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과 결심
1969년 3월 2일에 나는 신일중학교에 입학했다. 신설 학교라서 그런지 모든 것이 깨끗했다. ‘제2의 경기고등학교’를 지향하는 학교라고 했다. 그래서 일류 대학 출신 선생님들이 많다고 했다. 그런데 이 학교에서는 정규 수업 시간에 성경 내용을 가르치고 예배도 드리게 했다. 내가 기독교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이때부터였다고 할 수 있다.
중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어느 날 어머니가 사기를 당했다고 했다. 다른 사람에게 저당 잡혀 있던 집을 모르고 샀다는 것이다. 우리 가족은 할 수 없이 아는 분의 소개로 당시 집 값이 싼 응암동으로 이사했다. 그곳에서 어머니는 조그만 방이 딸린 국밥집을 운영했다. 그래서 방에 들어오면 항상 우거짓국 냄새가 났다.
우리는 이곳에서 학교에 다녔다. 나와 바로 밑 동생은 학교가 미아리와 정릉에 있었기 때문에 새벽 4시에 일어나서 부랴부랴 우거짓국밥을 먹고 버스를 탔다. 그런데 한 번에 가는 버스가 없었기 때문에 중간에 다른 버스로 갈아타야 했다. 게다가 대부분의 버스는 오래되어서 그런지 가끔 고장이 났다. 특히 무악재 고개를 넘다가 멈추는 일이 종종 있었다. 버스가 고장 나면 승객들은 모두 내려서 버스를 밀어야 했다.
이런 일이 자주 있다 보니 나는 가끔 지각했다. 그러면 선생님은 지각했다고 야단을 치며 나의 머리를 칠판에 박게 했다. 새벽 일찍 일어나 왔는데도 야단맞으니 서럽기도 하고 화도 났다. 그래서 그랬는지 공부보다는 동네 아이들과 장기, 바둑, 화투, 축구, 탁구 등을 하면서 노는 데 열중했다.
어머니는 나의 미래나 공부 문제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어머니는 식당 일을 마치고 밤늦게 들어와서 잠자고 있는 우리 3형제를 깨웠다. 그리고 갑자기 화를 냈다.
“너희는 어떻게 엄마가 오기도 전에 잠을 자니?”
“......”
평소 어머니가 늦게 오시기 때문에 우리는 가끔 먼저 자곤 했는데 갑자기 화를 내며 우시니 혼란스러웠다. 어머니에게서 술 냄새가 났다. 34살의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어 혼자서 3명의 어린 자식들을 키우는 것이 고달팠을 것이다. 나는 잠이 덜 깬 상태에서 잘못했다고 하면서 소리 내어 울었다. 동생들도 덩달아 울었다.
아무런 꿈도 없이 그날그날을 보내던 내가 공부에 관심을 가진 것은 중3이 되어서였다. 당시 나는 고등학교에 가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으나, 대학은 못 가더라도 고등학교는 반드시 가야 한다고 주위 사람들이 이야기해 주었다.
나는 실업계 고등학교에 들어가 기술을 배워서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중학교에서는 상업을 배웠기 때문에 처음에는 상업고등학교로 가려고 했다. 부기나 주산 등 상업 과목이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교 선생님은 공업고등학교에 가는 것이 좋다고 했다. 지금 생각하니 그 선생님은 박정희 정부의 산업화 정책을 보고 이러한 조언을 한 것 같았다. 공업에 대해 아는 바 전혀 없었지만 나는 한양공업고등학교에 지원했다.
문예반과 학원문학상
1972년 3월에 한양공고에 입학한 나는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교과서 이외에는 책을 거의 읽지 않았던 나는 독서와 글쓰기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문예반에 가입한 덕분이었다. 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쉬는 시간에 문예반 선배들이 우리 반에 들어왔다. 그들은 문예반을 소개하면서 신입생들에게 가입할 것을 권했다. 나는 손을 들어 가입하겠다고 했다. 특별한 목적이 있지는 않았다. 단지 호기심에서 가입했을 뿐이었다.
처음에는 문예반 생활이 재미있었다. 백일장 대회에서 상을 받으면 상장과 상품은 물론, 4년간 대학 장학생으로 다닐 수 있다는 사실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백일장 대회에서는 서정주, 박목월, 박두진 등과 같은 우리나라의 유명한 시인들을 만날 수 있었고, 맛있는 빵과 우유 등의 간식을 먹을 수 있었다.
당시 백일장에서는 수필이나 시, 그리고 간혹 시조 부문에서 상을 주고 있었기에 나는 시를 선택했다. 단지 시가 좋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백일장 대회가 가까워지면 거의 매일 시험공부하듯이 문예반에 앉아서 글쓰기를 하였다. 학교 근처에 있는 분식집 혹은 중국집에서 간단하게 식사를 하고 글쓰기를 하다가 밤늦게 집에 들어갔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는 걸음은 항상 무겁기만 했다. 어떻게 해야 시를 잘 쓸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시 전문지 등을 사서 유명 시인들의 시를 읽어보기도 하고 흉내도 내보았다. 하지만 결과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영국의 시인 워즈워드가 ‘시인은 천재여야 하고, 통찰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는데, 나와는 거리가 먼 것 같았다.
문예반에는 서라벌대학교 문예창작과에 다니던 선배가 가끔 와서 우리의 글을 봐주었다. 원고를 보여주면 그 선배는 좋다고 여겨지는 부분만 남겨놓고 나머지는 모두 빨간 펜으로 죽죽 줄을 그었다. 어떤 경우에는 원고지 세 장 분량의 글에서 단어 몇 개만이 남았다. 그리고는 그 단어들이 마음에 든다고 하였다. 처음에는 모멸감 때문에 분개하기도 하였지만 나 자신의 모자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선배는 백일장에서 상을 여러 번 받았기 때문이다.
문예반에는 매일 10여 명이 테이블 주위에 앉아 글쓰기를 하였다. 그런데 저녁 9시쯤 되면 누구나 속이 출출함을 느끼게 된다. 이때 한 선배가 동전 하나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도 눈치를 보며 자신의 주머니에서 얼마씩 내어놓는다. 돈이 모이면 1학년 중 한 명이 그 돈으로 ‘뽀빠이’가 파이프를 물고 있는 그림의 ‘라면땅’을 사 왔다.
라면땅 하나의 양은 많지 않았지만 여러 봉지를 뜯어 한 곳에 풀어놓으면 제법 풍성하게 느껴지고 먹음직스럽게 보였다. 더욱이 라면땅 특유의 고소한 냄새는 우리의 식욕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선배들이 먼저 자신의 분량을 가져가면 1학년들은 눈치를 보다가 남아 있는 것을 같이 먹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먹어치우고 나면 누구나 아쉬움을 느꼈지만 모두 자기 자리로 돌아가 입맛을 다시면서 다시 글쓰기를 시작했다.
문예반에서는 매년 ‘문학의 밤’ 행사를 개최했다. 시, 수필 등을 낭송하는 '문학의 밤' 행사는 문예반의 가장 큰 행사였다. 이때가 되면 문예반원들은 발표 준비를 위해 학교 보일러실에 들어가 발성 연습을 하느라 소리를 질러댔다. 배에서 나오는 소리여야 한다고 하여 배에다 두 손을 대고 크게 소리를 냈다. 선배들은 목소리가 쉬는 것은 목으로만 소리를 질렀기 때문이라고 했다. 성악가들 특히 판소리를 하는 사람들은 소위 득음을 위해 이런 연습을 한다고 했다.
처음에는 쑥스러웠으나 우리 1학년들은 열심히 연습했다. 나중에는 재미도 있었다. 소리를 지르고 나면 속도 시원해졌고, 무언가 소리라는 것에 대해 알 것 같았다. 그 덕분이었는지 작품을 낭송할 때 친구들의 목소리는 그럴듯하게 들렸다.
문학의 밤 행사 때에는 여학생들도 초대했다. 그래서 발표할 때에는 부끄러웠고 긴장이 되었다. 캄캄한 가운데 조명을 받으며 무대에 나가서 시를 처음 낭송할 때에는 몸이 떨리기도 했다. 어설픈 시였지만 배경 음악과 함께 낭송되는 시는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냈고, 철부지에 불과했던 우리는 인생의 진지함에 다가서는 듯했다.
행사가 끝나면 우리는 졸업한 선배들과 함께 중국집으로 갔다. 탕수육과 ‘빼갈(고량주)’은 잘 어울렸다. 술을 처음 마신 나는 숨이 막히는 듯한 강렬함을 느꼈다. 그때 나는 모든 술이 고량주와 같이 독한 줄 알았다. 게다가 선배들이 권해서 담배도 피웠다. 몽롱한 정신과 들뜬 분위기는 무언가 모르게 흡족한 느낌을 주었다.
고교 문예반 생활은 어린아이와 같았던 나를 조금 성숙하게 만들어 주었다. 독서와 음악감상이라는 고상한 취미도 가지게 되었다. 나는 소설을 특히 좋아했다. 음악은 클래식, 팝송, 대중가요 등 가리지 않고 모두 즐겨 들었다. 김세원의 ‘밤의 플랫폼’을 들으면서 이성에 대한 그리움을 느끼기도 했다.
이러한 가운데 2학년이 된 나는 내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기술을 배워 돈을 벌겠다고 공고에 들어왔으나 실습을 나갔다가 돌아온 3학년 선배의 말을 듣고서는 생각이 바뀌었다. 그 선배는 작업장 환경이 너무 열악하고 월급도 너무 적어서 돌아왔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고등학교만 졸업해서는 사람대접을 못 받으니 대학에 가야 한다고 했다.
선배의 말을 듣고 나는 아주 실망했다. 앞길이 막막했다. 대학에 가고 싶으나 가정형편을 생각하면 불가능하게 여겨졌다. 3형제를 위해 어머니 혼자 돈을 버느라 고생하고 있는 현실 때문이었다. 마음이 무거웠다.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던 한 친구는 술만 마시면 울면서 신세타령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공예과 과장이었던 조휘재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사관학교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친척 중 한 사람이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조종사가 되었는데, 지금은 민간항공기 조종사로서 돈을 많이 벌고 있다는 것. 그러니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일반 대학에 갈 수 없는 사람들은 사관학교에 가라는 내용이었다.
이 분은 일본 와세다 대학을 나오신 분이었는데, 몇몇 학생들은 이 선생님을 싫어했다. 과장으로서 취직시켜 줄 수 없으니까 학생들에게 대학 진학을 권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과장 선생님이 나를 불러 사관학교에 지원할 생각이 없냐고 했다. 학교 성적을 보니 열심히 공부하면 합격할 수 있을 것 같다고도 했다.
길을 찾고 있던 나는 감사한 마음에 과장 선생님의 말씀대로 공군사관학교에 지원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과장 선생님은 앞으로는 실습과목에 신경 쓰지 말고 사관학교 시험 준비에만 집중하라고 했다. 당시 나의 일반 과목 성적은 괜찮은 편이었지만, 실습 과목 성적은 좋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나는 어둠 속을 걷다가 빛을 발견한 것 같았다. 선생님의 말씀에 용기를 얻은 나는 그때부터 공군사관학교 본고사를 위해 공부했다. 그런데 학업에 관심을 두게 되자 문예반과의 관계는 자연히 소원해졌다. 백일장 대회에 가끔 나가기는 했으나 문예반에는 거의 나가지 않았다. 문예반원들에게 미안해서 문예반을 탈퇴할 생각도 했으나 그렇게 하지도 못했다.
그런데 문예반 친구들은 그동안 창작에 몰두하였는지 모두 백일장 대회에서 상을 받았다. 어떤 친구는 예비고사만 합격하면 대학에서 4년간 장학금을 받을 수 있다는 장원상을 받기도 했다. 심지어는 1학년 후배들도 상을 받기 시작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나는 문예반을 탈퇴하든지 아니면 지금이라도 열심히 글을 써서 상을 받든지 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후자를 선택했다. 문학상을 받은 후 공부하겠다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리석은 결정이었지만 나는 1973년도 <학원문학상>에 도전하기로 했다. 이제까지 썼던 작품들을 선배들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원고 마감일까지 다듬었다. 글씨도 중요하다고 하여 글씨 잘 쓰는 후배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원고 마감일 저녁이 되어서야 나는 문예반원들과 함께 원고를 들고 <학원사>로 갔다. 그런데 마침 <학원사> 앞에서 원고를 받고 돌아가는 심사위원들을 만났다. 우리가 늦게 오게 된 사정을 이야기하자 심사위원들은 우리의 원고를 받아주었다.
1974년 1월 4일이었다. 눈이 올 것 같았다. 나는 당시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뒤에 있는 학원에서 수학 강의를 듣고 있었다. 하지만 수업 내용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관심은 오직 <학원문학상> 심사 결과에 있었다. 수업이 끝나자 나는 곧장 근처에 있는 서점으로 달려갔다.
“<학원> 나왔어요?”
서점 주인은 책이 나왔다고 했다. 책을 건네받은 나는 <학원문학상> 수상자 명단이 있는 페이지를 먼저 들춰보았다. 거기에 내 이름이 있었다. 입선이었지만 너무 기뻐서 주인에게 보여주면서 내 시가 뽑혔다고 했다. 주인도 신기한 듯이 들여다보며 축하해 주었다.
순간 나는 후회했다. 수중에 돈이 없어 그 책을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서점 주인에게 다음에 와서 이 책을 꼭 사겠다고 하고서 밖으로 나왔다. 마침 조금씩 내리던 눈은 함박눈이 되었다. 마치 하늘이 나의 입선을 축하해 주는 것 같았다.
학원문학상 상장
공군사관학교
<학원문학상>을 받은 후 나는 공부에 전념했다. 문예반에는 거의 나가지 않았다. 공부해야 할 내용은 많고 시간은 부족해 보였다. 나는 우선 공군사관학교 본고사 과목을 집중적으로 공부하기로 했다. 당시 공군사관학교에서는 국어, 영어, 수학, 국사 등 네 과목만 시험을 보았다. 그래서 예비고사는 본고사가 끝난 후 준비하기로 하고 네 과목만 열심히 공부했다.
당시에는 대학에 들어가려면 예비고사를 통과해야 했다. 그런데 예비고사 과목 중에는 학교에서 배우지 않은 과목이 세 개나 있었다. 그래도 나는 붙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당시 학생들은 자격시험에 지나지 않는 예비고사를 우습게 생각하고 있었다. 친구들도 대부분 그렇게 생각했다. 실제로 인문고에서는 학생들이 대부분 시험에 합격한다고도 했다.
내가 공군사관학교 본고사 시험에 합격하자 친구들과 선생님들이 놀라워하면서 축하해 주었다. 어머니와 친척들도 축하해 주었다. 나는 나 자신이 무척 자랑스러웠다. 모든 일이 잘 풀리는 것 같았다. 예비고사 시험을 보고 나서도 나는 크게 염려하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 공예과에서는 한 명만이 제주 지역에 합격했다. 문예반 친구들도 모두 떨어졌다. 예비고사만 붙으면 4년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친구도 마찬가지였다. 참담했다. 사람들이 비웃을 것 같았다. 당연히 공군사관학교에 들어갈 줄 알고 계실 어머니 얼굴이 떠올랐다. 눈물이 났다.
며칠 후 나는 큰아버지를 찾아가서 사정을 말씀드리고 도움을 청했다. 큰아버지는 고민 끝에 학원비를 지원해 주시겠다고 했다. 나는 종로 2가에 있던 정일학원 서울대반에 등록했다. 서울대반 학생은 총 50명 정도 되었는데, 지방 학생들이 많았다. 학생들은 대부분 연고대 이상 갈 수 있는 실력을 갖추고 있어서 이 학원에서 장학금을 받고 있다고 했다. 학원 생활은 재미있었다. 실력 있는 선생님들의 학습 지도와 학원 친구들의 공부하는 모습은 공부에 도움이 되었다. 이번에는 잘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어느 날 초등학교에 다니던 집주인 아들이 나에게 물었다.
“형은 왜 돈 벌지 않고 공부만 해?”
“......”
당시 우리 가족은 삼양동에서 살고 있었다. 정릉이 개발되기 시작하면서 전셋값이 오르자 우리는 삼양동 산동네로 이사해야 했다. 삼양동 버스 종점에서 20분 이상을 걸어 올라가야 하는 산동네였다. 이런 동네에, 그것도 단칸방에 세 들어 사는 사람이 재수하고 있다는 것이 자기가 보기에 이상했던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집주인은 그의 딸과 아들을 중학교까지만 공부시킨 후 공장에 보내고 있었다.
나는 할 말이 없었다.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 나의 아픈 곳을 녀석은 용하게 찔러댔기 때문이다. 당시 어머니는 조그만 식당을 운영했으나 수입이 변변치 않았다. 둘째는 고등학교 입학시험에 떨어지자 기술을 배우겠다고 전기 수리를 하고 있던 동네 청년을 따라다니고 있었다. 막내는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내가 돈을 벌어 어머니를 도와드려야 했지만 나는 공군사관학교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나는 이번 시험에도 떨어지면 군에 입대해야 했다. 그래서 이를 악물고 공부했다.
그 결과 공군사관학교 본고사에 합격했다. 그러나 마음이 놓이지는 않았다. 아직 예비고사와 2차 시험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한 번의 실패 경험은 두려움을 주기 마련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공군사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여러 관문을 통과해야 했다. 본고사에 합격한 학생들은 정밀신체검사, 체력검정, 그리고 면접시험을 거쳐야 했다. 그런데 공군사관학교의 정밀신체검사는 3군 사관학교 중 가장 까다로운 것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대부분 눈 때문에 많은 사람이 탈락한다고 했다.
나는 시력이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시력 검사에서 위기를 맞았다. 검사기 렌즈에 양 눈을 대고 눈에 보이는 3개의 원 중 앞으로 튀어나온 것을 찾으라고 하는데 영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대충 대답했더니 군의관은 나를 별도의 장소로 데리고 갔다.
본고사 성적이 기록되어 있는 듯한 서류를 살펴보던 군의관은 공부 때문에 눈이 나빠진 것이냐고 물었다. 눈 때문에 떨어질까 봐 걱정했던 나는 그런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그는 뭔가를 적으면서 가라고 했다. 나는 불안해하면서 신체검사 결과 발표를 기다렸다.
발표는 오후 늦게 이루어졌다. 불합격자 명단이 발표될 때마다 마음이 두근거렸다. 다행히 내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얼마 후에는 예비고사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리고 공군사관학교로부터 최종 합격했다는 통지서도 받았다. 너무 기뻤다. 그 누구보다도 어머니가 기뻐하셨다. 감사해서 눈물이 났다. 다음 날 나는 학원 친구들과 함께 간단히 소주를 마시면서 석별의 정을 나눈 후 학원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