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절 중학생 시절
1969년 3월 2일에 나는 신일중학교에 입학했다. 신설 학교라서 그런지 모든 것이 깨끗했다. ‘제2의 경기고등학교’를 지향하는 학교라고 했다. 그래서 일류 대학 출신 선생님들이 많다고 했다. 그런데 이 학교에서는 정규 수업 시간에 성경 내용을 가르치고 예배도 드리게 했다. 내가 기독교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이때부터였다고 할 수 있다.
중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어느 날 어머니가 사기를 당했다고 했다. 다른 사람에게 저당 잡혀 있던 집을 모르고 샀다는 것이다. 우리 가족은 할 수 없이 아는 분의 소개로 당시 집 값이 싼 응암동으로 이사했다. 그곳에서 어머니는 조그만 방이 딸린 국밥집을 운영했다.
우리는 이 방에서 지내면서 학교에 다녔다. 우거짓국 냄새가 지금도 기억난다. 나와 바로 밑 동생인 둘째는 학교가 미아리와 정릉에 있었기 때문에 새벽 4시에 일어나서 부랴부랴 우거짓국밥을 먹고 버스를 탔다. 그런데 한 번에 가는 버스가 없었기 때문에 중간에 다른 버스로 갈아타야 했다. 게다가 대부분의 버스는 오래되어서 그런지 가끔 고장이 났다. 특히 무악재 고개를 넘다가 멈추는 일이 종종 있었다. 버스가 고장 나면 승객들은 모두 내려서 버스를 밀어야 했다.
이런 일이 자주 있다 보니 나는 가끔 지각했다. 그러면 선생님은 지각했다고 야단을 치며 나의 머리를 칠판에 박게 했다. 새벽 일찍 일어나 왔는데도 야단맞으니 서럽기도 하고 화도 났다. 그래서 불평을 하면 어머니는 조금만 있으면 이사할 테니 참으라고 했다.
그런데 얼마 후 어머니는 나와 둘째를 큰집으로 보냈다. 그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셋째는 어머니가 데리고 있겠다고 했다. 나중에 돈을 벌면 다시 부르겠다고 해서 나와 둘째는 할 수 없이 큰집에 갔다. 저녁 무렵 큰집에 찾아가자 큰집 식구들은 신기한 듯 우리를 보았다. 참으로 부끄러웠다.
큰아버지는 우리를 동대문에 살고 있던 ‘팔촌 큰아버지’ 댁에 가 있게 했다. 아버지의 팔촌 형님인데 우리는 그분을 ‘팔촌 큰아버지’라고 불렀다. 팔촌 큰아버지와 큰어머니는 당시 동대문에서 미군 구호물자를 파는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두 분 역시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우리를 그들의 집에서 지내게 해 주었다.
한 달 정도 지난 후 우리 형제는 다시 큰집으로 갔다. 큰집 식구들은 종로에 있는 주택가에서 식모를 두고 살고 있었다. 딸 넷에 아들 하나를 낳은 큰어머니는 막내아들을 애지중지했다. 막내아들은 큰아버지와 함께 쌀밥을 먹게 하고 우리 형제는 사촌누이들과 함께 보리밥을 먹게 했다.
큰어머니는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해 글을 읽지 못했다. 그러나 암기력이 뛰어났다. 어느 날 나에게 사람들의 전화번호를 적어 놓은 노트를 보여주었다. 글씨는 모르지만 노트를 보면 사람들의 전화번호를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큰어머니는 우리 가족 특히 어머니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어머니는 명절에 우리 형제들만 큰집에 인사하러 보냈다. 그러면 큰어머니는 인사드리러 간 우리 형제에게 화를 내면서 울기도 했다. 이후 우리는 큰어머니가 무서워서 가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래도 어머니는 명절 때마다 우리를 큰집에 인사하러 보냈다.
두어 달 동안인가 큰집에서 지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어머니가 정릉 산동네에 셋방을 얻었다면서 우리 형제를 불러들였다. 산꼭대기에 있는 단칸방이었지만 가족이 함께 살 수 있어서 좋았다. 물을 길어 와야 하고 연탄도 직접 날라야 해서 힘들었지만 견딜 만했다.
다만 공부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동네 아이들과 장기, 바둑, 화투, 축구, 탁구 등을 하면서 놀았다. 어머니는 식당 일 때문에 힘들어서 그랬는지 나의 미래나 공부 문제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어느 날 어머니는 식당 일을 마치고 밤늦게 들어와서 잠자고 있는 우리 3형제를 깨웠다. 그리고 갑자기 화를 냈다.
“너희는 어떻게 엄마가 오기도 전에 잠을 자니?”
“......”
평소 어머니가 늦게 오시기 때문에 우리는 가끔 먼저 자곤 했는데 갑자기 화를 내며 우시니 혼란스러웠다. 어머니에게서 술 냄새가 났다. 34살의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어 혼자서 3명의 어린 자식들을 키우는 것이 고달팠을 것이다. 나는 잠이 덜 깬 상태에서 잘못했다고 하면서 소리 내어 울었다. 동생들도 덩달아 울었다.
아무런 꿈도 없이 그날그날을 보내던 내가 공부에 관심을 가진 것은 중3이 되어서였다. 당시 나는 고등학교에 가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으나, 대학은 못 가더라도 고등학교는 반드시 가야 한다고 주위 사람들이 이야기해 주었다. 친구들도 대부분 고등학교에 가겠다고 해서 고등학교 입학시험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중학교 1학년 때 처음 배우게 된 영어는 너무 어려웠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중학교에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1학년 때 만난 영어 선생님은 교과서를 무조건 외우게 했다. 그 선생님은 수업하기 전에 학생들이 잘 외웠는지 확인하고 못 외운 학생들은 몽둥이로 엉덩이를 때렸다. 맞는 것이 무서워서 외워보려고 했으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무조건 외우려고 하니 어려웠다. 차라리 매를 맞는 것이 편하겠다는 반항심마저 생겼다. 이렇게 지내왔더니 영어가 제일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친구가 가지고 있던 영어 자습서를 보게 되었다. 그 자습서를 보면서 나는 속으로 감탄했다. 이렇게 설명이 잘 되어 있는 책이 있는 줄 알았더라면 진작에 샀을 텐데 하는 아쉬움마저 느꼈다. 나는 어머니에게 영어 자습서를 한 권 사달라고 했다. 고등학교에 가기 위해서 꼭 필요하다고 했더니 돈을 주셔서 중고 자습서를 샀다. 이 자습서는 나의 영어 공부에 큰 도움을 주었다.
이때 나는 실업계 고등학교에 들어가 기술을 배워서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중학교에서는 상업을 배웠기 때문에 처음에는 상업고등학교로 가려고 했다. 부기나 주산 등 상업 과목이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교 선생님은 공업고등학교에 가는 것이 좋다고 했다. 지금 생각하니 그 선생님은 박정희 정부의 산업화 정책을 보고 이러한 조언을 한 것 같았다. 공업에 대해 아는 바 전혀 없었지만 나는 한양공업고등학교에 지원했다.
입학시험 날, 어머니와 나는 둘 다 연탄가스를 마셔서 아침 늦게 일어났다. 예전에도 나는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있다가 김칫국물을 한 사발 마시고 깨어난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들이 많았다. 어떤 사람들은 자살하기 위해 연탄을 방에서 피우고 죽는다고 했다. 그리고 연탄가스에 중독된 시체는 시퍼렇게 된다고 해서 진저리를 치기도 했다.
어머니는 늦었다고 아침 식사용으로 생달걀 두 알에 참기름과 소금을 뿌려서 주었다. 보통 시험날에는 금기시하는 음식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그것을 후루룩 마시고 부랴부랴 택시를 타고 갔다. 학교 정문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격려의 박수를 쳐주었다. 민망하고 부끄러워서 나는 빨리 교실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입학시험이 끝난 후 나는 탁구를 배우기 시작했다. 마침 동네 공터에 천막을 쳐서 만든 탁구장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손님이 별로 없어서인지 탁구장 주인은 약간의 돈을 내면 오랜 시간 동안 탁구를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게다가 주인은 나에게 무료로 ‘서브’와 ‘드라이브’ 등의 탁구 기술을 가르쳐 주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친구가 영화를 공짜로 보는 방법이 있다고 했다. 영화를 좋아했던 나는 호기심에 아이들과 함께 동네 근처에 있는 극장에 갔다. 극장 옆에는 버스 주차장이 있었다. 버스 주차장과 극장 사이에는 높이가 2미터쯤 되는 담이 있었다. 담만 넘으면 바로 극장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경비실이 있었다. 우리는 담 밑에 숨어 있다가 경비원이 다른 곳을 볼 때 담을 넘기로 했다.
그런데 담을 넘으려는 순간 경비원이 내가 있는 곳을 쳐다보았다. 무언가 이상했던지 경비원은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나는 움직이지 않고 한참 동안 가만히 있었다. 그랬더니 경비원은 자신의 하던 일을 다시 하기 시작했다. 그 덕에 우리는 담을 넘어 영화관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공짜로 영화를 보기는 했으나 영화 내용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들키지 않았다는 안도감과 함께 성공했다는 쾌감에 만족했었던 것 같다.
이렇게 한 번 재미를 보자 나는 공장에 다니던 동네 형과 함께 다른 극장으로 갔다. 지난번에 갔던 극장보다도 작은 싸구려 극장이었으나 담이 높아서 넘기가 쉽지 않았다. 그때 20대 청년이 양철로 만든 가게 덧문을 가져왔다. 그 청년은 덧문에 가로로 박혀 있는 막대를 밟으며 올라가는 요령을 알려주면서 담을 넘었다. 우리도 그가 가르쳐 준 대로 담을 넘었다.
그런데 담을 넘자마자 극장 직원이 나타났다. 청년은 바로 극장 안으로 도망쳤다. 그러자 직원은 “이 새끼들 이리 와!”라고 하면서 우리를 어두컴컴한 지하실로 끌고 갔다. 우리는 잘못했다고 하면서 용서를 빌었다. 도망쳤던 청년 역시 조금 후에 붙들려 왔다.
극장 직원은 먼저 그 청년에게 한쪽 벽에 두 손을 대고 서 있으라고 했다. 그리고 굵직한 몽둥이로 엉덩이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그러자 이상한 소리가 났다. 청년의 뒷주머니에 거울이 있었기 때문이다. 거울을 꺼낸 후 몇 대 더 맞자 그 청년은 주저앉았다.
다음은 우리 차례였다. 나는 벌벌 떨면서 엉덩이를 맞았다. 너무 아파서 어지러웠다. 그러자 직원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게 한 후 심문하기 시작했다. 직원은 우리가 무엇을 훔치러 온 것으로 생각했다. 우리가 계속 부인하자 직원은 우리의 직업이 무엇이냐고 했다. 청년과 동네 형은 공장에 다닌다고 했다.
나는 망설이다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이번에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시험에 합격해서 입학할 날을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단지 호기심에서 온 것이지 나쁜 짓 하러 온 것이 아님을 밝히고자 고등학교 시험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다.
그러자 직원이 고등학교 이름을 물었다. 나는 이내 후회했다. 학교 망신을 시킨 것 같았기 때문에 부끄러웠고, 학교에 통보해서 합격을 취소하게 할까 봐 두려웠다. 그런데 직원은 내가 한양공고에 입학하였기 때문에 봐준다면서 친구를 잘 사귀라고 충고했다.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않겠다고 속으로 결심했다.
중학교 졸업 사진(고모할머니, 어머니, 나, 큰아버지 순)
제2절 고등학생 시절
1972년 3월에 한양공고에 입학한 나는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교과서 이외에는 책을 거의 읽지 않았던 나는 독서와 글쓰기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문예반에 가입한 덕분이었다. 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쉬는 시간에 문예반 선배들이 우리 반에 들어왔다. 그들은 문예반을 소개하면서 신입생들에게 가입할 것을 권했다. 나는 손을 들어 가입하겠다고 했다. 특별한 목적이 있지는 않았다. 단지 호기심에서 가입했을 뿐이었다.
처음에는 문예반 생활이 재미있었다. 백일장 대회에서 상을 받으면 상장과 상품은 물론, 4년간 대학 장학생으로 다닐 수 있다는 사실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백일장 대회에서는 서정주, 박목월, 박두진 등과 같은 우리나라의 유명한 시인들을 만날 수 있었고, 맛있는 빵과 우유 등의 간식을 먹을 수 있었다.
당시 백일장에서는 수필이나 시, 그리고 간혹 시조 부문에서 상을 주고 있었기에 나는 시를 선택했다. 단지 시가 좋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백일장 대회가 가까워지면 거의 매일 시험공부하듯이 문예반에 앉아서 글쓰기를 하였다. 학교 근처에 있는 분식집 혹은 중국집에서 간단하게 식사를 하고 글쓰기를 하다가 밤늦게 집에 들어갔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는 걸음은 항상 무겁기만 했다. 영국의 시인 워즈워드는 ‘시인은 천재여야 하고, 통찰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했는데, 나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는 것 같았다. 어떻게 해야 시를 잘 쓸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시 전문지 등을 사서 유명 시인들의 시를 읽어보기도 하고 흉내도 내보았다. 하지만 결과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문예반에는 서라벌대학교 문예창작과에 다니던 선배가 가끔 와서 우리의 글을 봐주었다. 원고를 보여주면 그 선배는 좋다고 여겨지는 부분만 남겨놓고 나머지는 모두 빨간 볼펜으로 죽죽 줄을 그었다. 어떤 경우에는 원고지 세 장 분량의 글에서 단어 몇 개만이 남았다. 그리고는 그 단어들이 마음에 든다고 하였다. 처음에는 모멸감 때문에 분개하기도 하였지만 나 자신의 모자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선배는 백일장에서 상을 여러 번 받았기 때문이다.
문예반에는 매일 10여 명이 테이블 주위에 앉아 글쓰기를 하였다. 그런데 저녁 9시쯤 되면 누구나 속이 출출함을 느끼게 된다. 이때 한 선배가 동전 하나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도 눈치를 보며 자신의 주머니에서 얼마씩 내어놓는다. 돈이 모이면 1학년 중 한 명이 그 돈으로 ‘뽀빠이’가 파이프를 물고 있는 그림의 ‘라면땅’을 사 왔다.
라면땅 하나의 양은 많지 않았지만 여러 봉지를 뜯어 한 곳에 풀어놓으면 제법 풍성하게 느껴지고 먹음직스럽게 보였다. 더욱이 라면땅 특유의 고소한 냄새는 우리의 식욕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선배들이 먼저 자신의 분량을 가져가면 1학년들은 눈치를 보다가 남아 있는 것을 같이 먹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먹어치우고 나면 누구나 아쉬움을 느꼈지만 모두 자기 자리로 돌아가 입맛을 다시면서 다시 글쓰기를 시작했다.
문예반에서는 매년 ‘문학의 밤’ 행사를 개최했다. 시, 수필 등을 낭송하는 '문학의 밤' 행사는 문예반의 가장 큰 행사였다. 이때가 되면 문예반원들은 발표 준비를 위해 학교 보일러실에 들어가 발성 연습을 하느라 소리를 질러댔다. 배에서 나오는 소리여야 한다고 하여 배에다 두 손을 대고 크게 소리를 냈다. 선배들은 목소리가 쉬는 것은 목으로만 소리를 질렀기 때문이라고 했다. 성악가들 특히 판소리를 하는 사람들은 소위 득음을 위해 이런 연습을 한다고 했다.
처음에는 쑥스러웠으나 우리 1학년들은 열심히 연습했다. 나중에는 재미도 있었다. 소리를 지르고 나면 속도 시원해졌고, 무언가 소리라는 것에 대해 알 것 같았다. 그 덕분이었는지 작품을 낭송할 때 친구들의 목소리는 그럴듯하게 들렸다.
문학의 밤 행사 때에는 여학생들도 초대했다. 그래서 발표할 때에는 부끄러웠고 긴장이 되었다. 캄캄한 가운데 조명을 받으며 무대에 나가서 시를 처음 낭송할 때에는 몸이 떨리기도 했다. 어설픈 시였지만 배경 음악과 함께 낭송되는 시는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냈고, 철부지에 불과했던 우리는 인생의 진지함에 다가서는 듯했다.
행사가 끝나면 우리는 졸업한 선배들과 함께 중국집으로 갔다. 탕수육과 ‘빼갈(고량주)’은 잘 어울렸다. 술을 처음 마신 나는 숨이 막히는 듯한 강렬함을 느꼈다. 그때 나는 모든 술이 고량주와 같이 독한 줄 알았다. 게다가 선배들이 권해서 담배도 피웠다. 몽롱한 정신과 들뜬 분위기는 무언가 모르게 흡족한 느낌을 주었다. 어른이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1학년은 모두 8명이었는데, 여름방학 때 여행을 가자고 해서 함께했다. 회비 3,000원과 열흘간 먹을 식량을 각자 준비하여 원산도로 갔다. 서해 안면도 앞에 있는 섬인데, 사람이 별로 없는 한적한 곳이었다. 우리는 해변에다 2인용 군용 텐트를 치고 밤이 되면 그곳에서 잠을 잤다.
8명이 자기에는 텐트가 작아서 몸의 반은 바깥으로 내놓고 잠을 잤다. 불편했지만 재미있기도 했다. 먹는 것이 시원치 않았지만 그래도 좋았다. 고추장과 김치에 밥을 비벼 먹거나, 라면 등을 끓여 먹었다. 그리고 가끔 소주도 마시고, 필터 없는 담배를 피우며 해방감을 맛보기도 했다.
당시에는 해변 근처에 군부대가 있었다. 우리에게 다가와 말을 걸던 군인들에게 우리가 라면을 끓여주자 그들은 우리에게 건빵을 주었다. 그리고 썰물 때에는 큰 게와 소라를 많이 잡을 수 있으니 밤에 잡으러 가자고 했다.
그날 밤, 우리는 신이 나서 군인들을 따라갔다. 대검으로 큰 게의 등을 찍어 달빛에 비춰보는 군인의 모습은 잔인해 보였으나 인상적이었다. 달 밝은 밤에 대검에 찍혀 부르르 떨면서 물방울을 떨어트리는 게의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 군인은 대검을 주면서 게를 잡아보라고 했지만 나는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군인들은 우리를 데리고 바위가 있는 곳에 갔다. 바위에는 주먹만큼 큰 소라들이 여기저기 붙어 있었다. 어떤 것은 너무나 단단히 붙어 있어 두 손으로 잡아당겨야 겨우 떨어졌다. 우리는 양동이에 가득 담긴 소라와 게를 부대 취사장에서 삶아 먹었다. 이것은 우리의 허한 속을 든든하게 해 주었다.
고교 문예반 생활은 어린아이와 같았던 나를 성숙하게 만들어 주었다. 나는 독서와 음악감상이라는 고상한 취미를 가지게 되었다. 소설을 특히 재미있게 읽었고, 음악은 클래식, 팝송, 대중가요 등 가리지 않고 모두 즐겨 들었다. 김세원의 ‘밤의 플랫폼’을 들으면서 이성에 대한 그리움을 느끼기도 했다.
이러한 가운데 2학년이 된 나는 내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기술을 배워 돈을 벌겠다고 공고에 들어왔으나 실습을 나갔다가 돌아온 3학년 선배의 말을 듣고서는 생각이 바뀌었다. 그 선배는 작업장 환경이 너무 열악하고 월급도 너무 적어서 돌아왔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고등학교만 졸업해서는 사람대접을 못 받으니 대학에 가야 한다고 했다.
선배의 말을 듣고 나는 아주 실망했다. 앞길이 막막하게 여겨졌다. 대학에 가고 싶었으나 가정형편을 생각하면 불가능하게 여겨졌다. 3형제를 위해 어머니 혼자 돈을 버느라 고생하고 있는 현실 때문이었다. 마음이 무거웠다.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던 한 친구는 술만 마시면 울면서 신세타령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공예과 과장이었던 조휘재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사관학교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친척 중 한 사람이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조종사가 되었는데, 지금은 민간항공기 조종사로서 돈을 많이 벌고 있다는 것. 그러니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일반 대학에 갈 수 없는 사람들은 사관학교에 가라는 내용이었다.
이 분은 일본 와세다 대학을 나오신 분이었는데, 몇몇 학생들은 이 선생님을 싫어했다. 과장으로서 취직시켜 줄 수 없으니까 학생들에게 대학 진학을 권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과장 선생님이 나를 불러 사관학교에 지원할 생각이 없냐고 했다. 학교 성적을 보니 열심히 공부하면 합격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길을 찾고 있던 나는 감사한 마음에 과장 선생님의 말씀대로 공군사관학교에 지원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과장 선생님은 앞으로는 실습과목에 신경 쓰지 말고 사관학교 시험 준비에 집중하라고 했다. 나의 일반 과목 성적은 괜찮은 편이었지만, 실습 과목 성적은 좋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나는 어둠 속을 걷다가 빛을 발견한 것 같았다. 선생님의 말씀에 용기를 얻은 나는 그때부터 공군사관학교 본고사를 위해 공부했다. 그런데 학업에 관심을 두게 되자 문예반과의 관계는 자연히 소원해졌다. 백일장 대회에 가끔 나가기는 했으나 문예반에는 거의 나가지 않았다. 문예반원들에게 미안해서 문예반을 탈퇴할 생각도 했으나 그렇게 하지도 못했다.
그런데 문예반 친구들은 그동안 창작에 몰두하였는지 모두 백일장 대회에서 상을 받았다. 어떤 친구는 예비고사만 합격하면 대학에서 4년간 장학금을 받을 수 있다는 장원상을 받기도 했다. 심지어는 1학년 후배들도 상을 받기 시작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나는 문예반을 탈퇴하든지 아니면 지금이라도 열심히 글을 써서 상을 받든지 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후자를 선택했다. 상을 하나라도 받은 후 공부를 하겠다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리석은 결정이었다. 나는 1973년도에 마지막 남은 <학원문학상>에 도전하기로 했다. 이제까지 썼던 작품들을 선배들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원고 마감일까지 다듬었다. 글씨도 중요하다고 하여 글씨 잘 쓰는 후배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원고 마감일 저녁이 되어서야 나는 문예반원들과 함께 원고를 들고 <학원사>로 갔다. 그런데 마침 <학원사> 앞에서 원고를 받고 돌아가는 심사위원들을 만났다. 우리가 늦게 오게 된 사정을 이야기하자 심사위원들은 우리의 원고를 받아주었다.
1974년 1월 4일이었다. 눈이 올 것 같았다. 나는 당시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뒤에 있는 학원에서 수학 강의를 듣고 있었다. 하지만 수업 내용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관심은 오직 <학원문학상> 심사 결과에 있었다. 수업이 끝나자 나는 곧장 근처에 있는 서점으로 달려갔다.
“<학원> 나왔어요?”
서점 주인은 책이 나왔다고 했다. 책을 건네받은 나는 <학원문학상> 수상자 명단이 있는 페이지를 먼저 들춰보았다. 거기에 내 이름이 있었다. 입선이었지만 너무 기뻐서 주인에게 보여주면서 내 시가 뽑혔다고 했다. 주인도 신기한 듯이 들여다보며 축하해 주었다.
순간 나는 후회했다. 수중에 돈이 없어 그 책을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서점 주인에게 다음에 와서 이 책을 꼭 사겠다고 하고서 밖으로 나왔다. 마침 조금씩 내리던 눈은 함박눈이 되었다. 마치 하늘이 나의 입선을 축하해 주는 것 같았다.
<학원문학상>을 받은 후 나는 공부에 전념하기로 했다. 이후에는 문예반에 거의 나가지 않았다. 공부해야 할 내용은 많고 시간은 부족해 보였다. 나는 우선 공군사관학교 본고사 과목을 집중적으로 공부하기로 했다. 당시 공군사관학교에서는 국어, 영어, 수학, 국사 등 네 과목만 시험을 보았다. 그래서 예비고사는 본고사가 끝난 후 준비하기로 하고 네 과목만 열심히 공부했다.
당시에는 대학에 들어가려면 예비고사를 통과해야 했다. 그런데 예비고사 과목 중에는 학교에서 배우지 않은 과목이 세 개나 있었다. 그래도 나는 붙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당시 학생들은 자격시험에 지나지 않는 예비고사를 우습게 생각하고 있었다. 친구들도 대부분 그렇게 생각했다. 실제로 인문고에서는 학생들이 대부분 시험에 합격한다고도 했다.
내가 공군사관학교 본고사 시험에 합격하자 친구들과 선생님들이 놀라워하면서 축하해 주었다. 어머니와 친척들도 축하해 주었다. 나는 나 자신이 무척 자랑스러웠다. 모든 일이 잘 풀리는 것 같았다. 예비고사 시험을 보고 나서도 나는 크게 염려하지 않았다.
당시 예비고사 합격 성적은 지역별로 편차가 컸다. 서울, 경기 지역이 가장 높았고, 제주, 충청, 강원 지역이 가장 낮았다. 가고 싶은 대학이 위치한 두 개의 지역을 선택해야 했으나 사관학교의 경우에는 아무 지역이나 상관이 없었다. 그래서 성적이 가장 높은 서울 지역과 가장 낮은 제주 지역을 선택하려고 하다가 자존심 때문에 서울, 경기 두 지역을 선택했다.
예비고사 합격자 발표 날, 나와 친구들 모두 놀랐다. 우리 과에서는 한 명만이 제주 지역에 합격했다고 했다. 문예반 친구들도 모두 떨어졌다. 예비고사만 붙으면 4년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친구도 마찬가지였다. 참담했다. 사람들이 나를 비웃을 것 같았다. 당연히 공군사관학교에 들어갈 줄 알고 계실 어머니 얼굴이 떠올랐다. 눈물이 났다.
내가 시험에 떨어졌다고 하자 큰아버지와 큰어머니는 위로하면서 취직을 시켜주겠다고 했다. 나는 할 말이 없었다. 그저 시키는 대로 했다. 이력서를 쓰고 소개해 준 사람을 찾아갔다. 그러나 취직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취직을 시켜주기로 한 사람에게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나는 오히려 잘 됐다 싶었다.
공군사관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종로학원 서울대반에 응시했다. 그리고 합격증을 큰아버지에게 보여드리면서 1년만 학원비를 지원해 달라고 부탁했다. 큰아버지는 난감해했다. 큰어머니는 물론 반대했다.
“이제까지 학비를 대주었으면 고마운 줄 알아야지.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지.”
“죄송합니다. 한 번만 더 도와주십시오.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안 돼, 도와줄 마음 없다.”
“그러면, 사업 자금 좀 빌려주세요. 나중에 꼭 갚겠습니다.”
내가 이백만 원을 빌려 달라고 하자 큰어머니는 ‘간이 부은 놈’이라고 하면서 코웃음을 쳤다.
제3절 재수생 시절
나는 큰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진학시험공부를 계속했다. 큰아버지께서 학원비를 주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큰아버지는 큰어머니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또 싸움을 하게 되니 큰어머니에게는 비밀로 하라고 하셨다.
나는 매달 큰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무거운 마음으로 상점에 전화했다. 전화를 걸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큰아버지가 상점에 안 계실 때에는 여러 번 전화를 해야 했는데, 가끔 큰어머니가 받으면 놀라서 전화를 끊었다. 어떤 때는 상점 근처까지 가서 큰아버지가 계신지 엿보기도 했다. 이렇게 애를 태우다가 우여곡절 끝에 큰아버지를 만나면 정말 기뻤다.
큰아버지와 나는 주로 큰아버지의 상점 근처에 있는 종로 3가 지하도에서 만났다. 큰아버지는 돈을 없애가며 다방에서 만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언젠가 한 번은 다방에서 주스를 시켰다가 큰아버지에게 혼이 난 적이 있다. 날도 덥고 커피 마시기는 싫고 해서 무심코 시원한 사이다를 시켰다가 돈을 아껴 쓸 줄 모른다고 종업원 앞에서 야단맞았다. 나는 그래도 큰아버지가 고마웠다.
당시 내가 다니던 정일학원은 종로 2가에 있었다. 종로학원에 들어가려고 했지만 제 때에 입학금을 내지 못해 등록이 취소되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종로학원에서 받은 서울대 반 합격증을 보여주자 서무과에 있던 직원은 나를 서울대 반에 등록시켜 주었다.
서울대 반 학생은 총 50명 정도였는데, 지방 학생들이 많았다. 학생들은 대부분 연고대 이상 갈 수 있는 실력을 갖추고 있어서 이 학원에서 장학금을 받고 있다고 하였다. 학원 생활은 재미있었다. 실력 있는 선생님들의 학습 지도와 학원 친구들의 학습 의욕은 공부에 전념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번에는 잘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어느 날 초등학교에 다니던 집주인 아들이 나에게 물었다.
“형은 왜 돈 벌지 않고 공부만 해?”
“......”
당시 우리 가족은 삼양동에서 살고 있었다. 정릉이 개발되기 시작하면서 전셋값이 오르자 우리는 삼양동 산동네로 이사해야 했다. 삼양동 버스 종점에서 20분 이상을 걸어 올라가야 하는 산동네였다. 이런 동네에, 그것도 단칸방에 세 들어 사는 사람이 재수하고 있다는 것이 자기가 보기에 이상했던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집주인은 그의 딸과 아들을 중학교까지만 공부시킨 후 공장에 보내고 있었다.
나는 할 말이 없었다.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 나의 아픈 곳을 녀석은 용하게 찔러댔기 때문이다. 당시 어머니는 조그만 식당을 운영했으나 수입이 변변치 않았다. 둘째는 고등학교 입학시험에 떨어지자 기술을 배우겠다고 전기 수리를 하고 있던 동네 청년을 따라다니고 있었다. 막내는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내가 돈을 벌어 어머니를 도와드려야 했지만 나는 공군사관학교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나는 이번 시험에도 떨어지면 군에 입대해야 했다. 그래서 이를 악물고 공부했다.
그 결과 공군사관학교 본고사에 합격했다. 그러나 마음이 놓이지는 않았다. 아직 예비고사와 2차 시험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한 번의 실패 경험은 두려움을 주기 마련인 모양이었다.
공군사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여러 관문을 통과해야 했다. 본고사에 합격한 학생들은 정밀신체검사, 체력검정, 그리고 면접시험을 거쳐야 했다. 그런데 공군사관학교의 정밀신체검사는 3군 사관학교 중 가장 까다로운 것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대부분 눈 때문에 많은 사람이 탈락한다고 했다.
나는 시력이 좋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시력 검사에서 위기를 느꼈다. 검사기 렌즈에 양 눈을 대고 눈에 보이는 3개의 원 중 앞으로 튀어나온 것을 찾으라고 하는데 영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대충 대답했더니 군의관은 나를 별도의 장소로 데리고 갔다.
본고사 성적이 기록되어 있는 듯한 서류를 살펴보던 군의관은 공부 때문에 눈이 나빠진 것이냐고 물었다. 눈 때문에 떨어질까 봐 걱정했던 나는 그런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그는 뭔가를 적으면서 가라고 했다. 나는 불안해하면서 신체검사 결과 발표를 기다렸다.
발표는 오후 늦게 이루어졌다. 불합격자 명단이 발표될 때마다 마음이 두근거렸다. 다행히 내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얼마 후에는 예비고사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리고 공군사관학교로부터 최종 합격했다는 통지서도 받았다. 너무 기뻤다. 그 누구보다도 어머니가 기뻐하셨다. 감사해서 눈물이 났다. 다음 날 나는 학원 친구들과 함께 간단히 소주를 마시면서 석별의 정을 나눈 후 학원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