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절 공군사관학교 가입교 훈련
1976년 2월 2일 아침 일찍 나는 어머니와 함께 서울 대방동에 있던 공군사관학교로 갔다. 공군사관학교에서는 한 달간의 가입교 훈련을 통과한 사람만 입교를 허락했다. 나는 어떠한 훈련을 받게 될지 전혀 몰랐기 때문에 두렵기도 했다. “1976년 2월 2일 공군사관학교로 출두하라!”라는 합격통지서의 딱딱한 문구부터가 나를 긴장시켰다.
공군사관학교 정문에 들어서자 여러 개의 날카로운 창이 달린 ‘성무탑’이 언덕길 위에서 위용을 자랑하며 버티고 있었다. 그런데 학교 안은 따뜻하게 느껴졌다. 선배 생도들이 우리 신입생들을 환영한다면서 뜨겁게 환호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잠시 긴장이 풀리고 어깨가 으쓱해지기도 했다. 얼마 후 우리 가입교 생도들은 부모님들과 헤어진 후 이발소로 갔다. 그때 한 생활 지도 생도가 나를 보며 말했다.
“귀관은 머리를 신주 모시듯 하는군!”
대부분의 가입교 생도들은 머리가 짧은데, 재수생이었던 내 머리는 장발이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훈련받을 때 머리를 깎을 텐데 굳이 돈 내고 이발할 필요가 있겠나 싶어서 그냥 간 것인데 지적을 받고 보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우리는 모두 머리를 짧게 깎고 나서 지급된 훈련복을 입었다. 대학교가 아니라 군대에 들어왔구나 하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이러한 느낌은 다음 날 아침부터 구체적으로 다가왔다. 날이 채 밝기도 전인데 ‘기상’하라고 하는 생활 지도 생도들의 외침 소리가 들렸다.
생활 지도 생도들은 우리를 마구 다그쳤다. 그것은 나의 넋을 빼앗기에 충분했다. 허둥지둥 옷을 입고 침구 정리를 하고 ‘점호장’으로 뛰어나갔다. ‘점호’를 마친 후에는 ‘구보’를 시작했다. 지도 생도들이 시키는 대로 식사하고, 훈련받고, 샤워하고, ‘수양록’을 쓰고, 생도 생활 규정을 읽고, 바느질로 ‘주기’를 하고, 빨래도 했다. 이렇게 바쁘게 지내다가 밤 10시 30분이 되면 ‘취침’을 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6시 30분에 기상나팔 소리를 듣고 일어나면 훈련이 다시 시작되었다. 생전 처음 받아 보는 훈련이라 견디기 쉽지 않았다. 선배들의 지적과 ‘푸싱’(두 손바닥으로 가슴을 치는 행위)도 힘들었지만, 구보 훈련이 가장 힘들었다. 오래 뛰게 되면 숨이 차서 죽을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하니 부정맥 때문에 그랬던 것 같은데, 당시에는 왜 그런지도 몰랐다. 그래서 포기하려고 하면 훈련 지도 생도가 끝까지 뛰게 했다. 부끄럽기도 하고 괴롭기도 해서 자퇴를 하고 싶었다. 게다가 일부 지도 생도들로부터 ‘구타’를 당하게 되면 더욱 그랬다.
그런데 어느 날 밤, 대대장이 모든 훈련생을 점호장에 모아 놓고 자퇴를 원하는 사람은 나오라고 했다. 그랬더니 꽤 많은 훈련생이 대열에서 나와 줄을 서기 시작했다. 나도 그 줄에 섰다. 그랬더니 대대장이 야단을 치면서 헌병을 불렀다. 그리고 한 훈련생을 불러오게 한 후, “이놈 영창에 넣어!”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자퇴를 원하는 훈련생들은 모두 영창에 집어넣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자 나와 있던 훈련생들은 모두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당시 많은 훈련생이 자퇴를 원하니까 대대장이 연극을 하였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후 십여 명의 훈련생이 퇴교당했다. 생전 처음 겪어보는 훈련이라 견뎌내기 힘들어서 나도 여러 번 자퇴를 생각했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이 훈련을 못 이기면 사회에 나가서도 성공할 수 없다는 지도 생도들의 말이 한몫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그동안 쏟아부은 노력이 아깝기도 했다. 그래서 참고 견딘 것이다. 그때 만약 참지 못하고 나왔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지금도 가끔 한다.
제2절 입교식과 생도 생활
1976년 3월 2일 입교식 행사가 있었다. 멋진 예복에 깃발 달린 모자를 쓰고 총기를 들고 행진하는 선배 생도들의 모습을 보면서 대한민국 공군사관학교 생도가 되었다는 자부심에 가슴이 뿌듯했다. 나는 가입교 훈련을 이겨내고 입교한 나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이때 나는 앞으로 구보 연습을 열심히 해서 어떤 훈련에서든 낙오하지 않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입교식을 마친 후 면회가 허락되자 나는 어머니와 동생들, 친구들을 만났다. 모두 축하해 주었다. 가슴이 뿌듯했다. 우리는 어머니가 준비해 오신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 참 많이 먹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모두가 놀라는 것 같았다.
가입교 훈련 동안 항상 배고픔을 느껴서 그런지 이후 나에게는 식탐이라는 것이 생겼다. 예전에는 음식을 많이 먹지 않았다. 밥을 먹다가도 시장기가 사라지면 종종 수저를 놓곤 했는데, 가입교 훈련 이후에는 밥그릇을 완전히 비울뿐만 아니라 배가 부를 때까지 먹어야 만족하게 되는 습관이 생겼다. 그러나 몸무게는 늘지 않았다. 운동량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생도 생활의 가장 큰 특징은 모든 것을 규정에 따라 해야 한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적응이 되지 않았다. 여름에는 오전 6시에 일어나 점호를 하고 간단히 구보를 한 다음, 아침 식사를 하고, 8시부터 12시까지는 학과 수업, 그리고 점심 식사 후에는 대개 체육 활동이나 군사훈련을 했다. 그리고 일과 후에는 몸을 씻고 오후 5시에 저녁 식사를 했다. 이후에는 약간의 자유시간과 자습 시간이 주어졌다. 그리고 오후 10시에는 모두 불을 끄고 취침해야 했다.
공군사관학교에서는 1학년 생도를 ‘메추리’라고 부른다. 아직 정식 생도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1학년은 청소 및 잔심부름을 도맡아 해야 했다. 그리고 틈이 날 때마다 2학년 생도들이 ‘지도’라는 명목으로 ‘기합’을 주었다. 아침 식사를 한 후 학과 수업이 시작되기 전까지 기합 받다가 ‘학과장’에 들어서면 갑자기 긴장이 풀리고 졸음이 쏟아졌다.
고등학교 때까지 나는 수업시간에 졸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사관학교에서는 무척 많이 졸았다. 학과장에 들어서기만 하면 잠이 쏟아졌다. 어느 날은 국어 담당 교수님에게 지적을 받았다. 이분은 수업시간에 졸다가 걸리면 무자비하게 구타를 하거나 벌을 주는 교수로 악명이 높았다.
그런데 수업 첫 시간에 내가 졸다가 걸린 것이다. '이제 죽었구나' 했는데, 교수님은 "생도 이름이 뭔가?"라고 묻고서는 수첩에 내 이름을 적었다. 그러고 나서 교수님은 "한 번 더 졸다가 걸리면 용서하지 않겠다."라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국어 수업시간만 되면 긴장이 되어 혀를 깨물면서 졸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1학년 때 내가 가장 좋아했던 것은 외출, 외박(1박 2일의 외출) 제도였다. 1학년 때에는 한 달에 두 번 일요일 외출이 허용되었지만 학년이 올라가면서 외출 외박 횟수가 늘어났다. 그래서 4학년이 되면 거의 매주 외박이 허용되었다.
그런데 외출, 외박보다 더 좋은 것은 1년에 두 번 있는 3주간의 휴가였다. 이때 여행을 많이 했다. 친구나 동기생들과 함께 설악산, 경포대, 홍도, 제주도 등에 가서 마음껏 구경을 하며 자유를 누렸다.
이처럼 외출과 휴가는 나의 생도 생활에 있어서 윤활유와 같은 것이었다. 내가 생도 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졸업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외출과 휴가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생도 생활을 잘하려면 공부도 열심히 해야 했다. 당시 공군사관학교에서는 매 학기 시험을 보았다. 그리고 하위 5퍼센트의 성적을 받은 생도는 퇴교 심의 대상이 되거나 퇴교를 당했다. 그래서 독감에 걸려 지독하게 아팠을 때도 나는 덜덜 떨면서 담요를 뒤집어쓰고 시험공부를 한 적이 있다. 덕분에 학과 성적은 그런대로 양호했다. 하지만 공부는 별로 재미없었다. 전공이 적성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3학년부터 전공을 선택했다. 나는 국방관리학과를 선택했다. 유일한 문과 전공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 교장은 국방관리학과가 조종사 양성에 필요한 전공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국방관리학과는 성적이 좋지 않은 생도들만 선택하게 하고, 나머지 생도들은 항공, 기계, 전자공학 중에서 선택하도록 했다. 지금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조치였다.
할 수 없이 나는 기계공학을 선택했다. 전자공학은 전자회로 등 복잡한 것이 생각나서 끌리지 않았고, 항공공학은 너무 낯설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잘 모르지만 많이 들어 본 이름의 기계공학을 선택했다. 그런데 기계공학은 내가 막연히 알고 있던 그러한 학문이 아니었다.
당시 교수 중에는 기계공학 분야에서 유명한 분이 계셨다. 모두 그분이 강의를 잘한다고 했지만, 나는 그분의 강의를 들으면서도 그 진가를 느낄 수 없었다. 강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문과를 전공했다면 잘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과 당시 교장에 대한 원망이 없지 않았다.
그런데 생도 생활 중 가장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 것은 내무성적이었다. 나의 내무생활 성적은 거의 꼴찌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공군사관학교에서는 매사에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사고를 요구하였으나 나는 그렇게 생활하지 못했다. 게다가 선배 생도들에게 불려 가 지적받거나 구타를 당하게 되면 모욕감과 분노를 느꼈다. 이렇게 지내다 보니 생도 생활에 대한 나의 태도는 상당히 부정적이었다.
언젠가 이런 일이 있었다. 당시 사관학교에서는 오후에 체육 수업이나 무도 훈련, 군사훈련 등을 했다. 그런데 이 시간을 대부분 사역(잡일)으로 대체하고 있어 한 동기생에게 불만을 토로했다. 그랬더니 그 동기생은 “무슨 소리야? 우리 학교만큼 교육제도가 잘 되어 있는 곳이 어디 있냐?”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너무 무안해서 아무런 말도 못 했다. 그 동기생은 소위 잘 나가는 모범 생도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태도로 생도 생활을 하니 아침 기상나팔 소리가 듣기 싫었다. 언제까지 이러한 생활을 해야 하는가 싶었다. 그래서 다시 자퇴를 생각해 보았다. 그런데 어느 날, 어머니가 당신 꿈에서 내가 작업복을 입고 왔다고 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보통 퇴교를 당하면 작업복을 입고 나가기 때문이었다.
나는 어머니를 생각해서라도 생도 생활을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기도를 했다. 그때 기상나팔 소리가 들릴 때마다 하나님을 불러보자는 마음이 생겼다. 나는 이튿날 아침, 기상나팔 소리가 들리자마자 소리를 내어 하나님을 불렀다. 그랬더니 기운이 생겼다. 이후 나는 한동안 가뿐한 마음으로 이불을 박차고 일어날 수 있었다.
나의 생도 생활은 이때부터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가능하면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즐겁게 생도 생활을 하려고 노력했다. 물론 그 가운데서도 부침이 있었으나 생도 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졸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돌이켜 보면, 4년간의 생도 생활은 정말 힘들었으나 나의 삶에 큰 도움이 되었음을 느낀다. 먼저 힘든 훈련은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인내심을 나에게 주었다. 그 덕분에 어떠한 훈련에서도 낙오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다른 동기생들과의 공동체 생활은 나의 한계를 깨닫게 해 주었다. 그 덕분에 타인에 대한 배려심도 가지게 되었다.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이전의 나는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을까?"와 같은 생각만 했다. 고등학교 때 재미있게 읽은 나폴레옹 전기와 스땅달의 <<적과 흑>>이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성공을 향한 나폴레옹과 줄리앙 소렐의 집념에 나는 너무 매료되어 있었다.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어 고생하는 어머니를 보면서 자라서 그런지 나는 빨리 성공해서 어머니를 잘 모셔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공군사관학교에 지원하게 된 것도 이런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관학교는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사관학교에서 내가 배운 것은 ‘위국헌신’이었다. 사관학교에서는 전쟁이 나면 목숨을 바쳐서라도 조국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 목적을 위해 나라가 우리를 지원하고 있다고 했다. 4년간 사관학교 교육을 받으면서 나는 나의 이기적인 생각을 극복하려고 부단히 노력해야 했다.
공군사관생도 시절 사진