해방 이전 독립군을 돕다가 일경에게 잡혀 고문을 받기도 했다. 해방 이후에는 남한으로 내려오려고 했으나 식솔들이 많아서 실행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막내아들은 남한으로 내려보냈다. 그가 인민군으로 징집될까 봐 염려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그의 막내아들은 부산에 있는 회사에 취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딸을 신의주에 두고 왔기 때문에 외증조부는 나의 어머니에게 그 딸을 부산에 있는 막내아들에게 데려다주도록 했다. 이때 어머니 나이는 열세 살이었다. 어머니는 심부름을 위해 부산에 갔다가 삼팔선이 막히는 바람에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이때부터 부산에서 지내다가 23살 때 아버지와 결혼했다. 결혼 초기에는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고,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있어서 어머니는 행복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어머니는 내가 한의학을 공부하던 외조부(어머니의 아버지)와 많이 닮았다고도 했다. 외조부는 항상 책을 끼고 살아서 밥 먹을 때에는 제발 책을 보지 말라고 외조모로부터 잔소리를 많이 들었다고 한다. 실제로 나의 돌 사진을 보면, 잔칫상 앞에서 내가 까만 옷을 입고 연필을 물고 있다. 이 사진은 후에 교수가 될 나의 미래를 예시한 것 같아 신기하다.     


돌사진


아버지와 어머니


제2절 초등학생 시절     

초등학생 이전 시기에 관한 기억은 별로 없다. 가장 오래된 기억은 ‘양갱의 맛’으로 남아 있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기 전이었다. 종로에서 시계 판매를 하고 있던 아버지는 내가 가면 나를 안고 근처에 있는 극장 <단성사>로 들어가 매점에서 양갱을 사 주었다. 이때 먹었던 양갱이 참 맛있었던 것 같아 이후 가끔 먹어봤지만 그렇게 맛있지는 않았다.

나는 초등학교를 두 군데 다녔다. 처음에는 서울에 있는 교동초등학교에 다녔다. 이 시기 일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길을 잃고 헤맸던 일은 분명히 기억난다. 어느 날 나는 동네 아이들을 따라 도서관에 갔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일행과 떨어지게 되었다. 길을 잃은 나는 겁이 나서 울었다. 그때 어떤 아주머니가 나를 파출소로 데리고 가 주어서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나는 소위 ‘길눈’이 어두운 편이다. 그래서 그런지 길을 잃고 헤매는 꿈을 꾼 적이 몇 번 있다. 이것은 어머니를 닮은 것 같다. 청주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살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어머니는 약국에 다녀오겠다고 하면서 집을 나섰는데, 얼마 후 아내에게 전화했다. 약국에 왔는데 우리 집이 안 보인다는 것이다. 나중에 아내의 설명을 들으니 어머니는 약국 앞문으로 들어갔다가 옆문으로 나오는 바람에 길을 잃었다는 것이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을 마칠 무렵 아버지는 폐병 때문에 서울대학병원에 입원하였다. 이후 우리 가족은 종로에서 명륜동으로 이사했다. 나는 집 근처에 있는 혜화초등학교로 학교를 옮겼다. 서울대학병원은 학교에서 가까웠기 때문에 학교 수업이 끝나면 가끔 걸어서 병원에 갔다. 내가 병원에 가면 아버지는 무척 반기면서 잘게 썰어 설탕에 절인 토마토가 들어있는 노란 양은 냄비를 주셨다. 단 것을 좋아했던 나는 국물까지 모두 맛있게 먹었는데, 이때 나를 보고 웃던 아버지의 미소가 생각난다.

아버지가 퇴원한 후 우리 가족은 다시 정릉으로 이사를 했다. 아버지의 요양을 위해 공기 좋은 곳을 택한 모양이었다. 아버지가 운영하던 상점은 큰아버지가 맡아서 운영하고 대신 큰아버지는 우리 가족에게 조그만 가게와 셋방을 마련해 주었다. 이때부터 어머니는 돈을 벌기 위해 식당 일을 시작했다. 어머니의 고생이 시작된 것이다.

당시 어머니는 우리 3형제의 군것질용으로 집에 ‘뻥튀기’를 사놓았다. 뻥튀기는 쌀을 둥글게 튀겨 놓은 것인데, 우리의 얼굴보다 컸다. 그런데 뻥튀기가 들어있는 비닐로 된 큰 자루는 아버지가 누워 있는 방에 놓여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뻥튀기를 먹기 위해 조심조심 까치발로 방에 들어가곤 했다. 

그래서인지 아버지는 어느 날 우리 3형제에게 돈을 주면서 먹고 싶은 만큼 과자를 사 오라고 했다. 우리는 신이 나서 동네 근처에 있는 과자 가게에서 과자를 한 아름 사 왔다. 아버지는 웃으면서 마음껏 먹으라고 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에 과자를 맛있게 먹는 어린 자식들의 모습이 보고 싶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1966년 2월 1일 내가 초등학교 4학년이 되기 전에 돌아가셨다. 겨울 방학 중이라 우리 3형제는 동네 아이들과 함께 놀고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고 했다. 어머니는 나에게 동생들과 함께 집에 있으라고 했다. 나는 슬프다기보다 불안했다. 항상 어두컴컴한 방에 혼자 누워 계셨기에 조금 무섭다는 느낌을 주던 아버지였지만 계시지 않으니까 더욱 무서웠다.

어둠이 깔리고 밖이 깜깜해진 후에야 상복 차림의 어머니가 방으로 들어왔다. 어머니는 우리를 부둥켜안고서 크게 소리 내어 울었다. 우리 3형제도 따라서 울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슬펐기 때문이라기보다 어머니가 우니까 덩달아 울었던 것 같다.

이후 나는 아버지의 조그만 수첩에 쓰여 있던 유서 비슷한 내용의 글을 본 적이 있다. 어머니에게 미안하다고 하면서 아이들을 잘 부탁한다는 내용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슬펐지만, 철이 없었기 때문인지 쉽게 일상으로 돌아갔다.

당시 정릉은 그야말로 산 좋고 물 좋은 곳이었다. 북한산에서 흘러나온 계곡의 물은 조그만 폭포와 함께 아이들이 놀기에 충분히 큰 웅덩이를 만들어 놓았다. 약 1 미터 높이의 바위 사이로 떨어지는 물은 보기만 해도 시원하게 느껴졌다. 그곳은 우리들의 훌륭한 놀이터였다. 여름에는 아침 일찍 친구들이 우리 집 앞에 와서 ‘해가 똥~창(동창)에 떴다’고 하면서 나를 불렀다. 그러면 나는 벌떡 일어나 아이들과 함께 웅덩이로 달려가 물장난을 하며 놀았다. 내가 ‘개헤엄’과 ‘모재비헤엄’을 배운 것은 이때였다.

그런데 이곳은 가끔 물이 많이 내려와 소용돌이가 생기기 때문에 조심해야 했다. 많은 사람이 이곳에서 죽었다는 이야기도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 나 역시 이곳에서 죽을 뻔했다. 웅덩이에서 수영하며 놀던 나는 물이 갑자기 불어난 바람에 생긴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당시 계곡 위에는 청수장이라는 풀장이 있었다. 그곳의 물을 흘려보냈기 때문인지 갑자기 물이 불어났고 웅덩이에 소용돌이가 생겼다. 나는 빠져나오려고 노력했으나 자꾸만 물이 떨어지는 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결국에는 물속에 잠기면서 물을 마셨다. 그 순간 물속에 세 번 들어가면 죽는다는 말이 생각났다. 소리치는 아이들의 모습도 보였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런데 이때 중학생이었던 동네 형이 나를 구해주려고 다가왔다. 나는 정신없이 그를 붙잡았다. 그 바람에 둘 다 죽을 뻔했다. 다행히 그 형이 나를 소용돌이 밖으로 밀어주어서 우리는 웅덩이 밖으로 무사히 나올 수 있었다. 내가 죽을 뻔했던 최초의 사건이었다.

당시 정릉은 서울에 속했으나 시골에 가까웠다. 아이들이 노는 방법도 달랐다. 처음에는 개구리를 잡아 뒷다리를 구워 먹는 아이들을 보고 놀랐으나 나중에는 그 맛이 고소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동네 아이들과 함께 오래된 느티나무와 소나무가 멋지게 어우러져 있는 공원에서 주로 전쟁놀이를 하였다. 영화에 나오는 무사처럼 상의로 얼굴을 가리고 연탄재를 던지며 놀았다. 배가 고프면 근처 밭에서 무를 뽑아 먹기도 했다. 이처럼 장난치며 놀기 좋아하던 나는 호기심도 많았다.

어느 날 한 친구가 ‘땡땡이’를 치자고 했다. 그는 평소에도 학교에 자주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두렵기도 했지만 무언가 재미있을 것 같다는 호기심이 발동하여 그의 말대로 해 보기로 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긴장했던 탓인지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약속 장소로 갔다. 

친구와 함께 도착한 곳은 동네가 내려다보이는 조그만 야산이었다. 그 친구는 아침에 늦게 일어나면 가끔 이곳에 온다고 했다. 나는 무언가 새롭고 즐거운 일을 기대하고 왔는데 따분하기만 했다. 학교에 가지 않은 것이 후회되었다.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서 동네 아저씨를 만났다. 우리는 황급히 도망쳤다. 나는 어둑해질 무렵에 집으로 들어갔다. 어머니는 조용한 목소리로 방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방에 들어갔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어머니가 물었다. 

“너 어디 갔다 왔니?”  

나는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었다. 그러자 어머니는 “너 이제 학교 그만둬라.”라고 하면서 내가 메고 있던 가방을 빼앗으면서 책과 가방을 불살라 버리겠다고 했다. 나는 너무 놀라 울면서 가방을 붙들었다. 어머니는 매를 들었다. 회초리로 맞는 나도 울고 때리는 어머니도 울었다. 어머니에게 처음 맞는 매이자 마지막 매였다. 

이때까지 나는 어머니를 세상에서 가장 예쁘고 마음 좋은 여자로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아비 없는 자식이란 말을 듣지 않도록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라’는 어머니의 꾸중을 들으니 어머니가 무서워졌다. 그리고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이 슬펐다.

당시 어머니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개가하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주위에서는 서른넷의 젊고 예쁜 여자가 혼자서 어떻게 세 명의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살 수 있겠느냐며 아이들을 큰집에 맡기고 개가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큰어머니는 절대로 아이들을 맡을 수 없으니까 아이들을 고아원에 데려다주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라고 하면서 코웃음을 쳤다고 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도움으로 부자가 된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느냐면서 종종 화를 내곤 했다. 그리고 나에게는 가끔 이렇게 말했다. 

“장남인 네가 공부 잘해서 성공해야 한다. 보란 듯이 성공해서 큰집에 보여주어야 한다.”          

어머니는 이런 기대 때문인지 동생들은 정릉에 있는 초등학교에 입학시켰지만 나는 그냥 혜화초등학교에 다니도록 했다. 당시 혜화초등학교는 경기중학교에 60여 명을 입학시킨 좋은 학교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집에서 학교까지 가려면 한 시간 정도 버스와 전차를 타야 했다. 정릉에서 돈암동까지 버스를 타고 가서는 돈암동에서 혜화동 로터리까지 전차를 타고 갔다. 당시 버스는 3원, 전차는 2원 50전을 받았다.

나는 아침에 갈 때는 버스와 전차를 이용하고 학교에서 집으로 갈 때는 돈암동까지 걸어가서 그곳에서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갔다. 대신 남은 돈으로 2원 50전 하는 ‘미루꾸(밀크캐러멜)’를 사 먹었다. ‘미루꾸’란 비닐봉지에 10개씩 넣어 길거리에서 파는 싸구려 캐러멜이었는데, 이것을 먹으면서 걸으면 힘든 것도 몰랐다.

다만 이때 내가 싫어했던 것은 혜화동 로터리를 지나 삼선교로 갈 때 돌로 만든 축대 안에 있는 장의사 앞을 지나가는 일이었다. 나는 항상 그 앞에서 눈을 감고 숨도 쉬지 않고 빨리 뛰어갔다. 그만큼 나는 죽음과 관련된 것을 무서워했다. 그래서 버스를 타고 그 앞을 지나갈 때도 나는 눈을 감거나 고개를 돌려 외면하였다. 아마도 이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어머니가 상복을 입고 애통해했던 일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에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저녁을 먹고 과외 공부를 하러 갔다. 당시에는 중학교에 들어가려면 입학시험을 보아야 했기 때문에 많은 아이들이 과외 공부를 했다. 나는 ‘배밭골’이라는 동네에서 과외 공부를 했다. 현재 국민대학교가 있는 곳 근처였다. 아마도 그곳에는 배 밭이 많았던 모양이었다. 과외 첫날 선생님은 나에게 혜화초등학교에 다니는 학생의 산수 실력 좀 보자며 문제를 풀게 했다. 내가 문제를 풀자 선생님 부부가 흐뭇해하던 모습이 기억난다.

과외를 같이 받던 아이들은 과외선생님이 매우 무섭다고 했다. 시험 점수가 나쁘면 전날 물에 담가두었다가 꺼낸 박달나무 몽둥이로 엉덩이를 때린다고 했다. 그리고 과외 선생님은 문제를 푸는 방법을 몰라서 틀리면 용서해 주지만 계산을 잘못해서 틀리면 용서하지 않는다고도 했다. 나는 선생님이 무서웠지만 그래도 과외 수업시간은 좋아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과외 선생님이 수업 후에 30분 정도 <삼국지> 이야기를 해 주었던 일이다. 선생님이 이야기를 끝내면 결말이 궁금하여 항상 아쉬움을 느꼈다. 어쨌든 선생님 덕에 나는 산수 시험을 볼 때마다 계산을 정확하게 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인지 이후 나는 수학 과목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학교 교실에서 배치고사 시험을 보고 있었는데, 중학교 입학시험이 없어졌다는 소리가 들려 왔다. 학생들은 모두 만세를 불렀다. 덩달아 신이 난 나는 답안지를 대충 작성하고 교실을 나왔다. 그리고 그때부터 신나게 놀았다. 그러다 나는 큰 사고를 낼 뻔했다.

당시 혜화초등학교는 넝쿨나무가 학교 건물 전체를 감싸고 있었기에 고풍스러운 느낌을 주었다. 그런데 학교에는 이상한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학교 마룻바닥 밑에는 커다란 문이 있고, 그 문 안에는 무언가 중요한 것이 들어있다고 했다. 나는 마루 틈 사이를 들여다보았다.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친구 두 명과 함께 학교 마룻바닥 밑에 들어가 보기로 했다. 플래시가 없어서 우리는 성냥과 종이를 사용하기로 했다. 그런데 친구 한 명이 종이 대신 체육책을 가져왔다. 체육책은 수업 시간에 사용하지 않아서 필요 없다고 했다.

점심을 빨리 먹은 후 우리는 마룻바닥 밑으로 들어갔다. 마룻바닥 밑 공간은 허리를 조금 구부리고 걸어갈 수 있을 정도로 높고 넓었다. 지하실 특유의 냄새와 음습한 공기는 우리들의 모험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체육책을 뜯어 성냥불로 불을 붙이니 주위가 환해졌다. 우리는 긴장한 채 불을 들고 앞으로 나아갔다. 무슨 보물을 찾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종이에 붙은 불은 오래가지 못하고 빨리 꺼졌다. 불이 꺼지면 어디선가 시체가 벌떡 일어나 달려들 것만 같았다.

그런데 얼마쯤 걸어가니까 정말로 성문 같은 것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우리는 그 문을 열려고 힘을 썼다. 그런데 갑자기 우리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선생님이 우리에게 빨리 나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큰일 났다 싶어서 황급히 밖으로 나갔다. 

우리는 교실로 끌려가 무릎 꿇고 손을 들고 있어야 했다. 이후 교장실에까지 불려 갔다. 교장 선생님은 우리가 학교를 불태울 뻔했다고 하면서 부모님을 모시고 오라고 했다. 혼날까 봐 걱정했으나 어머니는 야단치지 않았다.

당시 나는 공부보다 노는 것을 좋아했다. 동생들과 함께 밤늦게까지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놀았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버스 뒤에 매달리는 놀이를 좋아했다. 위험했지만 그만큼 재미있었다. 어느 날은 빈 버스에 몰래 탔다가 기사에게 발각되어 차에서 뛰어내렸는데, 하마터면 다리 밑 개울로 떨어질 뻔하기도 했다. 

이처럼 놀기 좋아했던 나는 만화책도 좋아했다. 집에는 내가 읽을만한 책이 없었기 때문에 동네 만화방에 주로 갔다. 만화방 주인아저씨는 손님이 별로 없어서인지 돈은 조금만 받고 만화를 마음껏 보게 해 주었다. 지금 기억나는 것은 <동물전쟁>이라는 만화이다. 진도 소령과 반둥 대위라는 인물이 등장하는 전쟁만화였다.

그런데 어느 날 공부는 하지 않고 놀기만 하는 아이의 이야기를 그린 만화를 보면서 나의 모습을 돌아보게 되었다. 부끄러웠다. 어른이 되어서도 만화만 보게 될까 봐 걱정되기도 했다. 이후 나는 의도적으로 만화를 보지 않았다. 요즘 한국 만화의 수준이 아주 높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나는 지금도 만화를 보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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